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하늘에 보이지 않는 무지개가 뜬 날
먼저 ‘물 안에서'라는 출발점.
그것은 지금 어느 날, 조금 이르거나 나중이거나. 영화는 돌연 아무 말도 없이 그곳에 있다. 안개라도 자욱히 깔린 날 해변에 한 남자는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탐색하고 다른 남성의 목소리가 말을 걸어 ‘고동이 아주 많다’고 이야기한다. 목소리의 남성은 ‘좀 따서 가져와봐’라 말하지만 도리어 스스로 고동을 줍는 남자에게 다가간다. 뒤이어 애잔하고 처량한 음악이 흐르고 둘은 방향을 돌려 아마도 숙소로 돌아간다. 홍상수의 29번째 영화 ‘물 안에서’가, 그리고 시작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무엇인가.
뿌옇게 흐린 날과 두 남자, 그리고 꼭 그와 같은 음악이 들려와 어느 정도 이 날에 대해 수식하지만, 영화의 오프닝으로서 이 장면이 전하는 정보란 실로 아무것도 없다. 카메라 초점이 어긋날 정도로 흐릿한 어느 시간의 세계가 지금 이곳에 도착해있다는 것. 그도 다분히 존재로서의 사실, 영화가 겨우 시작을 하려하고 있다는 불충분한 조건으로서의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건 별로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다. 홍상수 영화의 오프닝이란 늘 이렇게 불확실한 인상으로 문을 열지만, 그럼에도 처음 만나는 감각의 세계가 낯설기만 하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지 않았거나 볼 수 없었던 것. 이 뿌연 뭉개짐의 출현은 여기와 저기 사이 경계를 허물고, 그 안에 영화란 프레임은 이미 그 자리의 기능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주인공 성호는 영화를 찍으려 한다. 그의 친구 남국과 후배 남희는 영화 안에서 영화를 찍으러 성호와 함께 이곳까지 왔다. 3일의 시간이 흐르고 세 번의 식사를 하고 세 번의 카메라가 켜졌다 꺼지고. 어쩌면 고작 이런 이야기. 혹은 그런 장면들. ‘공간의 종류들'에서 조르쥬 페렉은 시작이란 공간에 입구와 같다는 말을 했고, 파스빈더는 그건 꿈과 같은 순간이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홍상수는 요즘 시작 만으로도 영화를 만들고, 이번엔 시작을 하기도 전 이미 좀 심란하다. 대학을 막 졸업한 또는 아직 재학중인, 시작 직전의 어느 남자와 여자가, 지금 영화 안에서 영화를 시작하려 한다.
코로나 기간 중 만들어진 세 편의 영화, ‘인트로덕션'을 기점으로 ‘당신 얼굴 앞에서’와 ‘소설가의 영화’, 그리고 이후 ‘경계’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탑’과 ‘물 안에서'까지, 최근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게 떠오르는 화두는 아마도 ‘시작'이다. 코로나 직후 가장 먼저 완성된 작품 ‘인트로덕션’은 제목부터 정확하게 하나의 ‘시작’을 가리키고 있었고, 배우 이혜영의 새로운 시작으로 만들어진 두 편의 다음 영화는 돌아옴 이후의 시작, 그에 더해 영화 안에 영화를 만드는 또 하나의 시작을 내포하고 있었다. 시작을 하고도 마치 아직 시작도 찾지 못한 냥, 이상하게 ‘시작' 그 어디 즈음을 서성인다.
그래서 그의 코로나 이후 영화는 얼핏 ‘가장 지금'이거나 오늘(‘당신 얼굴 앞에서’), 과거가 되어버린 어제의 오늘이거나, 무게의 어제를 뒤로 보다 새롭게 태어나려는(‘소설가의 영화’) 발버둥의, 영화가 되어버린 시간의 스케치처럼도 보인다. 익숙히 봐온 홍상수 영화의 오랜 페르소나 40대 지식인 중년 남성은 뒤로 물러나고, ‘도망친 시간' 이후 여자들은 무언가에 도전하는,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지금 아는 것을 새롭게 하는 시간 그 어딘가에 도착해 있다. 스물 다섯 번 만(‘인트로덕덕션’)의 ‘시작'인 만큼 비상하고, 그런 만큼 기이한 출발의 영화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정작, 홍상수의 영화는 어디에 있는걸까. 여기서 ‘시작'이란 언제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
영화 ‘인트로덕션'에서 홍상수 감독은 스스로 친절하게 모두 네 개의 문장으로 서로 다른 ‘인트로덕션'을 설명한 바 있다. ‘한 사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행위', ‘한 사람이 뭔가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 ‘새로운 것을 세상에 가져옴'과 ‘어떤 것의 처음 부분.’ 그리고 이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도 더했다. 이는 곧 시간의 선후 관계로서의 ‘시작'이 아닌, 상대적인 시작, 깨우침의 시작이거나 자세와 방향 전환의 시작, 또는 무언과와의 단절 이후 시작이거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 안에서의 시작을 가리킨다. 동시에 홍상수의 영화가 하나의 단일한 시간(프레임)이 아닌, 복수의 ‘시작과 출발’, 그로인해 파생하는 잠재 시간의 발현으로서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처럼도 들린다.
물론 홍상수 영화엔 현실과 뒤섞인 꿈, 비틀린 시간, 반복과 착각 그리고 오해로 불거지는 미완성의 시간들이 혼재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애초, 시작 그 출발점부터가 혼란하다. 그건 때로 가장 지금을 바라보려는 시도(‘당신 얼굴 앞에서')이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서는 가장 날것의 오늘을 포착하려는 아마추어의 영화 만들기란 플롯을 취하기도 한다. 더러는 코로나 시기의 혼란이 가장 짙게 묻어난 ‘탑'과 같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시공간, 혹은 그 너머의 애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탑'은 정확히 한 번의 떠나감(영화 초반 술을 사러 길을 나서는 병수의 딸 정수의)과 두 번의 돌아옴(병수의 1번의 도착과 그를 다시 시도하는 2번의 도착)으로 문을 열고 닫는 영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같은, 여는 문이 곧 닫는 문이기도 한 어느 꼬리를 문 도마뱀과 같은. 영화는 시작하고, 시작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미국에서 돌아온 상옥은 단절되었던 과거, 그 시간 문턱 앞에 있다.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작가 후배 세원을 만난 소설가 준희는 절필 이후 영화가 만들고 싶은 그 시작 앞에 서있다. 한 차례 흥행에 성공한 영화 감독 병수는 투자의 실패 이후 몸도 마음도 상한 뒤 재기하려는 낡은 시작 앞에 있고, 달리 말하면 시작도 하지 못한 영화가, 하나 둘 셋 만들어졌다. 오직 그런 시간들만의 영화가 흘러간다. 아직 시작이기에, 시작도 하지 않았기에 낯설고, 새로운 가장 날것으로서의 ‘도입'이다. 덜 살아진 시간으로서 이 시작은 가능하다. 세르주 다네가 공간이 아닌 장소로서의 영화를 말하며 언급했던 ‘오직 그것과 마주하는, 그리고 그것 안에 있음의 영화' 그 시작처럼 보이고, ‘무언가 의미화되지 않을 것’을 고집해 찍곤 했던 브레송적 시간을 이어가는 듯한 제스처로도 느껴진다. 나아가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잠자는 남자’에 적혀있던 ‘조금 이르거나 늦거나, 우연히 발견한 오늘’의 ‘낯선 돌아봄'이라 말해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상의 회귀, 어떠한 단절이나 멈춤(혹은 죽음) 이후 다시 ‘그곳에 있는’ 또 하나의 세계란, 자연스레 영화 속 세대의 전환을 가져온다. 영화와 영화를 이어볼 수 있다면 홍상수의 ‘요즘 영화’엔 시작을 다시 시작하려는, 근대 이후 시간의 불가역성을 뒤집는 앙리 베르그손의 ‘순수한 지속'에 보다 가까운 운동으로서의 지속, 곧 재기하는 시작이 감지된다. ‘인트로덕션'의 주인공이 김상경이나 권해요, 김민희도 아닌, 신석호와 라는 것. ‘물 안에서'가 신석호와 하상국, 그리고 처음 홍상수 영화에 출연하는 1997년생 김승윤 단 셋 만으로 이뤄진다는 것. 병수나 경수, 즉 누군가의 시작이 아닌 성모나 영호 곧 시작하는 누군가로서 새로운 주체의 시간. 그런 새로움.
물론 이건 별 거 아닌 이야기일 수도, 애초 주인공이란 말이 홍상수 영화에 별로 어울리지도 않지만, 그만큼 덜 살아본 세월의 세상과의 ‘마주함’이고, 시작에 더 가까운 시간에서의 시작이다. 곧, 미완성으로서의 시작, 다시 말해 가장 시작다운 시작인 것이다. ‘인트로덕션'에서 아빠를 만나지 못한 영호, 엄마와 함께 떠난 독일에서 그 품을 벗어나 남자 친구를 만나는 주원을, 하나의 단절 또는 독립 이후 새로운 시작이 아니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들 영화는 전에 없던, 바로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어떤 시간 안에 도착해 있다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이 이야기했던 인트로덕션의 아마도 그 네 번째, ‘어떤 것의 처음 부분. 그곳에서 영화는 (다시) 시작한다.
“나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짜여야 한다. 어떤 배우를 편안한 상태에 두고서,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무언가를 온전히 기록하는 것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다.”
그렇다면 미완성의, 시작을 신뢰할 수 없는 영화에서 그 비어진 시작의 자리를 우린 아마 영화가 태어나는 최초의 순간으로 대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홍상수는 ‘소설가의 영화'에서 준희의 입을 빌려 찍고싶은 영화, 곧 가능한 영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다분히 홍상수 감독 본인의 ‘영화 만들기'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문장을 좀 달리 해석해보면, 여기서의 배우란 모든 것이 진짜여야 하는 것들의 출발점, 세상과 관계하는 주체이자 피사체, 동시에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서의 존재이며 무언가를 기록하게 하는 살아있는 매개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물 안에서', 배우 신석호와 하성국을, 그리고 처음으로 김승윤을 그곳에, 편안한 상태로 놓아 두었더니, 세상은 뿌옇게 흐려져있다. 또는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자 만드는 그들이 편안한 상태로 머물 수 있는 곳으로서 초점이 심하게 어긋난 세계가 그곳에 도착해있다. 영화의 문을 여는 도입이자 이미 그러한 상태로의 진입. 영화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뿌옇게 포커싱 아웃된 ‘영화적 날씨’는 무엇의 의한 결과일까. 왜 이곳에서 영화는 맑은 하늘과 바다를 보여주지 않을까. ‘물 안에서’에서 가장 큰 의문이기도 한 이 문제에 대해 ‘버라이어티’의 베를린 공개 후 첫 리뷰는 ‘완성되지 않은, 영화를 찍을 계획이지만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개체로서 성모의 덜 성숙됨을 드러내는 뿌염이란 해석을 내놓았다. 일견 타당하지만 다소 피상적이다. 실로 성호는 그리고 남국과 남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마을을 걷고, 시간이 흐르고 날이 지나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지만 그로인해 얻어지는 어떤 종류이든 발견, 곧 앎은 좀처럼 없어 보인다. ‘알지 못함'의 상황이 계속 지연,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영화에서, 그 안의 이중 프레임으로 설계된 공간에서 이 짙은 안개가 드리운 시야를 성모의 것이라 단정하기엔 무책임한 인상이 들고, 무엇보다 성모의 카메라는 영화가 엔딩이 이르기까지 단 한번도 앵글에 맺힌 상을 보여주지 않았다.
도리어 이 ‘뿌염'은 보다 이전, ‘인트로덕션'의 성모가 아닌 영호가 연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식당을 나온 뒤, 꿈을 경유해 멀리 숙소 창가의 엄마를 바라보던 장면에서 발생한 적이 있다. 연기 속 키스 장면에 ‘죄스러움'을 느끼고 진짜 아닌 진짜에 슬퍼하며 연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그의, 즉 어느 마지막의 순간에 세상은 왜인지 뿌옇게 흐려있었다. 달리 말하면 마지막이거나 시작의 그 순간을 우린 제대로 볼 수 없어, 혹은 이미 놓쳐버려 뭉개진 어떤 시상(視像)의 떠나감을 그저 바라보며 먹먹한 감정을 느낄 뿐이다. 무언가의 마지막 또는 시작, 그건 뿌옇게 흐린 엄마의 얼굴, 곧 짙은 안개의 하늘이었다. 보지 못한 것과 볼 수 없었던 것. 혹은 보여주지 않은 것과 보여줄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이를 바라보기 위함이란, 곧 살아내는 것이란 그 안에 편안한 상태로 머물러 드러나는 것을 기록하는 일일까.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편안한 사람이란 누구일까.
영화의 3장, 2장에서 다시 돌아온 영호의 여자친구 주원은 포독막염으로 한쪽 눈을 볼 수 없을 거라 이야기한다. 성호는 ‘걱정하지 마, 내가 다 고쳐줄게’라고 말했다. 둘은 포옹으로 이를 다짐, 약속하기도 한다. 낡은 것 오래된 것, 오직 지나간 것들만이 묵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세상에 이를 새로운 것, 이제 시작하는 것, 덜 살았고 더 살아갈 시간의 도래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즉 새로운 세대가 꿈트는 시도의 흔적은 아니었을까. 홍상수의 요즘 영화엔 알게 모르게 ‘요즘 사람들’의 새로워서 투박한, 하지만 투명하게 맑은 안개낀 하늘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홍상수의 영화는 근래, 특히나 코로나 이후 점점 더 시간이 사라지는,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간의 전과 후가 아닌 전이거나 후, 꿈과 현실의 교란, 때로는 서로 같은 시점의 이야기를 병렬해 나열하는 등 누구보다 시간적 실험에 열심이었던 그의 이전 영화들을 떠올리면 이상하리만치 투명하고 꾸밈이 없는 올곧은 시간이다. 때로는 적어도 며칠은 될 시간을 과감하게 점프하며 이어가는 경우의 신(‘소설가의 영화'의 준희의 영화 촬영을 생략한 채 극장에 이미 도착해있던)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건축의 수수께끼같은 구조에서의 착란, 사각지대를 빌려 공간 안에 숨어든 시간을 따라잡기도 하지만(‘탑’), 점점 더 작아지는 그의 영화에서 시간은 별로 필요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영화의 서사를 교란하는 ‘장난'도 치지 않고, 현실을 도발하는 장치도 치지 않은 채 그저 그런 공기로서 존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블레이즈 파스칼이 그의 대표작 ‘팡세'에서 이야기했듯, ‘사람은 현재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그건 그저 미래를 처리하기 위함, 그로부터 빛을 얻으려 하는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고, 오직 미래 만이 목적이다.' 이 말을 생각해보면, 홍상수의 시간은 어쩌면 조금 더 미래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이야기하지 않은, 그리고 보지 않은 또는 못한 것만이 보다 ‘진짜'에 가깝고 목적이 되어있는 것. 그런 시간.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기에 알 수 없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그리고 이러한 보다 목적의, 수단이 아닌 것으로서의 시간은 근래 홍상수 영화에 심심치 않게 출몰하는 것이다. ‘소설가의 영화'에서 글을 생업으로 해온 소설가 준희의 하루를 결정지은 건 그가 오랜 시간 다져온 필력이나 경험이 아닌, 우연히 만난 책방에서 일하는 현우의 수화였다.
‘지금은 날이 맑지만, 날은 금세 진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니자’라는, 이 다소 주문처럼도 들려오던 말도 아닌 손의 동작으로 발화된 문장은 이후 곧 준희의 ‘소설가의 영화'를 만들게 한다. 준희의 선배가 떠올렸다는 이야기는 술 마시는 가운데 금새 잊혀져 ‘발화'되지만, 현우의 수화는 곧 시간이 되었다. 가장 새로운 것만이 새로움을 시작할 수 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오직 미래를 예감하게 하는 동시에 다짐하는 것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를 대변할 그리고 살아갈, 보다 덜 살아온 주체로서 ‘젊은 사람’은 그래서 필요하다. 홍상수는 어느새 오직 지금, 그리고 약간의 미래가 될 무언가 만으로 영화를 만든다. 김상경과 권해요가 아닌 그로부터 신석호로의 비약. 시간이 흘러 오히려 더 처음이 되어있는 영화 속 현실의 비현실성.
파스칼의 ‘현재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그럴 수 없음으로도 해석되고, 얼마간의 시작되지 않은 미래 만이 시간을 지각하게 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지금 오랜 과거를 지나 바로 그 곁의 ‘보이지 않는 곳', 미래를 향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건, 그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현실 너머 ‘진짜'를 향하던 그 가장 멀고도 가까운 지근거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 안에서'라는 목적지.
이렇다할 예고도 없이 도착한 그곳에서 세상은 온통 뿌옇다. ‘인트로덕션 ‘이후 몇 번의 시작과 시작 아닌 시작을 거쳐 도달한 ‘물 안에서' 눈 앞에 보이는 건 별안간 뿌옇게 흐린 하늘이다. 점점 더 작아지는 홍상수의 영화는 이제 단 세 명의 인물만을 등장시키고, 시작 이전의 시작, ‘버라이어티'의 지적대로 ‘덜 성숙된’ 세계에서 이제 필요한 건 그에 동참하게 될 인물들의 구성이다. 성호는 영화를 찍으러 이곳에 왔다. 그의 친구 남국과 후배 남희도 그를 따라 영화를 찍으러 이곳까지 왔다. 성호는 무엇을 찍어야 할지 잘 모르고, 그에게서 별 이야기를 듣지 못한 남국과 남희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즉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영화에서 홍상수가 보여주려 하는 건 아마 이와 같은 서툰 영화 만들기의 면모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엔 작지만 뚜렷하게 드러나는 묘한 질서가 있다. 바로 숫자 3이라는. 겨우 시작하는 영화는 가장 최소한의 단위, 3을 단위로 시작, 그리고 움직인다. 아마 오직,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3일이 걸렸다. 계획도 정해진 이야기도, 하물며 일말의 시나리오도 없이 내려온 남쪽 마을 바람 많은 그곳에서, 촬영은 결국 3일째 끝이 났다. 지지부진 시간만 흐르는 그곳에 이야기는 좀처럼 맺어지지 않지만, 딱 한 조각 남은 피자를 정확히 가위로 세 등분 나누어 먹는 것과 같이, 성모와 상국, 그리고 남희까지 등장 인물도 3명이었으니 한 사람당 하루씩, 그저 딱 그만큼이 흘렀을 뿐인 이야기일지 모른다. 피자와 샌드위치, 회. 세 번의 식사를 함께 나누고, 3일의 아침과 밤이 지나고, 숙소로 마련한 허름한 1층 주택에 그들은 서로 다른 세 개의 방에 머물고, 동시에 그곳을 세번 즈음 들어갔다 나오고.
성모가 영화를 위해 모아놓은 아르바이트비는 300만원이었고, 담벼락 유채꽃과 숙소 앞 작은 개울의 민물고기, 그러고보니 초반에 바다 한복판 둥근 섬에 앉아있던 이름 모를 새 무리까지, 느슨한 상징의 포착마저 숫자 3의 얼개로 움직인다.
물론 그저 우연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아직 시작도 못한 그곳에 숫자 3이란 분명 자의든 타의든 하나의 질서가 되어있다. 장 뤽 낭시가 ‘무위의 공동체'에서 신하적 기원에 의한 공동체를 부정하며 반대로 주체의 유한성, 즉 유한한 개인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과 같이 잘 알지 못하는 동시에 알려고 갈망하는 주체로서 이들은 3의 공동체를 이룬다. 성모도 남국과 남희도 다른 이들과 접촉하는 일은 절대 없거나 보여지지 않았다. 라면을 먹는다는(실제 먹지 않았지만) 성모에 김치를 권했던 숙소 주인 아주머니의 김치를 그들은 (아마) 먹지 않았다. 새 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골목에서 남국에게 ‘조금만 조용할까'라고 주의를 줄 정도로 이들은 최대한 그 3 안에 머물려 한다.
그리고 이들을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는 건 돌연 들려온 자동차 엔진 소리였다. 페릭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이들은 ‘놀랄 것도 없이 오늘을 발견했고, 하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모른다.’ 이곳에서, 줄곧 뿌연 채 진행되는 이 영화 안에서 세상은 밤이 되어도 별로 어두워지지 않았다.
‘물 안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영화다. 홍상수 영화에 으레 등장하는 줌업과 아웃도, 연결이라기보다 도리어 거리를 드러내기 위해 작동했던 패닝이나 남은 잉여 시간의 여백을 잡는 ‘패닝하지 않는 패닝'도 단 하 차례 등장하지 않았다. 여기서 카메라는 인물의 등장과 함께 그곳에 시작하고 다음 대목에선 단지 그를 드러내기 위해 또 다른 그곳에 도착해있을 뿐이다. 로케이션차 촬영 중이던 성모가 남국에게 ‘그냥 가만있어. 프레임아웃되게'라고 말했던 것처럼, 여기서 각 프레임의 세계는 단절되어 있다. 어떤 연속성의 시간을 절대 부여받지 않는다. 영화의 가장 기초적 편집 방식이라 할 숏 바이 숏의 구성이 이 영화를 수놓는 유일한 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뭉개진 화면 안에 서로 다른 프레임 단위의 세계는 그저 출현했다 소멸, 그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렇게 최대한으로 간소화된, 역으로 가장 시작하는 ‘무언가를 하지 않은’ 영화는 프레임 내부를 너머 밖, 그 너머와 작동하고 관계한다. 이 단조로움의 영화가 영화를 찍는 영화, 그를 바라보는 관객이란 서로 다른 층위의 3자를 매개하면서 화면 속 보이지 않던 깊이의 프레임이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액자 구조의 영화가 갖는 중층 구조의 영화 설계인 셈인데, 다만 여기서 서로 다른 3자라 칭할 것들의 존재는 별로 분명하지가 않다. 영화를 만드는 영화를 찍는 영화 안에서, 성모의 영화 만들기는 어느새 그 영화 만들기를 바라보는 홍상수의 영화에 전이되어 있(어 보이)고, 그를 바라보는 이는 관객으로 영화 밖에 있는지 혹은 그 안에서 성모의 카메라 너머를 바라보는지 종종 알 수 없게된다. 뿌옇게 뭉개진 스크린 화면처럼 경계를 잃은 영화가 드러내는 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오직 감각으로 존재하게 되는 세계 아마 그 어딘가이다. 마치 이 영화의 제목 ‘물 안에서'가 갖는 묘한 공간감처럼, 영화는 그곳에 있고 또 없기도 하다.
성모는 촬영의 마지막 날, 혼자만 갖고있던 생각을 나머지 둘에게 이야기한다. 해변 아래에서 홀로 쓰레기를 줍던 여성을 보고 떠올린 이야기를 그제야 영화의 안, 그리고 밖까지 모두가 알게 된다. 그 이야기의 골자란 여기와 저기, 그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에 관한 것인데, 일단 장소이자 서로 다른 차원으로서 3의 구성을 하고있다. 이전 경수나 병수의 그것처럼 좀 익숙한, 이미 봐온 종류의 것이다. 성모는 새롭지만 결코 낯설지 않다.
그는 자신의 심정이 지금 이렇다며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느끼기에 위(해변)에는 삶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이 있고, 그 바로 밑 절벽 밑에는 땅 위에서 흘러 내려오는 부산물을 혼자 치우는 어떤 여자가 있다. 그 사이를 막 왔다 갔다 하던 남자는 여자를 보게 되고 감명을 받아 내려오게 되고, 하지만 다시 땅 위로 올라가기 싫어져 고뇌에 빠진다.
“이 남자가. 여자를 보고 나니까 더 가기 싫어지는 거야.”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대목은 곧 홍상수 영화의 심정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동시에 홍상수 영화가 탐지해온 여기와 저기, 그리고 너머 어떤 깊이의 세계를 가리킨다는 것도 아마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선택. 이 곳도 저 곳도 싫은 남자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만이 남았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그 다른 어딘가의 세계는 이미 보고도 보지 않은 곳, 보였지만 가지 않았던 곳, 바로 그 너머에 다름 아님을 이야기를 듣던 남국과 남희도, 그를 외면하지 않은 우리도 앎이 아닌 하나의 감각으로서 보게된다. 남자는 결국 화면을 가로질러 바다 안으로 걸어간다. 줌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프레임 너머의, 프레임과 프레임을 질러 가르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점점 더 파도의 일부가 되어 사라져가는 남자, 혹은 성모 아니면 그를 바라보는 또 한 명의 남자. 이는 하나의 소멸, 즉 엔딩 죽음일까. 아니면 다시 일어나는 파도의 생성 곧 시작일까.
다만 확실한 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영화에 할 수 있는 것이란 더 많다는 것이고, 이건 분명 만나지 못했던 프레임 너머에 태동하는 ‘시작', 그런 세계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는 것. 이는 오직 ‘새로움' 안에서 가능하고, 남국은 귀신의 존재에 대해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보면 확실해지잖아’라고 말했다. 비개인 뿌연 하늘에 보이지 않는 무지개가 떠올랐고, 그의 시작을 우리는 결코 볼 수 없지만, 그건 이미 우리가 살아온 오래된 시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