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세인트주드호에서

원치도 않던 대서양 횡단여행

로코코의 사과 표지.jpg

흔들린다. 뒷골이 띵하다. 본능적으로 손이 뒷머리로 향하는데 닿지를 않는다.

손발에 쇠사슬이 묶여 있다. 어둑하고 습한 여기는 무슨 감옥인가?


주변을 살펴보니 커다란 나무통이 여기저기 쌓여있다. 어두운 가운데서도 위로 통하는 계단 통로를 통해서 햇빛이 들어오고 있고, 그 틈으로 짜고 비린 냄새가 같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이제 보니 이 흔들림은 어지러움이 아니라 파도의 흔들림이다. 바다다.


여긴 배의 선창이구나. 규모가 상당한 배다. 어둠 속에서 양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 통들은··· 음, 절인 고기, 맥주와 와인, 화약통도 있구나. 와인통보다 맥주통이 훨씬 많은 것으로 봐서 이 배는 영국이나 네덜란드 배일 것이다.


아니, 영국 배겠지. 요즘 시국에 네덜란드 배가 영국 항구에 들어올 일은 거의 없으니. 프랑스가 강할 때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맹해서 맞섰지만 사실 두 나라는 엄청난 앙숙이다. 정식 선전포고는 안 했어도 세계의 어디선가는 영국과 네덜란드 해군이 싸우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나로서는 영국 배든 네덜란드 배든 어느나라 배든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여기 묶여서 이렇게 처박혀 있다는 것이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거지. 게다가 이 배, 엄청난 크기다. 이 정도 크기에, 이런 보급품이라면 연안의 단기항해가 아니라, 최소한 몇 주 정도 항해의 준비다.


젠장, 도대체 이 배에 묶여서 어디까지 가게 되는 거란 말인가?


욱신거리는 뒷통수가 맥박을 타고 지끈지끈 울린다. 그 동통의 리듬에 맞춰 생각이 거꾸로 흘러간다.


왕세자 전하의 늦은 밤 연회를 위한 준비였지. 조수인 파올로 녀석이 누군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한창 연회 준비를 하다가 헐레벌떡 뛰어갔었고. 깔레에서 사람이 왔다니 하도 급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새도 없었네. 인상착의나 말투 같은 것이라도 파올로한테 물어보았으면 좋으련만, 마음이 하도 급해서 말이다.


그래, 팬트리 입구로 들어가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갑자기 정신을 잃었었지. 뒷통수를 뭔가로 맞은 것 같다. 그러고도 아마 마취약 같은 것으로 사람을 재웠던 모양이다.


이정도 크기의 어딘가 멀리 가는 배라면··· 브리스톨에서 떠났기가 쉽다. 아니면 리버풀이겠지. 런던으로는 이런 정도 크기의 배가 들어오지 못하니까.


왕세자 저하의 관저는 런던 서쪽 중심 웨스터민스터에 가까운 레스터 하우스다. 거기에서 브리스톨이나 리버풀의 항구에 이르기까지는 코치(마차)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3일 정도 걸린다. 물론 시체 같은 사람 몸뚱이를 싣고 상업용 코치를 이용할 수는 없을 테니 알아서 마차를 수배했겠지. 급하면 밤새 말을 바꿔서 달린다고 하면 이틀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이틀 정도를 꼬박 취해 있었다면... 그 동안은 뭔가 약물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아직도 메스꺼운 약냄새가 느껴진다.


내가 무슨 왕이나 귀족도 아닌데 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납치한 것일까? 짐작이 가는 사람은 있긴 하지만, 설마 나 같은 것을 위해서 이렇게나 비용이 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차라리 죽여버리는 것이 더 간단했을 것인데.


아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고싶었던 것일까? 깔레에 남겨두고 온 가족들도 걱정이 되지만 일단은 내가 살아야 다시 만날 날도 온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다져먹었다.


어차피 나에게 인생은 한 장 한 장 아수라장을 딛고 살아온 것이니까, 이것도 딛고 일어날 아수라장이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구나 하고 생각하니 일단은 마음도 편해졌다. 그리고 배도 고파왔다. 아니 이제야 배고픔을 느낀다.


젠장, 2~3일은 그냥 굶었단 말야?


“이봐요, 누구 없소?”


먹을 것을 향한 강렬한 욕망과 대상은 뚜렷하지 않아도 정당한 분노로 충만한 목소리는 선창을 쩌렁하게 울렸다. 갑판에서 누군가가 내려왔다.


“깨어났군..”


덩치가 거대한 그림자가 선창으로 저벅저벅 걸어내려왔다. 해를 등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즈만으로도 위협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안 그래도 언제까지 처자나 했다. 일어나. 선장님이 너 깨어나기를 출항하는 날 순풍 바라듯이 기다리셨다.”


말과 동시에 내 허벅지(결코 가늘지 않다)만한 팔뚝이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고양이라도 한마리 들듯이 가볍게 들어올려진 나. 다시말하지만 나도 결코 체구가 작은 편이 아닌데 말이다. 귀빈 대접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 끌어올리는 데에는 화가 났다.


하지만 배고픔, 목마름과 동시에 화장실에 가고싶다는 특이한 사정이 급하게 발생했다. 생각해보니 2~3일이나 화장실도 안 갔다는 것 아닌가. 어찌보면 배고프고 목마른 것보다 급한 일인데, 멱살을 잡히고야 그런 생각이 든 건 왠 일인가. 하긴, 이런 상황에서 '지린다'고 하긴 하지. 여하튼 3일이나 화장실을 못 갔다는 거니까 급하게, 조금은 사정조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사나이란 목소리가 큰 것보다는 상황 파악이 정확하고 빨라야 하는 거다.


“일단 화장실부터 좀 가게 해주시오. 선장님 앞에서 오줌을 싸서는 곤란한 일 아니오?”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더니 화장실로 나를 안내했다. 젠장 흔들리는 배의 화장실에서 두손두발 묶인 채로 일을 보려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주저앉을 뻔한 위기를 몇 번 넘기고 어쨌거나 무사히 일을 치렀다.


“고맙수다. 엄청나게.”


퉁명스럽게 말한 것은 사내가 나를 거칠게 대한 탓이지만 진심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어쨌든 나의 갈급한 욕구를 해결해준 것도 사실이니까.


볼일을 마치고 밝은 데서 보니 덩치만 산만한 것이 아니라 팔뚝이며 뺨에 칼자국 흉터가 있고 풀어헤친 가슴팍에는 해골문신도 있다. 말투 곱게 하기를 잘했다 싶은 인상이다.

사내는 뜻밖이라는 듯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달라졌다.


“뭐 당연한 것을. 빨리 가자. 선장님이 기다리고 계시니까.”


뱃사람들이란 그저 거칠고 사납다고 알고 있지만 다들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사내는 이번엔 내 뒷덜미를 잡아 들었다.


“손발이 묶여서 움직이기 거북할 테니 도와주는 거다.”


뒷덜미를 잡혀서 양순해진 고양이처럼, 나는 고맙단 말도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들려서 갑판으로 올라왔다. 뱃사람이란 그저 거칠고 사나운 것만은 아니고 이렇게 상냥한 사람도···. 있는 거겠지?



선장은 이물(배 뒷편) 쪽의 선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뻬뺑씨. 세인트 주드(Saint Jude)호의 선장 잭 콜드웰(Jack Coldwell)입니다.”


콜드웰 선장은 은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60은 충분히 되어보이는 나이지만 등을 곧게 펴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친절한 눈빛으로 내 눈을 응시하며 손을 내밀어 왔다. 나도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려 했지만 손발이 다 쇠고랑을 찬 상태라 어색하게 두 손이 내밀어질 뿐이다.


쯪. 이게 무슨 꼴인가.


“아, 이런 실례를. 해먼드(Hammond)! 묶인 걸 풀어드리고 모셔왔어야지.”

“아, 네. 혹시 위험한 짓을 할 지 몰라서···”


거대한 덩치의 사나이의 이름이 해먼드구나. 해먼드는 덩치로 봐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열쇠를 가져와 내 팔다리를 풀었다. 나는 비로소 가슴을 펴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할 수 있었다. 로코코의 궁정인으로서 스타일이 뭉게지는 것만은 참을 수 없는 일인데 다행이었다.


“요리사 오귀스뜨 뻬뺑입니다.”

“반갑습니다 뻬뺑씨. 뻬뺑씨가 어떤 분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거두절미하고 이 배에서 요리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동안 이 배의 주방장이 되어주신다면 선창에서 딱딱해진 빵을 씹으며 쥐들과 지내는 생활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급료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면에서 약간은 협박 같이도 들리긴 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고맙게 받아드릴수 밖에. 거절하면 아마도 다시 손발이 묶여서 선창행이겠지. 노예같이 선창에 처박혀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누군가의 랜덤한 호의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과 비교하면 이렇게 큰 배의 주방장이라는 것은 거의 천국과 지옥 아니겠나. 물론 왕궁 주방에야 비교할수 없겠지만.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투와 표정에 베르사이유 궁정의 세련됨을 최대한 갖추어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실은 말투와 표정만은 처음 선장을 마주한 순간부터 그랬다. 쇠사슬에 손발이 묶인 채로 궁정인의 에티켓이라니, 어딘가 코미디 같았겠지만.


“궁금한 것도 많고 불안한 마음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런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겁니다. 나는 지금은 일이 좀 바빠서 실례하겠소. 오늘은 파도가 세서 변침할 때 신경이 좀 쓰이는 날이구려. 해먼드, 갤리(배의 주방구역)로 뻬뺑씨를 안내해드리게.”

“아, 선장님. 잠깐만요. 이 배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것만이라도 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배는 대서양 무역선이요. 여기저기 기항해서 아메리카의 버지니아 식민지로 갔다가 다시 여기저기 들려서 브리스톨로 돌아오는 항해를 합니다. 돌아오는 길은 베뺑씨와 함께 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자, 그럼 이만 실례···”


선장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리드미컬한 걸음걸이로 선교를 내려가서 갑판으로 향했다.


‘버지니아···라고? 아메리카? 맙소사. 아니 왜 내가 파리와 런던의 궁정에서 그런 촌구석 벽지로 가야하는데? 아니 왜 사람을 곱게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먼 곳으로 버리러 가는 건데? 도대체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고?’


버지니아라는 지명 하나에 세상 의문과 불만이 다 머릿속에 펼쳐졌다.


“뻬뺑씨 가시죠. 갤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선장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더니 해먼드는 이제 존대를 하기 시작한다. 뭐든지 순식간에 뒤죽박죽으로 돌아가는 인생이구나. 나는 거의 멍한 상태로 해먼드를 따랐다.


그나저나 이 배, 정말 크기도 하구나.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간다니, 당연히 큰 배여야겠지. 아, 정말 그렇게 먼 곳으로 간다니. 그러면 사랑하는 마리와 삐에르는? 레스터 하우스의 스태프들은? 프레데릭 왕세자 저하는?


멍하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막막함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마음을 가눈다고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주어보았다. 그 순간 큰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나는 볼썽 사납게 갑판 위를 굴러 좌현의 끝까지 굴러서 처박혔다.


순간 참았다고 생각한 눈물이 터져서 아이같이 엉엉 울어버렸다. 선원들은 뭔가 좋은 구경거리가 났다고 몰려들어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폭소를 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게 이 배의 주방장으로서 데뷔라니. 나는 에티켓에 살고죽는 궁정인이란 말이다.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눈가를 훔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으나 때마침 반쯤 일어나던 나는 다시 배를 강타한 파도에 기우뚱한 뱃전에서 다시 볼썽사납게 뱃전에 처박혔다. 이제 체면이고 에티켓이고 뭐고, 에라 모르겠다 싶다. 서럽고 서러워서 아예 대성통곡을 해버렸다.


슬플 땐 울 줄 아는 것도 사나이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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