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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맛없는 쌀 냉도(冷稻)밥을 지으며 드는 생각들

뜬금없지만 인디카 토종쌀

<제공:우보농장 이예호>

이름이 차가운 벼, 냉도란다. 이름부터가 그렇게 맛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이름만 가지곤 모르는 거지. 밥은 지어봐야 안다.


뭐가 좀 혼란스럽다. 북한, 평안남도와 황해도에서 주로 키우던 벼인데 만생종이란다. 위도와 조중만생종이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뭔가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것도 사실. 외모와 맛이 인디카 같다는 평도 만생종과는 모순되는 감각이다. 인디카도 히말라야 근처에도 자라는 것도 있다긴 하지만  역시 인도나 동남아 같은, 우리나라보다 더 고온다습한 곳의 품종이라는 것이 상식이긴 하다.



쌀알이 좀 갸름하긴 하다. 현미를 받아 백미로 도정해서 실험하던 시절. 우보농장 스타일로 6분도 정도 도정을 해보았다. 쌀알은 이 정도 도정으로는 많이 깨지지 않고 잘 버틴 편(상대적으로).



물을 조금 적게 잡았다. 라벨의 인디카 운운하는 일종의 경고를 거의 무시한 내 취향의 밥짓기. 돌이켜보면 밥물을 좀 넉넉히 잡았어야 했다. 적어도 한국인의 취향에서는.


밥알을 봐도 어딘가 좀 껑충하고 푸석하다. 맛을 봐도 그렇다. 토종쌀밥은 내가 어지간히 못 지어도 다들 일반미보다 맛있는 밥이 나왔는데 이건 정말 맛이 없는 밥이다.


물조절을 했으면 식감은 약간 보강이 되었겠으나 이 푸석함을 다 가릴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토종쌀 특유의 향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속으로 돌려서 다시 밥을 지어봤지만 한국인의 기준으로 '맛있는 밥'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쌀 자체가 맛없는 탓도 있겠지만 특성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결과물도 영 불만족인 오늘의 밥짓기는 45점. 역대 최하 수준이다.


밥을 못 지으니 학구열은 더욱 불탄다.


국립유전자원연구소 씨앗은행의 자료를 보면 냉도는 세 가지 항목으로 입력되어 있다. 세 번에 걸쳐서 수집되었다. 안타깝게도 수집장소는 기록되어있지 않은데, 이것은 아마도 다른 기관에서 이 기록이 없는 체로 이관받은 탓이 아닌가 한다.


세 가지 기록이 쌀 특징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이 제각각이다. 간장(키)은 대체로 큰 편이지만 최저는 80센티, 최고는 130센티까지 다양하고 심백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천립중도 21g(상당히 가벼운 편)에서 29.3g(매우 우량한 편)까지 편차가 크다. 참고로 고시히카리의 천립중은 23g.


결정적으로 세 기록 중 둘은 이 냉도를 인디카, 하나는 자포니카로 기록하고 있다. 인디카 기록에선 출수기도 빠르고 천립중도 높은 다수성 인디카의 특징이 나타나고 자포니카 기록에선 만생종에 찰기가 비교적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단, 간장의 길이는 자포니카 기록에서도 상당히 길게 나타난다.  간장의 길이가 80센티로 나오는 해는 1980년으로 냉해로 유명해서 인디카 계통의 형질이 많은 통일벼가 폭망한 해이기도 하니 이것은 아웃라이어 기록으로 본다면 대체로 키는 큰 편이 맞는 것 같다.


여러가지 일관성 없는 자료들을 읽다보면 벼라는 식물의 생존전략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느껴진다. 벼는 자가수분을 하는 식물이라 다른 종들을 여럿 심어두어도 변종이 좀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환경의 변화에는 어떻게 적응하는가? 아마도 개체의 적응력이 매우 유연해서, 날씨나 일조량이나 영양공급 등에 따라 다양한 형질을 꽃피우는 것은 아닐까 싶다.


냉도의 주산지들은 북한지역이지만 다들 유명한 충적평야지대라 굳이 이렇게 맛없는 쌀을 지어야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고, 아마 이 냉도가 낯선 땅에 와서 고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쌀이 인디카 특성이 발현될 때는 맛은 없어도 수확량이 많고 걷이가 빨라서 농부들 입장에선 일기가 불순할 경우(추위가 빨리 온다던가) 수확량을 보장해주는  고마운 벼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부들의 입장에서도 이런 벼를 일정량 재배하는 것이 생존전략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식물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맛없는 쌀 냉도.


밀양의 감물리에서는 올해 냉도를 일정량 재배한다. 밀양에서 나오는 냉도는 맛이 좀 나은가 물었더니 여기서도 밥맛은 별로란다. 그런데도 짓는 이유를 물으니 별 대답 없이 베시시 미소가 돌아온다. 뭔가는 매력이 있는 쌀이기 때문이리라.


가을에는 그 냉도를 받아 좀 더 나은 밥짓기에 도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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