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코코, 최선을 다한 보여주기
내 생각에 로코코의 정신은 한마디로 ‘보여주기 위한 우아함’이다.
‘보여주기 위함’이라니 가식과 위선의 베르사이유 궁정생활이 떠오를 수도 있겠다.
바로 그렇다.
로코코가 농부나 광부들의 문화는 절대 아니다. 로코코 스타일을 위해서는 돈도 많이 들고 기술도 필요하다. 모든 스타일이 그렇듯이 노력해서 갈고닦는 과정도 필요하다. 부유하고 강력한 절대군주의 궁정 안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문화다. 사치나 허식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군주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공격하는 지점도 바로 그것이다. 민중의 고혈을 쥐어짜서 그들만의 화려한 무도회를 벌인다는 말은 어쩌면 정확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들 보여주기 위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나?
그것을 온힘을 다해서 극한으로 아름답게 끌어올린다는 마음이 바로 로코코의 정신이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는다. 그건 왕후장상도, 하층의 농민이나 노동자도, 고상한 성직자들도, 엄청난 부자도 마찬가지다. 각양각색의 어려움은 누구나 겪는 일이고, 남이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당장의 끼니가 걱정이고, 호의호식 하는 사람들은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이 생각하지만 그건 '배고픔'이라는 자신만의 욕구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왕들만 해도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하고, 걷히지 않는 세금에 빚은 늘어가는데, 왕국의 후사를 이을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의회는 이것저것 딴죽을 건다는 둥의 수많은 고민이 있는 것이다.
당장 굶어죽을 사람과는 고민의 무게가 비교가 안 된다고? 글쎄. 수백만명의 운명을 짊어진 왕이라는 자리가 굶어죽을 고민이 없다고 해서 고민이 적은 자리라고는 나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긴, 그래서 '배부른 고민'이란 말도 있는 거겠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욕망과 고민의 필터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인생이란 공평한 것이라 생각한다. 진정한 공감? 나는 그런 것 믿지 않는다. 겪어보지도 않은 일에 진정한 공감이라니. 내 경험상 그런 공감팔이 하는 인간들은 대개 자기 꿍꿍이가 있는 법이더라.
그러니까 문제가 무엇이든 자기 것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이 어른의 인생이다. 힘이 들건 괴롭건 그런 것은 내색하지 않는다. 약한 모습 보여봤자 남에게 공격당하고 이용당할 빌미나 제공하는 것이다. 언제나 약한 것을 먼저 공격하는 것은 사자도, 강력한 군주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시기 질투와 모략을 빼면 마른생선 같이 되버릴 궁정에서야 말해 무엇할까.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던지 어디까지나 의연하고 상냥한 태도를 유지하고, 무엇이든 ‘스타일리시’하게 해내 보여주는 것이 로코코의 정신이다. 그것은 생존의 기본이다. 그리고 생존선을 엄어서면 그것은 상승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것이 로코코 궁정의 게임의 법칙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성취하는 것이 로코코 문화의 사람들의 지향, 로코코의 마음이다. 마담 드 뽕빠두르는, 인정하긴 싫지만 이 로코코의 화신과 같은 사람이다. 미모로나 스타일로나, 그리고 바로 그 로코코의 태도로나 말이다.
이것은 또한 나 오귀스뜨 뻬뺑의 요리가 지향하는 방향,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단지 프랑스 로코코 스타일을 이곳에 재현해내는 것뿐 아니라, 이 나라의 토양과 이 사람들의 문화와 접촉해서 새로운 영국식의 로코코가 피어나게 하는 것이 왕세자 저하께서 내게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시는 이유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나 자신이 나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것을 삶의 강력한 원동력으로 삼는 로코코의 궁정인인 것이다.
요리사가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이후로 사라진 사고방식이다. 로마 시대 이래로 요리사는 노예나 하인이 하는 일로 생각되어왔다. 하지만 새로운 요리를 창조해내는 이 기쁨은 글이나 음악이나 그림, 건축 등을 창작하는 것과 똑같이, 가히 예술적인 희열인 것이다.
이런 희열을 이해해주는 후원자와 함께 일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이다. 이곳 왕세자의 궁정에서 나는 적당히 건전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일하고 있다. 일생 이렇게 생산성 좋게 요리들을 창작해낸 적은 없었다. 프랑스에서 쫓겨나 영국에 온 것이 요리사로서는 최고의 행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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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정식 식사도 아닌 ‘티타임’이란 궁중의 기준으로는 작은 규모의 연회다. 그래도 소홀히 할 것은 하나도 없다. 긴장하기는 국왕의 대관식이나 결혼식 같은 거국적 행사나, 이렇게 작은 규모의 티타임이나, 마담 뽕빠두르 살롱의 술자리나 다 비슷하다.
부주방장 마이클에게 일러두기는 했지만 내 눈으로 더블체크를 하는 것은 필수다. 결국 책임은 주방장인 내가 지는 것이니까.
잠시 짬을 내서 주방을 휙 둘러보고 모든 것이 지시대로 이행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몇 달동안 손발을 맞추니 이제 주방이 손발이 맞아들어가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주방의 완성은 식재료나 기구가 아니라 팀워크가 잘 맞고 헌신적인 스태프들인 것이다.
나는 다시 화덕 앞으로 다가간다. 오늘의 디저트, 로코코의 사과가 적절히 익어가고 있다. 이제 불에서 꺼내 설탕장식을 할 때가 거의 되었다. 이 미묘한 타이밍을 잡는 것이 어렵다. 화덕을 자꾸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후각에 최대한 신경을 집중해서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절대로, 작은 부분이라도 타서는 안 된다. 브라운버터와 향신료가 어우러진 풍미를 탄내로 가릴 수는 없는 일이지...하고 생각하는 참인데 빠올로가 갑자기 헐레벌떡 뛰어와 부른다.
“셰프님, 저기요··· 저 귀좀···”
파올로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올 때 같이 데려온 조수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이탈리아어도, 프랑스어도 잘 한다. 말재주가 있는지 영어도 금방 배워서 급할 때는 영국인 스태프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잘 전달해주기도 한다. 눈썰미가 좋고 손이 빠른 녀석이라 앞으로 요리사로서 잘 될 전망이 보인다. 망명에 준하는 영국행, 급여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믿고 따라와준 고마운 사람들 중 하나기도 하다.
이 로코코의 사과에 웨일즈 왕자의 문장을 응용한 설탕장식을 할 사람도 바로 파올로다. 기술은 내가 가르쳤지만 젊고 섬세한 파올로가 나보다 나은 분야다. 그런데 이 녀석, 갑자기 달려와서 귀를 빌리잔다.
“뭐냐? 주방에서 뛰지 말라고 했잖아, 파올로.”
어차피 설탕장식은 파올로가 할 참이라 잠시 시간은 있다. 하지만 감각을 초집중시켜 몰두하던 것이 방해받은 탓에 목소리가 살갑지는 않게 나왔다.
“저 깔레(Calais)에서 온 사람이라고 셰프님을 급히 뵈어야 한다는데요···”
연회 중간에 누군가 나를 보자고 한다고? 보통은 전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셰프가 연회 준비 중에 주방을 떠나다니. 더구나 오늘은 로코코의 사과가 처음 데뷔하는 날이지 않나. 하지만 파올로의 가쁜 숨소리와 더불어 깔레라는 지명이 내 귀에는 천둥같이 울렸다.
“셰프님, 정말 급한 일이라고 꼭 오셔야 한다네요.”
프랑스에 두고 온 가족이 생각난다. 아내 마리와 아들 삐에르. 프레데릭공이 가족도 데려오게 해준다고 약속을 했지만 겨울의 항해는 위험이 많아서 항해에 적합한 봄이 되기까진 기다리자고 했다. 그래서 영국에 오기 가장 편한 장소인 깔레의 지인에게 가족을 맡겨두었다. 늦은 봄이 되어 바다가 잔잔해질 때까지는 깔레에 있는 것이 여러모로 더 안전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뭔진 몰라도 깔레에서 급한 일로 사람이 왔다니, 지금 당장 나를 만나야 한다니 신경이 곤두서는 것 이상이다.
내가 프레데릭 왕세자의 궁정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요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이제쯤은 유럽의 어느 궁정에나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마담 드 뽕빠두르로서는 결코 기대했던 결과도, 인정하고 싶은 결과도 아닐 것이다. 프랑스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그녀는 국왕과도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정보력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든 가족들의 소재를 알았다면 해를 끼치지 말란 법이 없다. 아니, 그러고도 남을 독살스런 여자다. 이런 생각이 드니 요리고 뭐고 당장 가족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손발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알았다. 파올로, 디저트는 내가 와서 직접 내갈 테니까 일단 프티푸르에서 꺼내서 적당한 때에 문양 장식을
하고 기다리도록 해. 살레에게는 아르마냑을 먼저 내가라고 하고.”
대충 지시를 내리고는 급히 뒷문으로 나왔다. 무슨 급한 일인지 몰라도 5분 이상 지체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사람이 기다린다는, 식자재가 드나드는 팬트리(Pantry) 쪽으로 헐레벌떡 향했다.
왕세자 관저인 레스터하우스에서도 주방 뒷편의 이곳은 공급자와 고용인들만 드나드는 곳으로 외부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으슥한 곳이다. 이 통로의 존재조차도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는 곳이다. 게다가 정문부터 여기까지 도처에 근위병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외부인이 임의로 출입하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하다. 도대체 누가 여기까지 휙 들어와서 나를 찾는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상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더 확실해졌다. 마담 드 뽕빠두르가 아니면 누가 있겠나.. 하고 생각하며 팬트리의 모퉁이를 돈 순간, 갑자기 퍽 소리와 함께 뒷통수가 묵지근하다.
거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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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내가 파리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은 내용이다. 핸드폰의 웹불어사전에는 고어 번역 기능까지도 있어서 간신히 읽어낼 수 있었지만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집중했다. 저녁도 안 먹었는데 벌써 피곤해 눕고싶을 정도다.
대체 이 사람, 뻬뺑 셰프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책의 내용은 이제부터 찬찬히 들여다볼 생각이다. 중간중간 나오는 레시피도 재현해 보면서 말이다.
우선은 ‘로코코의 사과’로 시작해 볼까. 음, 우선 사과를 구해야겠군. 당연히 브르따뉴 사과로 말이지. 사과식초도 같이 주문해야겠고. 향신료도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이 있고. 후추, 정향, 계피는 집에 있지만 나도 나름대로 배합을 만들어봐야겠네. 코리앤더하고 겨자씨에, 음 메이스라면 조화가 좋을 것 같은데 아마 집에는 없지 싶고.
그나저나 생각하면 정말 긴 하루였다. 주중의 스트레스를 풀러 나간 것뿐이었는데, 믿기지 않을만큼 아름다운 소녀와, 수수께끼의 책과, 그리고 그 책 속의 엄청난 이야기들. 한나절의 가까운 나들이를 했을 뿐인데 마치 수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여행이라도 한 것 같았다. 게다가 책은 아직 십분의 일 정도밖에 못 읽었다는 것이다.
파리의 집으로 돌아오니 정말 배달음식 시켜먹기도 귀찮을 만큼 피곤했다. 대충 씻고 침대에 무너져 내린 후에는 핸드폰을 들고 손가락 운동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
나의 하루는 그렇게 핸드폰쇼핑으로 마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