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인간'을 너머, '지구별 인간'을 그리다, 무라타 사야카
소설가 무라타 사야카. 그의 이름 앞에서 섣부른 상상은 금물이다. 일본 내 3천 개, 편의점을 통해 가장 비범한 일대기를 끌어낸 그가, 이번엔 ‘지구 사회’에 도전장을 내민다. 평범하지 못해 평범할 수 없어 태어나는 작은 별의 잔혹하고 아름다운 분투기.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린 국제 작가 페스티벌 참석 차 방한한 그를 만났다. 새 소설의 제목은 ‘지구별 인간.’ 공교롭게도 올해의 테마는, ‘월담’이었다.
Q ‘편의점 인간’ 이후, 장편으로는 ‘지구별 인간’이 바로 다음 작품이다. 시작은 무엇이었나.
처음엔 나가노라는 무대가 있었다. 주인공 나츠키의 소녀 시대와 어른이 된 후를 쓰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츠키가 성적 피해로 가상 세계에 빠져들어 살아간다는 설정은 비교적 빨리 잡은 편이다. 전에도 썼던 주제이지만 담담하지 못했기 때문에, 좀 더 큰 틀 안에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성적 학대란 이슈에 정면으로 맞서보자고. 하지만 막상 시작하니 갈등이 많아 역시나 힘든 주제였지만.
Q 아쿠타가와상을 수상으로부터 2년이 걸렸다. 그 사이 어떤 일들이 있었나.
보통은 소설을 다 쓴 그날 바로 다음 작품을 시작하는 편이다. 다만, ‘편의점 인간’이 수상을 하면서 6개월 정도 너무 바빴고,이후 조금씩 시간이 생겼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편집자와 이야기를 하며 쓴 걸 다 엎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가노란 무대를 품고, 주인공 소녀의 이야기는 쓰면서 차차 결정된 것 같다.
Q 평소 사람이 많은 킷사뗑(喫茶店) 같은 곳에서 쓴다고 알고있다. 그런데 코로나가 시작됐고, 지장이 있었을 것 같다.
본래 하루의 리듬을 만들고 쓰는 사람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을 그만둔 상태였기 때문에 출판사에 출근하며 식당 안 부스에서 쓰기도 했다. 생활 소음이나 사람 목소리가 조금 있는 편이 집중되기 때문에, 회의실처럼 문이 닫힌 곳이 아니라, 식당 안의 부스나 복도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를 이용해 쓰기도 했다. 코로나 상황이 되면서는 출판사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모닝 먹으러 킷사뗑 가서 집필, 점심엔 또 다른 킷사뗑에서 런치 먹으며 집필, 밤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옮겨서 집필하고 귀가하는 식이었다.
Q 출판사에 출근하며 집필은 처음 듣는 이야기다. 한국에선 거의 듣지 못하는데.
일본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다. 다만 예전엔 일종의 전통처럼 있었던 것 같다. ‘칸즈메 방(缶詰部屋)’같은 게 각 출판사에 있어, 작가들이 와 쓰기도 했다고 한다. ‘신초사’에는 미시마 유키오가 머물며 소설을 썼다는 방이 있다.미시마 유키오의 유령이 나온다는 말이 돌기도 하고(웃음). 아마 나보다 위위 세대에는 있었나 보더라.
Q ‘지구별 인간’에선 ‘편의점 인간’에서 제기했던 ‘무엇이 정상이고 평범인가’라는 물음이 확장되고 있다. 데뷔 때부터 일관된 테마이기도 한데, 특별히 어떤 걸 이야기하고 싶었나.
나가노가 무대인 건, 고향이고 내가 실제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자주 다녔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본 것들이 아직도 매우 인상 깊게 남아있다.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보통 화장을 하는데, 할아버지는 특별히 허가를 받아 매장을 했고, 그런 경험들이 생소롭다 느껴, 언젠가 꼭 쓰고 싶었다.
Q 동시에 주인공 소녀의 어른 시절과 어른이 된 나츠키가 병행해 그려지고 있다. ‘편의점 인간’ 역시 그와 같은 구도였고, 이건 성인이 된 나츠키를 말하기 위해서는 소녀 시절의 나츠키를 돌아봐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건 매우 의식한 부분이다. 주인공을 쓸 때 난 그의 초상화를 먼저 그린다. 그림 뿐 아니라 어디서 태어나 자랐고, 어느 초등학교에 다녔고, 계속 그곳에서 지냈는지 혹은 전학을 했는지. 연표까지는 아니어도 그 정도로 세세하게 쓴다. 유년기라는 건 그 사람을 형성하는 매우 주효한 시기이기 때문에 작품을 할 때마다 거치는 작업이다.
Q 좀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소설 속 나츠키가 느끼는 위화감이란, 어린 시절 무라타 사야카의 그것과 얼마나 가까이 있나.
매우 가깝다고 느낀다. 나는 나츠키보다 좀 더 단순했지만(웃음), 매우 고독했고 어릴 때는 죽으려고 했고, 매우 고통스러웠다. 나츠키가 마법의 세계에서 구원받는 것처럼, 나도 나만의 공상 세계를 갖고, 그 안에서밖에 마음을 회복할 수 없는, 그런 아이였다. 예전 한 선배 작가가 ‘소설이 아무리 픽션이라 해도 작가의 혼이 담긴 논픽션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주인공과 성격이, 인생이 전혀 달라도 그 안엔 나의 혼이 느낀 것, 감각한 것들이 응축되어 하나의 결정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느낀다.
Q 정신/육체적 학대를 받은 주인공은 무라타 소설을 요약하는 아픈 서사의 상징처럼도 느껴진다. 계속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식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아직 치유되지 못해서? 어린 시절 난 매우 고독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사랑해주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 스스로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죽음을 생각할 때에만 위안을 느꼈을 정도니, 아마 굉장히 위험한 상태였을 것이다. 반면 상상의 친구 30명 정도를 만들었고, 그들이 내 안에 살아줬고, 내 생명을 지켜주었다. 그 중 5~6명은 아직 어디에도 돌아가지 않고 지금도 같이 있어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난 살아내지 못했을 거다. 소설 안에서 ‘그럼에도 살아간다(生き延びる)’란 표현을 몇 번이나 썼는데, 그건 분명 내 감각이 반영된 표현이다.
Q 좀 달리 이야기해보면 성애와 가족이란 관념을 뒤짚는 시도가 데뷔작 ‘수유’부터 계속되고 있다. 꽤 고통스러운 글쓰기란 생각도 드는데, 그런 것들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쩌면 '정화'가 아닐까도 생각했다.
아마도 정화가 맞다. 데뷔 전 썼던 소설을 읽은 한 학생이 무리하게 카운셀링을 하려했던 적이 있다(웃음). 그게 내 작품의 결점이기는 한데, 동시에 무언가 커다란 요소로서 존재하는 느낌이 있다. 나의 혼 같은 게 피를 철철 흘리고 있고, 쓰는 행위를 통해, 그것도 상냥한 터치의 붓이 아닌, 상처의 딱지를 떼내고 칼로 찌르는 듯한 행위로 좀 구원을 받는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계속 그런 행위를 반복해왔다는 느낌이다.
Q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고통, 묘사의 잔혹함, 그로테스크한 상황 등이 독자에게 견딤을 동반해야 하는 고통으로 전이되는 일은 왜인지 벌어지지 않는다. 어떤 거리감이 확보되어 있어, 가공의 안전한 세계로 부터 지켜진다는 느낌이 든다. 단순히 작가와 소설 속 인물 사이 거리감의 문제인걸까.
주인공과 소설가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예전에 존경하는 선배가 ‘울면서 쓴 소설은 술에 취한 바텐더가 만든 칵테일과 똑같아, 볼품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웃음). 울면서 쓴 작품 중에도 훌륭한 게 이 세상엔 잔뜩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소설가는 자신에게서 냉철한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의 나’는 소설을 위한, 쓰기위해 이용되는 ‘그냥 인간’으로 밀어놓고, 냉철한 ‘소설가인 내’가 되는 감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말씀주신 것처럼 상냥하다고 읽어주시지는 않을 거기 때문에, 지금 이야기가 매우 기쁘고 감사하다.
Q 그리고 그 거리감이란 게 소설과 작가 사이 뿐 아니라 소설 속 세계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으로도 읽힌다. ‘지구별 인간’에 대한 리뷰 중 인상적인 문장을 발견했는데, 읽어보면 ‘편의점 인간’이 상식의 이면을 이야기했다면, ‘지구별 인간’은 상식의 이면의 이면을 그리고 있다’ 였다. 그런 점에서 헤세의 ‘데미안’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새삼 물어보면, 상식, 평범이란 어떻게 태어난다 생각하나.
내게 상식이라는 건, 유년기에 날 매우 힘들게 한 것. 난 나츠키와 달리 매우 내향적이어서, 유치원, 초등학교 때 특별 관리가 필요한 아이로 다뤄졌다. 부모님으로부터도 그런 식의 취급을 받았다. 빨리 투명해지고 싶었고, 평범해져서 어서 투명해져야지란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평범한 게 곧 투명해지는 거니까. 근데 평범, 상식이라는 건, 10년 전이랑 비교하면 어느새 달라져있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평범, 상식 그 자체가 환상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고, 내가 그렇게나 오래 저주받아온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불완전한 것이란 사실이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도 평소엔 평범이란 걸 별로 깨고싶지 않다는 기분이 여지없이 있다. 아마도 내게 이건, 끝나지 않을 과제라고도 느낀다.
Q 무라타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작품 속 인물들이 ‘절대적 옳지 않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설 속 인물들이 악하든 선하든 ‘내가 옳다’는 주관적 진실을 바탕으로 한다면, 무라타 소설에선 그 최소한의 규칙조차 부정된다. 말하자면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탄생이다.
나는 주인공이 신뢰되지 못하는 화자란 설정을 좋아한다. 주인공을 전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소설이란 읽을 때는 재미있지만, 쓸 때에는 ‘얘 무슨 얘기하는 거야’라고, 의문을 품게하는, 신뢰가 불가능한 인물이 더 매력적이다. 독자에게 보이는 주인공이 세계를 인지함에 있어서의 ‘어긋남’이랄까.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광경을 쓰고 싶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신뢰하지 못하는 화자이기도 하고. 어릴 적 슬펐던 이야기를 할 때면, ‘너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어’란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사람의 인지란 늘 이런 것들이 섞여있는 것이다. 나란 사람에
대한 수상함, 완전하지 못함, 인지의 어긋남에 대해 흥미가 있고, 인간이란 전부 어느 정도는 신뢰하지 못하는 화자란 측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Q 이번 ‘지구별 인간’은 ‘편의점 인간’으로 처음 무라타 소설을 읽은 이들에겐 꽤 충격적이었을 것 같다. 묘사의 잔혹함이나 상상 그 너머를 초월해버리는 전개의 방식이, 레벨을 몇 단이나 올린듯한 인상이다. 특히 인육을 먹는 엔딩같은 것.
결말을 전혀 정해놓고 쓰지 않기 때문에, 이번 작품 역시 라스트가 어떻게 될지 모른 채 썼다. 다만 나는 무의식을 매우 의식한다. 기억하는 것과 의식하는 것이란 사실 얼마 되지 않고, 오히려 무의식의 바구니를 짊어지고 있고 그 안에 무언가가 가득 들어있어, 바구니로부터 말이나 장면을 불러내는 듯한 감각 같은 게 있다. 소설을 쓸 때 바라는 건, 껍질을 깨주었으면 좋겠다는 것.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할 수 없는 어딘가로 나아가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Q 단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라서가 아니라, ‘편의점 인간’은 무라타 세계를 보다 본격화해준 작품이란 생각도 든다. ‘러브레터’란 앤솔로지엔 ‘콘비니언스 스토어 님에게(コンビニエンスストア 様へ)’란 에세이를 쓰기도 했던데, 편의점이란, 새삼 어떤 의미인가.
그 러브레터가 아마 ‘편의점 인간’이 되었다. 당시 난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세이 의뢰가 왔을 때 주인공을 콘비니 씨라 정하고, 그에게 러브레터를 쓰는 보내는 식으로 쓴 글이다. 계속 사귀는 설정으로.다만 난 소설 속 케에코와 달리 정말 소극적이고 낯선 사람과 말도 잘 못하는 인간이었는데, 편의점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비로서 평범...(웃음)해졌음을 느꼈다. 매뉴얼대로 행동하며 점원이 될 수 있었던 것 뿐 아니라, 휴게실에서 남자 스태프랑 말할 때에도, 평소의 나랑은 다르게 러프하고,보이시한 말투로 말하며 행동하는 내가 있었다. ‘콘비니언스 스토어 님에게’란 러브레터에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당신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라 적은 구절이 있는데, 정말 그런 감각이다. 편의점 덕분에 줄곧 ‘인간 실격’이었던 내가 드디어, 겨우 인간이 되었다는 감각. 편의점은 나를 최소한 인간으로, 인간같은 것, 인간인 것처럼 능숙하게 있을 수 있게 해준 장소? 뭐 그런 매우 이상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Q 무라타 소설은 늘 현실의 상식과 정의를 의심하면서도, 그로 인해 구원받는 듯한 하나의 가능성의 세계가 열린다. 이는 곧 현실에 적응하고 타협하며 때로는 굴욕하고 살아가는 현실 속 인간에 대한 긍정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예전에 쉽게 영향받는 인간에 대해 참 귀엽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영향받는 존재로서의 인간’, 이렇게 자괴적이고 파괴적인 희망의 표현을 본 적이 없다.
마침 지금 쓰고있는 소설이 정말 의지 없고 영향받기 쉬운 인간의 이야기이다. 실제 나 자신이 매우 그랬고, 나는 편의점에 쇠뇌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다.정말 잘 영향받는 사람이고, 매우 얄팍하다.(웃음) 소설가 중에 얄팍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드물게도난 얄팍하고어리석은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에, 기왕 그런거라면 나를 분석해 그 얄팍함과 어리석음, 영향받기 쉬움에 대해 써보자고 생각한다. 한 예로, 일본에서는 인터뷰같은 거 할 때 의지가 없어 보이는 듯한 답변이 선호받는데, 해외에 나가면 반대로 의지가 있고, 나름의 폴리시를 갖춘 말을 좋아해준다. 그런 걸 알았을 때, 의지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치솟는데 그게 진짜 의지라면 상관없지만, 보여주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참으며 할 때도 있지만, 그런 내 자신이 결국은 보여주기식일 뿐이다. 다만 소설가로서 생각하는 건, 드물게도 이렇게나 어리석은 인간이 소설을 쓰고있기 때문에, 그것도 기회이니까 이왕이면 이용해서 계속 써보자고 다짐할 뿐이다.
* 매거진 '싱글즈' 11월호로 진행, 게재된 인터뷰 기사의 무편집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