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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재 Mar 26. 2024

[서울의지형도] 목욕탕 없는 설음-안과 밖의 목욕(탕)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378호 기고

Korea Mational University of Arts News

서울의 지형도 Topography of Seoul 정기연재


2 목욕탕 없는 설음 - 안과 밖의 목욕(탕)  


집에서의 목욕은 간단히 몸을 씻는 행위를 넘어 일종의 이벤트와 같다. 우선 욕조를 씻고, 따듯한 물이 욕조를 채울 때까지 기다리면서 목욕하는 동안 볼 책과 작은 간식을 챙긴다. 목욕물 안에서 일정 시간을 보낸 다음 마무리로 몸을 씻어내고 물을 뺀 뒤 뒷정리하는 것까지 여러 단계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렇지만 어렵지 않게 기분 전환을 할 수 있고, 안 하면 또 그만인 일이었기에 큰 부담 없이 종종 집에서 목욕하곤 했다. 굳이 목욕을 위해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아파트에 거주하던 시절에 목욕은 집에서 종종 하는 기분 전환이었고, 목욕탕은 가족들과 함께 가는 연례행사, 혹은 찜질방 전후에 몸을 간단히 씻고 긴장을 푸는 곳이었다.


이런 유년 시절은 도시를 중심으로는 1970년대부터, 도시 외의 지역은 1990년대부터 아파트 키즈로 자라온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억일 거라 짐작한다. 욕조와 세면대, 변기가 한 공간 안에 자리한 배스유닛형 욕실은 지금이야 익 숙한 구조이지만, 화장실과 욕실이 통합된 구조가 위생 공간의 한 유형으로 아파트에 들어온 것은 도심에 아파트 건 설이 본격화되었던 1970년대 이후이다. 이전까지는 실내에 목욕 시설은 물론 화장실도 갖추어지지 않은 주택이 대 부분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들었고, 한정된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 오며 서울을 비롯한 도시에서 부족한 시설과 자원에 의한 문제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빠르게 늘어난 도시 인구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1950-60년대에는 구호성 주택, 정부 차원에서 진행한 공공주택이 많이 건설되었다. 이렇게 급조된 주택은 생활의 최소 조건만을 충족시키는 수준으로 설계되어 화장실은 위생 관련 행위를 간신히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설비만을 갖추고 있었고, 가정에서의 목욕은 몸에 물을 끼얹으며 부분적으로 청결을 유지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 양변기의 보급과 함께 변기와 욕조, 세면대가 한 공간에 자리한 구조의 위생 공간이 한국 주택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화장실과 욕실이 통합되며 배변과 같은 생리 활동뿐 아니라 세면과 세탁 등 위생 관련 행위가 모두 실내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집에서의 목욕이 유년의 기억으로 공유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다. 계절별 악취와 습기의 관리, 온수 보일러의 보급 등의 문제들이 남아있었으며, 목욕 한 번에 드는 수도세와 난방비의 부담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70년대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 안에서 목욕을 하기보다는 대중목욕탕을 이용했다.


목욕탕을 애용해 오지는 않았지만, 본인도 여느 동년배들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공유하는 목욕탕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대중목욕탕은 동네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그곳에 오가는 사람들을 항상 볼 수 있을만큼 일상에 있어 자연스럽고 가까운 공간이다. 한국에 목욕탕이 일상적인 공간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부터였다. 몸을 씻는 행위의 목적이 위생과 결부된 것은 19세기 중후반 서구로부터 들어온 위생 담론에 의해 몸을 씻는 행위의 목적이 위생과 결부되었다. 이에 따라 목욕은 개인 차원의 단정함을 유지하기 위함 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문명의 발달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질병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장려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에 이르러 일본의 식민지 통치술과 효과적으로 결합한다.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는 동안 국가에 의해 적극 확산된 대중목욕탕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전제를 가져오기에 적절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설로 ‘열등한' 민족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 들어온 공간이었던 것이다. 위생 담론은 인간의 생사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피식민 지배 국가에 손쉽게 뿌리내릴 수 있는 논의의자 유효한 전략이었다. 조선에 유입된 초창기 대중목욕탕은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서양인과 일본인을 위해 지은 부대시설로 시작되었으나, 국가 차원에서 목욕탕 건립과 운영을 주도하고 건축, 설비와 관련된 규정을 제시하며 조선에 본격적으로 대중목욕탕이 확산된 시기의 배후에는 이러한 정치적 맥락이 자리했다.


1910년대부터는 서울과 그 외 지역 곳곳에서 목욕탕이 개업 소식을 알리며 각종 신문에 목욕탕과 그 시설을 홍보 하는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초창기 일본인이 개업한 대중목욕탕은 위생의 목적보다는 목욕 자체를 즐기고 접객이 이루어지는 유흥의 공간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1934년 동아일보의 기사 '목욕탕에서'를 보면 목욕탕에 가는 사람을 ‘바람난 사람’으로 묘사하는 대목에서 당시 목욕탕이 실제로 대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이들이 어떤 사회적 인식에 둘러싸여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목욕탕의 입장권 또한 대중에게는 부담이 되는 가격으로 소수 계층을 제외한 사람들이 목욕탕을 편안히 이용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신문 지면에 실리는 광고와 목욕 탕에 대한 언급을 따라가보면 실질적으로 대중public이 대중목욕탕을 이용하기 시작한 시대는 1930년대의 중반을 지나서부터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전후로 목욕탕을 방문할 때 지켜야 할 공중도덕, 목욕을 즐기는 방법, 추천하는 목욕용품,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나타난 차별 등 일상에 더 밀접한 내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목욕탕이 점차 사람들의 일상에 자리를 잡아 감에 따라 비슷하 내용의 기사가 끊임없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시기 말, 각종 신문이 폐간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고 한다.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는 보건과 위생으로서의 목욕, 유흥 차원에서의 목욕 문화가 등장하고, 국가가 진두지휘한 목욕탕 관련 정책들과 함께 목욕탕 문화가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자리하게 된 시기였다.


목욕 행위를 두고 개인의 신체를 넘어 공동체 규모에서의 위생을 논의하기 시작한 1890년대에는 목욕탕이 거의 없었고, 마을의 거리도 청결하게 유지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불과 50년밖에 지나지 않은 1940대 후반에 신문으로 확인되는 시민들의 일상은 비누의 종류를 고르고, 대중목욕탕에서의 공공 예절을 논하는 수준으로 인상적인 변화를 가지고 넘어왔다. 1947년 2월 6일 경향신문에 게재된 '목욕탕 없는 설음'이라는 기사에는 목욕탕 이용과 관련하 여 겪고 있는 불편함을 토로하는 탄원이 서술되어 있다. 필자는 광복 전까지 86곳으로 운영되던 서울 시내의 대중목욕탕이 2년 만에 10곳은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나머지 76곳의 대중목욕탕 마저도 땔감의 부족으로 휴업상태에 돌입하였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싼 요금과 배급 연료의 부족으로 차고 더러운 물로 목욕을 해야하는 현 상황이 문명 생활에 큰 불편을 끼치는 데 대하여 시 당국이 조처하기를 요구한다. 이에 서울시는 대중목욕탕을 시영으로 귀속하여 운영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설립된 위생관리 겸 검열의 공간으로 등장했던 대중목욕탕 시설이 어느새 사람들의 일상 깊숙이 자리를 잡고, 광복 이후로도 정부 차원에서의 진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상 깊다. 대중목욕탕은 단지 선진문물로서 들어온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5-6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한국 사회가 받아들인 하나의 문화가 된 것이다. 대중목욕탕의 역사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발전하여 2000년대 초반까지 전국적으로 그 수가 점차 증가했다.


허나 목욕 자체가 일본을 따라 들어온 서구의 풍습인 것은 아니다. 목욕과 목욕탕 문화는 한국에서 꽤나 일상적이 면서도 특징적인 문화로 긴 시간 동안 역사 속에 자리해왔다. 목욕의 문화, 목욕탕 문화의 기원은 시간을 길게 거슬 러 올라가 삼국시대에서부터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물로 몸을 씻기니 광채가 나고, 입의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 는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의 탄생 설화가 있을 것이며, 치료와 유희를 목적으로 왕이 하사하는 온천욕에 대한 기록, 기우제 전날 심신을 단정히 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했다는 현종의 기록 등이 전해진다. 이 시기의 목욕은 의례적인 의미가 부각된 행위로 신성한 물과 인간이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사유되었다. 한편, 신라에 있는 한 절에 대형 목욕 탕이 있었다는 이야기나, 고려와 조선 시대에서도 계곡과 냇가에서 남녀가 한데 혹은 따로 어울려 목욕했다는 기록도 전해 내려온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물로 몸을 씻어내는 행위가 개인과 집단, 공동체의 작고 큰 규모에서, 각각의 시기마다 다른 의미와 관습을 부여받으며 이어져 왔다. 대중목욕탕은 일본의 식민 통치 시기를 발단으로 한국 사회에 뿌리내렸지만, ‘대중’을 중심으로만 바라보는 목욕 문화의 관점을 조금 비틀어본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다양하게 맥을 이어온 목욕(탕)의 풍습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가져온 방식대로 계승되어온 바가 있다.


어느 순간부터 목욕, 목욕탕을 떠올리는 일이 없어진 듯하다. 욕조가 없는 집으로 이사를 하니 몸을 씻는 일에 목욕 은 구태여 필요한 일이 아니었고 새로운 동네에서 목욕탕을 찾아보지도 않았다. 1990년대 후반 2,000여 곳을 웃 돌던 서울의 목욕탕 수는 2000년대 초까지 성황을 누리다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967곳으로 그 수 가 반절이 되었고, 코로나 시기를 지나오며 250개가량의 목욕탕이 폐업하여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목욕탕은 약 600여개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동네 곳곳에 남아있는 목욕탕 표지판 아래에는 폐업하여 공실이 된 건물만이 남 아있거나, 이미 다른 용도로 사용된 지 오래인 건물 위로 목욕탕 표식이 새겨진 굴뚝만 남아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 이다. 코로나 시기 동안 이 집단 시설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지 어렴풋이 생각해보았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대 중목욕탕의 정착기가 위생 시설로서 시작되었듯, 목욕탕은 도시의 발달과 인구가 밀집되는 환경에 필연적으로 따 라오게 되는 문제인 청결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첫 목적이 되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목욕탕은 개인의 위생을 넘 어 사회의 취약계층의 생활을 보조하는 사회의 필수 시설이기도 하다. 모두가 공공시설의 사용을 꺼리던 코로나 시기에도 누군가에게는 건강과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헌데 우리는 왜 지금 서울에 남아있는 목욕탕 수, 600여 개라는 숫자를 향해 도착한 것일까? 목욕탕이 일상적 감각에서 멀어지는 만큼 지표 또한 목욕탕 시대의 종식을 가리키고 있다. 빠르게 사라지는 목욕탕에 갈 곳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 목욕탕 없는 설음은 여전히 지속된다. 미진한 목욕탕 설비에 불평을 토로하던 1940년대의 서러움이 오늘의 것과 같지는 않겠지만, 기술의 안정이 설음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는다. 목욕탕이 사라지고, 목욕 행위 자체가 희미해져가는 일상은 지금의 실내에서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여유의 정도이기도 할테다.


1고 2024.03.25

1.5고 2024.03.26


http://news.karts.ac.kr/?p=1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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