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믿는 도시에, 미움은 자라지 않는다. 아날로그한 일상의 디지털術
좋아하는 사람과 카페에 들어가 볕 좋은 자리에 마주보고 앉는다. 아직 오지 않은 그를 기다릴 때에도 맞은 편 빈 자리에 자리를 잡는 게, 어쩌다 몸에 익다. 얼굴을 보며 대화하고, 표정을 읽으며 맘을 전하고, 의사의 소통이란 언젠가 서로를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너와 나,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너를 쳐다보는, 그런 그림이었을까. 하지만 그건 좀 자기중심적이고, 거울 앞에 선 나와 비슷해 보기이도 한다. 오직 소리로 뱉어진 말들만이 오가는 세계. 정확하지만 때로 폭력적이고, 너가 말하기를 멈췄을 때 난 너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언제든 고개를 돌리면 남남이 될 수 있는 사이. 애당초 그곳엔 처음부터 헤어질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남자와 여자가 카페에 들어서 테이블을 사이에 맞은 편이 아닌, 오래된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을 때, 대화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일정 거리를 사이에 두고 소리와 말로 거래되던 너와 나의 이야기는 돌연 사라진 ‘사이’에 말의 방식을 바꾸어보고, 맞은 편이 아닌 곁에서 조금은 다른 감각의 이야기가 시작한다. 달리 말하면 ‘말하고 듣기’의 새로운 환경 조건. 그곳의 대화는 소리의 언어가 아닌 반응의 말에 주목하고, ‘거리’를 매개하지 않으며 부쩍 친밀한 세계에 진입한다. 미처 소리가 내지 못한 소리를, 말이 담지 못한 말을, 이야기가 되려하는 이야기를, 최단 거리의 전과 다른, 약간은 어색하지만 수평의, 대화가 태어나는 것이다.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지속되어온 대화와의 거리는 그렇게 사라져 Silent, 정점이 되고 마는데, 그건 곧 보통과 평범의 대화가 오랜 시간 지워왔던, 차별과 편견 그 사이의 거리는 아니었을까.
요즘 일본에서 인기라는 드라마 ‘Silent’는 유독 그런 침묵에 주목한다. 도쿄 메구로구(目黒) ‘ANEA CAFE 마츠미자카(松見坂)’의 나무 체어에 앉아, 어깨를 나란히한 수평의 이야기가 시작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오랜만에 재회한 남녀 친구 츠무기(카와구치 하루)와 소우(메구로 렌). 소우는 사고로 청력을 잃었고, 츠무기는 그와의 대화를 위해 손의 언어를 손수 배웠다. 대화의 거리가 통하지 않는 silent, 가장 점점의 대화가 그곳에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그저 의자의 문제인 걸까. 아니면 대화 방식 재설계? 드라마는 드라마, 펙션은 픽션일 뿐이지만, 카페는 실존하고 의자 역시 실물이고, 도시는 상냥함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휠체어 체험이 아니라 휠체어 식당에서의 런치, 기계가 아닌 사람의 나이듦을 따라가는 계산대, 그리고 문밖의 내가 아닌 너를 배려하는 화장실 속 설치된 수상한 모니터. 이렇게 조금은 보통과 평범 밖에 흘러가는 것들. 드라마는 말이라는, 실은 어떤 벽도 경유하지 않는 그 마음의 언어를 정성껏 전달하고, 조금은 어색한 내일이 그렇게, 상냥함을 말하기 시작한다.
지난 2022년 12월 4일, 도쿄에선 좀 이상한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입구부터 천장의 높이는 170cm, 밥을 먹는 테이블도 뷔페식 음식이 놓여있는 선반의 높이도 어딘가 조금씩 낮은 위치다. 뭐가 이리 불편할까 싶은데, 이는 다수와 소수의 입장을 바꿔보는, 장애를 갖지 않은 이가 장애를 느끼도록 연출된, 그러니까 배리어-프리의 정반대 '배리어-풀'의 조건을 구현한 체험형 식당이다. 이름하여 '배리어-풀 레스토랑.' 손님은 물론 주문을 받고 요리를 하는 점원 모두 다 휠체어 이용자들. 평소라면 밥 한끼 먹기 위해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닐텐데, 애초 휠체어 이용자에 맞추어 설계된 식당에선 모든 게 ‘배리어-프리’로 작동한다.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 도리어 여러모로 힘듦을 겪는건 휠체어를 타지않는, 입장 한 순간부터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여기선 명백히 소수에 속하는 소위 건장자들이다. 심지어 이들에겐 머리 부딪힘을 방지하기 위해 ‘배리어 프리’요소로 노란 헬멧이 주어진다. 별안간 공사장 헬멧을 쓴 채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불편함, 새삼 장애란 무엇일까.
세상의 중심을 조금 낮게, 그저 휠체어 시선에 조정해봤을 뿐인데 드러나는 불편함, 뒤틀린 생활 기준이거나 기울어진 양식이 한둘이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이 여기저기서 폭로된다. 행사를 주최한 ‘일본케어피트 공육기구(日本ケアフィット教育機構)’ 무카사 타카히로 대표는 모든 게 다수로 기울어진 세상에 소수와 다수를 역전시켜보는 발상이라고 말했는데, "공생사회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다수, 그리고 소수는 새삼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에초, 소수자란 무엇일가. 세상은 그저 나, 그리고 나의 생활 반경, 그 안에서 움직이는 듯 싶지만, 그건 그저 혼자의 세계. 드라마 속 나란히 앉는 나무 의자와 평소보다 조금 낮은 천장, 그리고 테이블은 조금 다른 시선에서 살아가는 세계를 바라본다. 차이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일상이란, 평소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허리를 굽히거나 고개를 돌려, 그러니까 불편을 감수하며 응시하는 일일까. 드라마의 마지막회 시청률은 근래 일드로는 드물게 8.3%. 세상이 조금은, 너에게로 다가가려 한다.
소위 장애와 비장애, 소수자와 다수, 그리고 약자와 강자같이 늘 대립해온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자주, 그리고 쉽게 인용되는 게 정해진 공식 마냥 ‘입장 바꾸기’이다. 물론 이는 기본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여러모로 자주 인용될만한 덕목의 자세이기는 하다. 다만, 그건 어떻게 실천이 될까. 매일같이 지하철 시위 잡음이 이는 것처럼, 애당초 인간이란 불편을 꺼려하는 동물이란 사실을 떠올리면 입장 바꾸기란 불가능한 현실, 결국 우린 차선의 실천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난, 그 ‘힌트’를 또 하나의 드라마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First Love, 初恋’에서 보았는지 모른다. 우타다 히카루의 20년에 걸친 첫 사랑에 대한 노래를 모티브로 제작된 이 드라마엔 20년 세월을 버텨온 그 사랑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자리를 달리하며 반복되는 세월의 묘한 우연의 일치가 다수 발생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 극중 주인공 노구치 야에(야기 리카코)는 사고로 기억을 잃는데 그의 첫사랑 상대 나미키 하루미치(키도 타이세이)의 여동생은 오래 전 사고로 청력을 잃었다. 시간을 달리해, 상대를 바꾸어 반복되는 불행의 우연. 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첫사랑이란 우연의 암시가 20년 세월을 감내하며 지속되어 온 것처럼, 불행한 사고 역시 (좀 잔인하지만) 우연의 세월을 순회하는 중이다. 삿포로 아사히가와 로터리(旭川ロータリー)를 중심으로 확장하며 돌아오고,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를 서성이는 이 드라마는 깊은 운명, 그리고 우연의 ‘윤회 사상’에 듬뿍 젖어있는데, 그렇게 조금은 너가 되어보는 세월이 이곳이 잠시 도착한다. 삶은 회전 로터리의 신호와 같은 것이라고, 스친 인연은 곧 재회할 운명이라고, 매우 아름답게, 그리고 애절한 멜로디로 이야기한다. 그곳엔 ‘첫사랑’이란 우주가 아마, 팽창중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건, 상냥함에 대한 ‘힌트’가 되지 않을까.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때의 너가 된 나를 위해 건네는 작은 마음의 말과 같은. 혹은 명곡의 음악으로 이어지는 너와 나와 같은. 얼마 전 도쿄 네리마구(練馬区)의 한 마트에선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계산대, ‘슬로우 레지’ 서비스가 시작됐다. 그런데 그건, 그야말로 내일의 나를 위한 오늘의 최선에 다름 아니다. 그곳에선 뒷사람 신경 쓰느라 허겁지겁 영수증을 지갑에 쑤셔넣을 필요가 없고, 그렇게 마음의 부담을 느낄 이유도 없다. 그저 조금 느린 너를 위해, 마트의 계산대가, 세상이 잠시 템포를 늦춰준다.
마트에서 쇼핑을 하고 계산을 할 때면, 점원이 바코드에 가격을 찍어 입력을 할 때마다 물건을 하나씩 순서대로 봉지에 담는다. 물론 몇몇 백화점의 서비스 코너는 두 직원이 나란히 대기해 나의 그 ‘업무’를 대신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동네 마트에서 가격이 입력된 물건을 봉투에 담는 건, 온전히 사는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이건 사실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계가 아니고서야 바코드의 짤막한 전자음만큼 재빠른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결국 봉투에 투입되지 못한 물건은 쌓이고, 순서를 기다리는 뒤의 손님은 화가나서 쳐다보는 것도 같고, 어찌됐든 조금이라도 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게, 아니 물러나주는 게 이곳에 가장 요구되는 일일 것이다. 한 마디로 맘이 참 불편한 계산. 셀프 계산대가 등장하기 이전, 아니 그 이후에도 이런 경험 누구나 한번쯤 하지 않았을까. 실은 모두가 템포를 조금씩 늦춰주면 될 일이겠지만, 애초 ‘줄서기’란 조금이라도 빨리 나의 순서를 기다리는 일에 다름 아니니까, 그런 '느림의 질서'를 이곳에 기대하기란 어렵다. 서로가 서로를 재촉하는 시간, 그렇게 모두가 공범이자 곧 피해자. 마트 계산대에서 우린 모두, 이상하게 이름 모를 ‘등 뒤 누군가'의 라이벌이 되어있다.
하지만 후쿠오카현(福岡県) 유쿠하시시(行橋市)의 한 마트 ‘유메타운(ゆめタウン)’ 나카무라바시 미나미유쿠하시(南行橋) 지점에선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근 ‘슬로우 레지’를 시작한 그곳은 계산대의 가장 큰 덕목으로 ‘손님 스피드에 맞추어 응대하겠습니다’를 모토로 한다. 값을 잘못 들어도 친절하게 다시 이야기해주고, 충분히 돈을 꺼내고 지갑을 정리할 시간을 결코 빼앗지 않는다. 주로 고령 인구가 많은 츄코쿠(中国), 큐수(九州) 지역 60개 점포를 대상으로 했지만, 곧 시니어 층을 겨냥한 방식이지만, 어쩌면 계산의 가장 정석이다. 새삼 계산을 한다는 건 어떤 행위일까. 근래엔 셀프 레지가 확대되며 '빨리 간편하게' 주류가 되어가지만, 삶이란 모두 각자의 템포로 흘러가는 것처럼, 이곳의 계산대는 보다 사람의 호흡을 생각한다. 요즘엔 '얼마에요'란 말을 듣는 것도 거의 손에 꼽을 정도인데, 계산은 언제부터 말하기를 꺼리기 시작했을까. 이곳 매장엔 '슬로우 레지’ 외에 셀프 레지도 다수 갖추고 있고, 자연스레 젊은 연령과 노년층 고객은 자신의 속도에 맞는 계산대에 줄을 선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과거와 현재가,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가 함께 쇼핑을 한다.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 '디지털 난민'은 이곳에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점원이 손님과 함께 커뮤니케이션 하면서 풀 서비스로 대응하는 레지입니다.’ 미나미뉴쿠하시 지점장 엔도 켄타 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레지의 ‘풀서비스.’ 디지털 시대에 너무나 생소한 표현이지만, 여기서 계산은 엄연히 하나의 접객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다음 사람을 위해 물러나야 하는 조급함의 시간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여유있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쇼핑의 매듭을 짓는 너와 나 사이의 풀-서비스가 그곳엔 있다. 뒷사람 눈치보며 허겁지겁 지갑을 정리할 필요가 없고, 허둥지둥 정리되지 않은 짐을 들고 계산대를 나와 마트를 빠져나갈 이유도 없다. 그러니까 나의 리듬으로 계산을 마칠 수 있다. 난 종종, 다리 진통제를 달고 사는 나는 지하철 임신자 보호석을 보면 ‘약자의 정의’를 되묻고 싶어질 때가 있지만, 신체 속도가 조금 느린 누구이든 이곳에선 모두 환영받는다. 서로 다른 계산의 속도가 모두 인정받는 세이프티존. 이를 최첨단 셀프 레지도, AI를 동원한 기계도 할 수 없을, 오직 너의 상냥함에서 태어나는 '모두의 계산대'라 할 수 있을까. 나와 나보다 어르신인 너, 그리고 언젠가 시니어층이 될 너와 나의 맘 편한 쇼핑 시간이, 그곳에 쑥쑥 자라나는 중이다.
상냥함이란 무얼까. 좀 착한 그 남자거나 친절한 그 여자와 같은 게 아니라, 상냥한 도시란 어떻게 만들어질까. 일상의 디지털화, 기술의 개발이 지배하는 지금의 도시이지만, 아날로그 왕국이란 불리는 일본에선 그렇게 사회적 약자가 되는, 혹은 특정 상황에서 약자가 되어버리는 이들에 대한 배려, 혹은 섬세함의 설계가 그 못지않은 속도로 생겨나는 중이다. 지역 슈퍼마켓에서의 노년층을 위한 ‘슬로우 레지’와 마찬가지로, 최근 도쿄 일부 공공 화장실엔 화장실의 혼잡도를 알려주는 개인실 내 모니터가 설치되었다. 한 줄로 정리해 ‘슬로우 레지’의 화장실 버젼이라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밖에서 큰일을 볼 때 문 앞에 기다리는 사람의 수, 그들의 대기 시간 등을 개인실 내 설치된 모니터로 알려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은 그 모니터가 지금 당장 화장실이 급한 문 밖의, 대기중인 이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현재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는, 그러니까 바지춤을 내린 채 변좌에 앉아있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좀처럼 나오지 않는 사람을 보채기 위해, 얼마나 독점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목적의 모니터가 아니라(이건 꽤나 심각한 프라이버시 침해겠지만), 밖에 몇 명이 볼일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지, 또 그게 어느 정도의 시간을 소요했는지 알려주며 나 말고 다음 사람을 신경 쓰게 하는, 달리 말하면 배려를 북돋는 모니터란 이야기이다. 물론 꽤나 많은 인수, 그리고 대기 시간이 눈에 들어온다면 맘이 불편해 O도 나오지 않겠지만, 애초 배려라는 건 나를 양보한 만큼 너를 위하는 일, 그렇게 불편의 행위이기도 하다. 큰일을 보는 사이, 타인을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 급해서 찾게되는 공공 화장실. 그런 맘에 내가 아닌 남을 생각할 수 있을까. 화장실 갈 때 나올 때 맘 다르다고, 내가 아닌 남의 급한 사정을 헤아리게 될까. 화장실 전체의 비어있는 개인실 수와 ‘내가 지금 몇 분이나 머물고 있나’를 나타내는 사이니지를 개발, 설치한 VACAN의 카와노 타카노부 대표는 ‘무리해 쫓아내는 게 아니라 밖에 얼마나 대기하고 있고, 나는 얼마나 오래 체재중인지 알게 하면서 스스로 양보를 하게하는, ‘선한 회전율’을 만들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한다. 모니터의 설치 위치-안이냐 밖이냐-에 따라 미움이거나 배려가 된다. 실제 그 결과 30분 이상 개인실 이용하는 사람이 60% 이상 줄었다고 하는데, 말을 하지 않을 뿐 모두 갖고있던 화장실에서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 그 ‘속’사정은 나아가 남을 배려할 나와 너의 공통된 '공감 자산'이 된다. '볼일'을 보기 전과 후, 선후의 상황 만이 다를 뿐, 여기서 타인에 대한 배려는 언젠가 나의 위급함을 달래줄 '인프라의 안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상냥함이란, 애초 나를 위한, 언젠가의 나를 대비하는, 결국은 자기 완성형의 감정이었던 걸까.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공공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의 비중은 무려 39%. 보다 필요한 건 화장실은 볼일을 보는 곳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주의할 필요겠지만, 너의 위급함이 결코 나의 위급함의 '적'은 아니다. 그렇게 우린 좀 서로에게 친절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공중 화장실에서의 명언. 우린 이미 서로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바캉(VACAN)은, ‘기다림을 없애다, 대기 시간 단축’을 목표로 하는 스타트업 기업이다. 물론 VACAN은 VACANT의 VACAN. 오직 대기 시간 만에 집중하는 일개 기업이란 게 좀 우습게 들려오지만, 코로나 이후 공공 시설의 혼잡도를 명기 표시하는 서비스로 태어났고, 그렇게 좀 이롭다. 그 밖의 사업으로는 교통 시설의 혼잡도를 표기, 공개하는 일도 한다. 그리고 우타다 히카루의 두 곡의 첫사랑 노래를 얼개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는 타임 리프 세계에서 우연은 일상만큼 빈번히 벌어지지만, 다분히 픽션같은 그 이야기는 코로나 이후 다시 만나는 일상을 고대했던 이곳에 유독 현실적인 드라마, 애절한 리얼리티를 부여받는다. 알면서도 눈물을 흘리게 되는, 그렇게 유치한. 하지만 현실은 얼마나 덜 픽션일까.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첫사랑’에서, 그리고 ‘Silent’가 왜 하필 사고로 인해 청각에 장애를 갖게된 인물을 등장시켰는지 우린 알지 못하지만, 코로나라는 건 일견 일상 가장 가까이의 사고, 재앙으로 비유된 삶 가장 깊숙한 자리의 오작동, 뒤늦게 발견된 트러블이기도 하다. 코로나같은 각자의 사건을, 우린 하나쯤 안고 살고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연, 그건 사실 뒤늦은 알아차림이거나 생소한 사용법, 갑작스런 사건 이후 벌어진 예상 못한 내일의 도래와도 같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기술이 코로나 이후 멀어진 너와 나 사이를 채우는 가운데, 낯선 상냥함이 자란다. 오늘도 배달 음식으로 점심을 떼우는 시절, 가게 주인의 손 편지를 우린 여태 받아본 적 있을까. 시간은 가끔, 거꾸로 흐른다.
‘First Love 첫사랑’의 거의 마지막 대목에서, 뒤늦게 되찾은 기억 앞에 눈물을 떨구는 야에 곁엔 어느새 자신보다 키가 큰 아들 츠즈루(아라키 토와)가 함께이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음악을 함께 듣는다. 그의 첫사랑 나미키가 어쩌다 아들 츠즈루에게 물려준 CDP, 그 안에 담겨있던 우타다 히카루의 1998년의 첫사랑. 실패한 어제는 울고있지만, 곁에선 떠오른 기억이 미소를 짓고, 그렇게 오늘은 내일이 되어간다. 이건 설마, 상냥함일까. 뉴노멀을 말하는 새시대에 아날로그같은 디지털 시계가 아사히카와 로타리를 회전하는 일상에, 이런 상냥함은 아마, 우리에게 처음이다. 너는 언젠가 나일지 모른다는 희망? 상냥함이,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