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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RESQUE Oct 29. 2022

만나지 않고 만나는 시절,
관계의 정리정돈 日記 ④

떠나간 외출이 남긴 빈 자리에 만나는 너와 나는, feat 술자리




지난 가을,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담당 에디터를 여태 만난 적이 없다. 그와 관련된 이들도 메일, 그리고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을 뿐, 얼굴을 본 적이 단 한 번이 없다. 메일 박스에 쌓여간 이야기는 페이지를 흘러 넘치는데, 불현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러고보면 지난 2년간 잡지의 마감, 리포트 취재를 위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일을 했던 이들도 모두 비대면, 와이파이를 경유한 스크린 너머였고, 때로는 또 한 번의 메일을 통해서가 전부이다. 그런 ‘만남'에, 기억은 별로 자라지 못한다. 그 중 몇몇은 미안하게도 이름 조차 가물가물한데, 새삼 인간 관계란 무엇일까. 

요즘은 종종 주문하는 핫도그집 사장님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한다. 평점을 남겼던 한 음식점에선 고맙다고 콜라를 서비스로 얹어주었다. 하지만 그들과도 난 역시 형식적 인사 조차 나눠본 적이 없다. 만나지 않고 만나는 시절, 우린 어떻게 이별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시 또 만날까. 새로운 양식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시절 난 문득 그와 그들과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정작 만남은 자유롭지도 못한 계절에. 

‘그런데 우리, 언제 만난 적 있나요.’


우린 이제,

외로움을 공유하는 사이



며칠 전 밤, 매주 한 두 번씩 발행하는 레터를 쓰며 자택근무와 텔레워크를 말하는 시절의 ‘워크 라이프'를 이야기했다. 코로나 이후 방역 대책으로 확장하고 있는 ‘집에서 일하기’, 회사가 아닌 곳에서의 업무에서 떠올린 주제였는데, 막상 쓰고보니 왜인지 나, 즉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어있었다. 오래 전부터 출근을 하지 않고, 방 안에 노트북을 켜고, 회사가 아닌 카페에서 서너 시간 업무를 하는, 소위 프리랜서들. 그들의 ‘오늘'이 아무런 부대낌 없이 별 위화감도 없이 떠오르고 말았다. 코로나 시절 가장 변화를 겪지 않았을 ‘인종’이 가장 1순위로 생각난 것이다. ‘회사가 꼭 회사가 아니게’ 되고, ‘일하는 곳'이 곧 회사와 다름없는 시절, 오히려 ‘어색한 기시감’을 느끼는 사람들. ‘뉴노멀’이라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익숙한 나와 같은 사람들이, 왜인지 너를 생각하다 몹시 보고싶어졌다.

프리 5년차 여전히 회사를 나왔을 때 만큼의 불안을 갖고 사는 난, 세상이 돌고 돌아 내게 다가와준 건 아닐까 좀 창피한 착각마저 들었다. 만남이 줄어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을 이야기하는 요즘 너의 모습은, 회사를 나와 일이 줄어든 프리랜서의 대화를 빼앗긴 그것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이다. 업무 환경의 변화 혹은 상실로 인해 새삼 혼자가 된 사람들의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어떤 증상같은 것. 특히 근래엔 업무 장소를 한곳에 한정하지 않는 ‘프리 어드레스’란 신조어도 나오고, 애초 프리랜서의 프리란, 자유의 프리이길 바라지만, ‘슈가 프리’거나 ‘카페인 프리’의 ‘프리’에 더 가까우니까. 그러니까 어떤 ‘없음’의 상태를, 우린 공유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프리랜서가 될 것만 같던 시절, 그래서 난 이 상황을 조금 알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린 지금 모두 공통의 외로움을 체험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어떤 ‘비밀'같은 것. 



떨어져 일한다(tele-work)는 건 속박받지 않아 자유롭지만 그만큼 허전하다. 오랜 시간 빈 자리에 쌓이는 건 결국 고독이거나 외로움이다. ‘코로나 후 대면 커뮤니케이션의 부족을 느낀 사람은 40%였다’고,’ 지난 5월 일본의 ‘닛세이 기초 연구소(ニッセイ基礎研究所)’는 결과를 내놓았는데, 이 숫자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그 시절 외로움을 만났다. 어느 회사원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보지 않아 좋다고 얘기할 때, 그건 고작 '초기 증상'이라 중얼거리며 공감했고, 회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환호하는 이들을 보며 '곧 허전해질 퇴근 후 시간을 생각해보라'고 조언해주고 싶었지만, 역시 알 것 같았다. 익숙한 일상이 멀어졌다는 건 그 사실 만으로도 익숙하고 낯선 빈 자리를 곳곳에 남기고 만다. 다만, 조금 먼저 겪은 나의 외로움이 너의 그것과 얼마나 같고 또 다를지 몰라, 우린 다시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난 보수적이게도 고쳐 생각하고 말았다. 

코로나 이후 첫번째 봄, 사내 커뮤니케이션이 소원해졌다는 뉴스가 나오던 날, 곁에 없는 너에게 레터를 보내며 이런 말을 적었다. ‘지금 도쿄에선 잃어버린 커뮤니티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전에 없던 ‘사교장’을 만들어 내고있다’고. ‘사교장’이라니, 대체 어느 시대 말이야 싶지만, 디지털 스크린이 더 익숙해진 시절, 그건 곧 외로움의 시작이었을까. 공통의 외로움을 안고 일어나는 계절, 일에서도 사람에게도 조금은 ‘자유’를 얻은 우리는, 지금 어디서 누구와 만나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한다. ‘술 못마시는 나 그대로 괜찮아.' 2021년 7월, 도쿄 시부야에선 좀 묘한 캐치카피를 들고, 술 못 마시는 사람들의 공간 ‘스마도리 바(SUMADORI-BAR)’가 문을 열었다. 코로나 2년차, 술 못마시는 사람들이 왜인지 모이기 시작했다.


술자리의 관계는

얼마나 '인간 관계'일까



좀처럼 뜻을 헤아리기 힘든 ‘스마도리 바’, 그 이름의 정체는 Smart Drinking, 일본식 영어 표기법을 활용한 네이밍이다. 코로나를 계기로 술, 그놈의 술 때문에 벌어진 너와 나 사이의 일들을 이제와 돌아보는 성격을 갖는다. 바(bar)라는 이름에 적합하진 않게, 제공하는 음료는 평균 도수가 1%가 되지 않는다. 음주 라이프 스타일 한 켠에선 크래프트 맥주를 지나 크래프트 진(Gin)이 유행한다는데, 이곳에서 제공되는 건 기본 알코올 0.00%, 0.5%, 그리고 3%의 드링크가 그나마 조금 알코올 흉내를 내는 정도이다. 비알콜 음주자들을 위한 푸드 메뉴도 20개나 준비되어 있다. 그러니까 음주와 비음주의 역전 현상, 한마디로 술마시시 않는 옵션이 보장되어 있는 술집인 셈이다. '스마도리바’의 CEO 카지우라 미즈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술을 마실 수 '있고 없고'가 아니라, 나이 체질, 기분, 신(Scene)에 맞는 적절한 음주의 중요합니다.” 이제와 하는 이야기이지만, 콜라와 우롱차로 건배 어떤가요. 스마트하게 마시기 위한 너와 나의 새로운 장(場), 다시 만나는 그 날의 술자리는 어쩌면 이미 준비 되었다. 그런데 해시태그를 달고도 술을 마시던 시절, 이게 정말, 술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



술을 팔지 않는 술집, 처음부터 이상한 가게 ‘스마도리바’엔 그 말고도 또 하나의 이상한 구석이 있다. 바로 가게를 기획, 운영하는 게 70년 맥주 회사 ‘아사히 맥주’란 사실이다. 즉, 술 만드는 노포 기업이 금주를 권하고 있는 셈이다. 오래 전 광고 마케팅의 우수 사례로 이야기되었던 '파타고니아'의 '이 재켓은 팔지 않는다(Don't Buy this Jacket)'와 좀 비슷하다. ‘아사히 맥주’는 지난 2022년 6월 광고 대행사 ‘덴츠(電通)’와 손을 잡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술 문화를 모토로 ‘스마도리(スマドリ)’란 회사를 설립했다. 물론 여기서 다양성이란 다종다양한 술을 골라 마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술을 마시는 방식, 즐기는 방법의 서로 다른 차이, 그런 의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바’를 지향한다. 말하자면 술만 팔아오던 회사가 '술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기 위해 차린 게 ‘스마도리바’에 더 가깝다. 그에 더해 코로나라는 전에 없던 방역 환경 안의 음주를 고민하며, 그 아이디어는 실체가 되었다. 



하지만 이전에도,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부터 '아사히 맥주'는 ‘책임있는 음주(責任ある飲酒)’를 선언하며 다양한 논안콜적 캠페인을 벌였다. 알코올을 대체해 줄 탄산수 음료 ‘윌킨슨(WILKINSON)’을 개발해 판매했고, 유럽에선 시장 점유율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기업 전체적으로 알코올 지분을 줄이고, 논알코올 비중은 늘리는 방향의 전환을 시도한다. 다만 이번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대의 흐름과 조류에 맞춰 설마 '술이 아닌 술'을 파는 상황까지 연출되어버렸다. 술 문화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술을 마시지 않는 일상'에 안착한 걸까. 일본에선 코로나 초기, '술을 팔고 팔지 않고'에 따라 가게의 영업 시간 제한이 달라지기도 했다. 

더불어 근래엔 논알코올 기류가 전체적으로 확대하는 분위기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는 그러한 트렌드, 혹은 사람을 가리켜 소버큐리어스(Sober Curious)라 부르기도 한다. 풀어보면 소버는 소위 ‘맨정신’, 큐리어스는 말 그대로 호기심, 즉 ‘맨정신인 (나의) 상태가 궁금하다’이다. 그렇다면 이건, 술만 팔아오던 회사가 술이 깬 아침에 내어놓는 새로운 시대의 '술상 정도'라 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카지우라는 “알코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이 풍부해진다고 하지만, 알코올 없이도 그게 가능하다면 없어도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 맥주 회사도 금주를 권하기 시작한 시절, 그동안 우린 술을 너무 과신, 과대평가해 왔던 건 아닐까. 


금주를 말하는 술집과,

자유를 찾은 관계의 첫 잔



그리고 이건 내심 회식을 좋아했던 나로서는 잘 공감이 되지 않지만, '술 자리가 싫어요'란 말. 재택 근무 후 강제 회식에서 자유를 외쳤던 이들을 모두 하나의 카테고리로 이야기하는 건 힘들지만, 이건 아마 '술이 싫은 것'과 '술을 함께 하게되는 사람' 즉 관계가 싫은 것, 이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나누어 이야기해야 할 것같다. 나의 경우 애초 맘에 들지 않는 이와는 술자리를 하지 않았던 터에, 비교적 복 받은 직업 환경 덕분에 둘 다 해당되지 않지만, 때로 어떤 어긋난 관계는 술핑계를 대고 있을 뿐이기도 하다. 소원해진 어느 커뮤니케이션이란 종종 술과 관계없이 진심이 부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애초 인간 관계란, 다소 귀찮고 성가신 일. 그게 어렵고 힘들어 그저 쉽고 편하게 술로 둘러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그 여부를 아마 정작 본인 밖에 모르고 있는 일이 없지도 않다. 

더불어 이와는 반대 입장에서, 장난처럼 하는 ‘술 김에 한 말’이란 관용어구. 이건 여러 장면에서 변명이거나 회피의 땔감이 되어주는데, 사실 그건 우린 언제 한 번 맨정신의 서로를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동시에 바른 정신에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는 얘기도 될까. 근거도 없이 자주 그리고 널리도 쓰이는 ‘술 마시며 친해진다’랄지, '술 마시면서 친목을 다진다'라는 류의 말들은, 그저 술에 취한 말. 술이 아니고서야 온전한 대화, 만남, 관계를 하지 못하는, 정작 속내를 말하지 못한다는 맨정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변명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술을 너무 과신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뒤늦은 착각이 어찌할 수 없이 들고마는 것이다. 어찌됐던 이건 다, 술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물론 전형적인 그리고 고질적인 술 문화, 강제적 회식과 획일적인 음주에 힌해서라면, 코로나 기간 중 재택 근무를 통해 비로소 구원을 받은 것은 사실임에 분명하다. 애초 회식 자리에 술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관행, 모임이 길어지면 술이 등장해버리고 마는 관습은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 우리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혹은 '첫 잔은 원샷'이란 룰은 대체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심지어 주종을 일치시켜야 단합이 된다는 '망설'은 술김에 뱉었다 해도 꼰대짓을 모면하기 힘든 수준이다. 그런 취기의 화합, 도모, 그리고 친목은 도리어 관계를 외면, 나아가 훼손, 상처를 주고 끝내는 어긋나게 하는 '주사'가 될 확률이 크다. 

실제로 ‘소버 큐리어스’를 자처하는 이들은 그 이유가 다양하지만, 술 문화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이란 답은 공통되게 나타난다. 즉, 누군가에게 술은 곧,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소버 큐리어스’란 말을 처음 제기한 루비 워리톤 씨는 미국판 ‘보그’에서 ‘알코올은 담배 다음으로 시대 너머로 사라질 것’이라고까지도 이야기했다. 그만큼 술은 때로 위해하다. 하지만, 10년 전 일상이었던 흡연이 지금 그런 것처럼, 음주 또한 건강을 기준으로 '마시다'와 '마시지 않다', 양자택일의 선택이 공존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걸까. 술을 팔고, 또 팔지 않는 ‘아사히 맥주’ 그리고 ‘스마도리바’의 카지히로는 심지어 이런 발언도 했다. 

"알코올이 일상에 갖던 가치는 보다 활발한 사교, 원활한 인간 관계를 위함이었고, 만약 그 기준이 변화한다면 음주의 척도 또한 변할 뿐이다.'" 그러니까 그저 보려하지 않았을 뿐, 시대는 변하고 있고, 애초 술집 메뉴엔 주종에 더해 '마시지 않는다'란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술은 애초, 누구에도 음주를 강요하지 않았다.


과도한 관계 정리가 아닌,

'객관적 사이'의 시작



코로나 이후 술자리는 술취한 역사에 묻혀있던 우리의 관계를 모색한다. 술에서 자유로워진 자리는 술 때문에 만나지 못한, 혹은 틀어진 관계를 어쩌면 되돌려 놓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더이상 술 때문에 힘들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논알콜 시장이 2015년 대비 6배나 성장했다는 일본에선 ‘술을 마시지 않거나 못한다’고 20대가 30%를 넘는다는데, 그건 곧 앞으로 음주 인구는 점점 더 줄어들 거란 전망이기도 하다. 지금 당신이 취해있지 않다면, 술잔은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술 마시지 않는 미래 세대의 인간 관계는 과연 원활하고 또 수월할까. 술로 써내려간 관계의 역사란 사실 어마어마해, 성급히 술잔을 치우려다 애써 쌓아온 관계까지 지워버릴 우려는 여지없이 남는다. 

회식이 직장인이 경험하는 관계의 절대적 총량이 아니듯, 술을 나누는 자리가 관계의 질과 성패 여부를 가늠하는 것 또한 아니다. 직장인의 인간 관계는 술에서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인생의 더 많은 관계는 술자리가 끝난 뒤 시작된다. 최근엔 재택에서 일을 하며 홀가분해진 기분에 관계를 점점 더 줄여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 그건 술김이 아니라 기분 탓에 느끼는 그리고 범하는 과오일지도 모를 일이다. 설령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이유가 사람 때문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물건이 아닌지라 “과도한 관계 정리는 위험하다”고, '일본 멘털 개선 지원 기구' 대표이사 오노 모에코 씨는 경고한다.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때로 귀찮지만, 제한된 관계 안에서는 트러블이 생겼을 때 의지할 다른 ‘이바쇼()’를 갖고있지 않다면 정신적으로 힘들어요. 한정된 관계 안에서는 알게 모르게 감정이 편향 되고, 그게 유일한 것이란 착각에 빠져 유연성을 잃어버립니다. 어떤 관계에서도 파랑은 일기 마련이기 때문에, 애초 스트레스가 없는 인간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어요.



결국 중요한 건 술의 유무를 떠나 관계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세월의 공백을 감내하고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는 오직 너와 나, 그 관계만을 살아갈 수 있는 솔직함은 아닐까. 감정에 빠져 미화하지도 왜곡하지도 않은 객관적 관계의 일상을, 잠시 멀어진 지금 고민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술잔을 모두 물리고 남는 건 결국 관계, 내가 아닌 너, 또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니까. 귀찮고 성가시지만, 전에 없던 너와 나 사이의 '객관적 관계'가 그렇게 시작한다. 

만나지 않고 만났던 사람, 이름만 아는 사람, 얼굴만 본 사람, 레터만 주고받은 사람, 코로나 기간 중 세상이 우리에게 안긴, 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관게를 위해선 마스크를 벗고 술에 취하지 않은 맨정신의 첫 인사가 오직 필요할 뿐이다. 술의 자유를 말하는 지금, 술에 취하지 않은 우린 아마 더 어색하겠지만, 세상 모든 시작엔 풋풋한 긴장이 흐르기 마련이다. 그렇게 아마, 봄이 찾아온다. 레터에 마침표를 찍으며 난, 결국 모든 온라인의 하루는 다시 만나는 날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라고, 애써 적어보았다. 

다시 관계의 초입에서 그렇게 너를 기다리며. 물론 곁에 술은 두지않았고. 맨얼굴의 관계가 지금 다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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