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퀴즈 내기 할까?”
피렌체에서였다. 뚜벅이 셋이 비를 맞으며 길을 걷는다. 아이가 지루했던지 돌아가면서 퀴즈를 내자고 한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성당 등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문제를 내는 건데 퀴즈를 내고 맞추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간다. 작년에 제주도 한라산을 오를 때 아이랑 ‘포켓몬스터 퀴즈내기’를 했는데, 이젠 르네상스에 대한 퀴즈를 내고 있다니. 너도 나도 수준이 좀 올랐구나.
“나와 친구들은 피렌체의 3대 천재 화가라고 불렸습니다. 나는 조각가였는데 그림을 잘 그려서 인기가 많았고, 내 친구는 화가이자 해부학자, 의학자 등 못하는 일이 없었지요. 마지막 친구는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후대 화가들이 이 친구를 따라가려다 쫓지 못해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고 해요. 나와 친구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아이가 낸 질문의 답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다.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유모 손에서 자랐는데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어느 날 미켈란젤로가 굴러다니는 돌(대리석)을 주워 노인의 얼굴을 새기고 있었다. 이때 한 귀족이 지나가다가 그가 만든 조각상을 보고 ‘보시오. 노인 치고는 주름도 없고 너무 젊은 거 아니오?’라고 한 마디 했다고 한다. 요즘 젊은 친구라면 그냥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 했겠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말에 기분이 상했고 잠도 거르고 노인의 얼굴과 목에 주름을 새겨넣었다. 주름 뿐 아니라 빠진 이도 표현했다. 다음 날 귀족이 다시 찾아와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고 후원을 결심한다. 이 귀족이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리는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은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세 나라에서 모두 만날 수 있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마리아>와 <모나리자>를 봤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도 <암굴의 성모마리아>(선생님께 듣기로, 루브르에 있는 작품이 다 빈치가 직접 그린 것이고, 내셔널에 있는 것은 제자들이 그렸다고 한다)를 봤고, 피렌체 우피치에서 다 빈치의 <수태고지>를, 바티칸에서는 <제롬과 사자>를 볼 수 있었다. 제롬(성인 예로니모)은 성경을 기록하고 번역하는 역할을 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손에 양피지와 펜을 쥐고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아껴 기록하던 빼짝 말라빠진 그의 곁을 늘 사자가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루브르 소장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직접 그렸고, 내셔널갤러리 소장품은 제자들이 그렸다고 한다. 그림의 구도는 동일하지만 디테일에 차이가 크다. 원작에서는 모나리자의 머리 위에 성인(聖人)을 뜻하는 골드링이 없지만 후작에선 그려졌다. 또 원작에선 마리아 옆에 있는 엘리사벳이 아기 예수를 향해 손가락질(저 아기가 예수에요)을 하고 있지만 후작에선 손짓하는 모션이 사라졌다. 그림의 전반적인 톤이 밝아졌고, 후작에는 아기 예수 아래 수선화꽃이 그려졌다.
다 빈치 작품들의 특이한 공통점은 완성된 작품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다 빈치의 작품은 모두 미완성 상태다. 글로 치자면 마침표가 단 한 번도 찍히지 않은 문장들의 나열과도 같달까. 그런데 그 문장이 하나 같이 새롭고 아름답고 구조적이었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바티칸 박물관과 우피치에서 감상할 수 있었는데, 그의 그림은 선이 부드럽고 색감이 따뜻하고 화사했다. 우피치에 라파엘로가 그린 <엄마와 아들> 그림이 있다. 그림 속 엄마는 성모마리아, 아들은 아기 예수다. 그림 속 아기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엄마의 발을 밟고 서 있다. 예수가 웃었고, 여느 아기처럼 엄마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 엄마와 아들 사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520년 라파엘로가 죽은 뒤 화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한다. 라파엘로를 답습하는 화가들, 또는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과거의 화풍을 다시 쫓는 화가들. 이렇게 우리는 ‘매너리즘’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배웠다.
기존의 종교화는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라파엘로는 그 틀을 깨부쉈다. 예수를 엄마의 발을 밟고 선 천진난만한 아기로, 성모마리아를 인자한 표정의 엄마로 표현했다.
“나는 프랑스의 항구 도시 옹플뢰르에서 태어났어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새엄마랑 같이 살았는데, 새엄마가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줬어요. 나는 피아노가 좋아서 작곡을 했는데 19세기 사람들에겐 내 노래가 별로였는지 평이 좋지 않았어요. 훗날 현대인들에게 내 노래가 아주 널리 사랑받았는데요, 사랑받은 노래 제목은 ‘짐 노페디’에요. 나는 누구일까요?”
이 문제들은 파리에서 당일치기 몽생미셸 수도원 투어를 떠난 날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던 문제다. 파리에서 몽생미셸까지 왕복 8시간 거리. 그 사이에 에트르타와 옹플뢰르를 들려 이 이야기를 들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고 가랑비가 내리는 에트르타에서 에릭 사티의 ‘짐 노페디’를 들었는데, 내 마음에도 안개가 깔리는 듯 묵직하고 평온해졌다. 에릭 사티가 어떤 가정 환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음악을 어떻게 접하게 됐는지,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훗날 에릭 사티는 파리로 이사를 갔고 몽마르뜨에 살면서 물랑루즈의 음악 감독이 됐다.
“나는 에트르타 코끼리 바위를 정말 사랑했어요. 새벽 무렵의 코끼리 바위, 노을질 무렵의 코끼리 바위, 코끼리 바위에서 수영하는 사람들 등 코끼리 바위를 바라보며 다양한 그림을 그렸죠. 사람들이 나에게 ‘빛의 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어요. 나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빛, 색감을 표현하려고 했어요. 오랜 시간 지베르니 정원에서 연못을 그리며 아주 큰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요. 그 그림은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어요. 나는 누구일까요?”
클로드 모네는 대표적 ‘인상파’ 화가다. 빛의 마술사라고도 불렸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연작으로 만들어내는 호흡을 가지고 있었다. 오랑주리에 있는 수련 연작이라던지, 워털루 다리 연작, 건초더미 연작 등 다양한 연작을 만들어냈다. 에트르타의 코끼리 바위도 그렇다. 어떤 날은 새벽녘의 코끼리 바위를, 어떤 날은 해질 무렵의 코끼리 바위를 그렸다. 비가 오는 날의 코끼리 바위도 있었고, 한 여름 바캉스를 즐기며 바다 위에 사람들이 둥둥 떠있는 그림 속에도 코끼리 바위가 있었다.
“루브르와 영국박물관에 있는 스핑크스와 파라오들을 보면 누가 코를 다 잘라 갔어요. 코를 잘라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문제는 루브르 가이드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 나는 제주도의 돌하르방을 생각하고는 “아들 낳게 해달라고?”라고 답했다가 웃음을 샀다. 당시 서양엔 남아선호사상이 없었을까. 여튼 코를 잘라간 이유는 ‘부활’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윤회를 믿었고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한쪽 콧구멍으로 나갔다가 다른쪽 콧구멍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다. 이를 본 프랑스인들은 스핑크스와 파라오 석상의 코를 잘라버림으로써 다시는 영혼이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이집트식 토테미즘적 사고가 프랑스인들에게도 전이된 것인지, 아니면 프랑스인들도 이미 어느 정도 부활과 윤회에 대해 믿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퀴즈를 만드는 것은 배웠던 내용을 한번 더 생각하고, 입으로 내뱉으면서 지식의 수명을 연장해준다. 여행기간 꽤 많은 가이드 선생님을 만났고, 단기간 소화하기 어려운 지식들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우리는 하루 평균 3만보 씩 걸었는데, 걸을 때 대부분 퀴즈내기 놀이를 했다. 퀴즈를 내며 우리가 걸어온 시간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는 것, 꽤 즐거운 여행 기록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