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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red Dec 24. 2024

퇴사를 했어도, 나는 나

명함이 없는 첫 번째 삶

"언니, 그만두면 안 되는데 다 내려놓고 싶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드릴게요. 정신 차리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사연자분한테 좀 물어보려고. 뭐, 내려놓을 거나 있으세요? 쌓아 올린 건 있으시고?"



이렇게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게 처음이라 남들은 뭘 하고 사나 궁금했다. 퇴사, 프리랜서, 프리랜서 브이로그, 1인 사업가 등을 시작으로 독서, 기록 등으로 검색이 이어졌고 시기가 시기인지라 다이어리, 플래너도 검색하게 됐다. 그랬더니 온통 내 피드 위 광고와 돋보기와 쇼츠와 릴스에는 다 갓생을 사는 사람들뿐이다. 이게 다 알고리즘 때문이다.


다들 잘 살고 있는 건가. 잘 살고 있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건가. 아니면 잘 살기 위해 그저 노력하고 있을 뿐인 건가.


그러다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인플루언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려놓고 싶다는 사연자의 말에 팩폭을 날리는 영상이었다.


"사연자분한테 좀 물어보려고. 뭐, 내려놓을 거나 있으세요? 쌓아 올린 건 있으시고?"


나는? 내려놓을 게 있나? 아니 쌓아 올린 건 뭐가 있을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팩폭에 온갖 뼈마디가 시렸다.


언젠가 상담 중에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나의 말에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이전의 삶이란 어떤 건가요?"


어라? 그러게? 뭐지? 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음... 뭐랄까......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거나.. 다른 사람을 신경 쓰면서 힘든... 그런 삶이 아닌? 지금 제 모습이 싫거든요. 그게 저를 너무 힘들 게 하는 것 같아요."

"그건 스스로를 부정하는 거잖아요.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원하거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힘들어져요."


그래, 어쩌면 지나치게 완벽하려고 하고 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아니 용을 쓰며 살았던 지난 시간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겠지. 물론 그 과정에서 이렇게 병원을 다니게 됐지만, 그래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많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전의 삶이란 도대체 어떤 거지?


10월쯤 언제까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니 나도 요즘 말하는 파이프라인을 한번 만들어보자 싶었다. 그래서 퍼블리에 저자 지원을 했고 운 좋게 기획안이 통과돼서 콘텐츠로 올라갔다. 팀장을 7년이나 했던 사람이 그룹장이 되면서 겪은 고충을 적나라게 쓰고 그로 인해 배운 점을 썼다. 적어도 구독자 중 누군가는 나처럼 힘들지 않게 요령껏 리더의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글을 쓰면서 지난 1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 마지막 회사를 다녔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새삼 돌아보게 됐다. 열심히 살았다.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비록 마무리를 잘 못 하고 나온, 그야말로 도망쳐 나온 그룹장처럼 보일지언정 지난 시간의 내 노력은 부정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4 10장 남짓의 글을 쓰는 동안 여러 번 부끄러웠다. 내가 뭐라고 이런 글을 쓰나, 별 것도 아닌데 괜히 우쭐해서 쓴 글처럼 보이면 어쩌지, 리더십을 잘 발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다행히도 퍼블리에 올라간 글에는 리뷰들이 제법 달렸다. 담당 매니저 말로도 이례적이라고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응원하는 댓글과 도움이 됐다는 댓글을 보며 힘을 얻었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퍼블리 콘텐츠 특성상 실용성, 유용함에 집중해서 쓰게 되는데, 그룹 운영에 대해서는 대단한 계획을 세웠으면서 정작 내 인생의 계획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는 거였다.


퇴사하기 전 나의 마지막 업무는 Vision 2027이라는 명목의 3개년 그룹 운영 계획을 세우는 거였다. 당장 내년도, 아니 한 달 뒤도 모르는 삶을 살면서 2027년이라니. 이 얼마나 아득한 시간인가. 그래도 우리가 집중할 사업, 진입할 사업, 도전할 사업에 대해 나누고 액션 플랜까지 다 짰다. 몇 달을 고생해서 그 비전을 만들어놓고 정작 퇴사할 때 들고 나온 파일 목록에는 있지도 않았다. 더 이상 내게 필요 없는 거였으니까.


한때는 소설가를 꿈꿨고, 언젠가는 작가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10년만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그만두자 했다가 너무 짧은 것 같아 그래 마흔까지만 일하자! 했다. 어차피 이 업계에 발 들였으니 CD까지는 해보자 했고, 얼떨결에 CD가 되고 덜컥 크리에이티브 그룹장까지 되고 나니 오호라, 그럼 C레벨까지 한번 가봐?라는 야망이 생겼다. 그런데 이게 다다. 정말 딱 그냥 그 정도. Vision 2027을 만들 때는 그렇게 전략을 세우고 액션 플랜을 여러 번 수정하더니. 


나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지금의 힘듦을 벗어나는 것이 이전의 내 모습을 되찾는 것과 동일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내가 될지 생각해 보자. 회사 말고, 직장인 말고, 그냥 나로, 김은선으로. 


그래서 무턱대고 글을 쓰는 중이다. 당장 뭘 할 수 있을지 막막하지만 어디든 쓰고 있다. 브런치도 오랜만에 들어와서 이렇게 글을 쓰고 퍼블리 추가 기획안도 보냈다. 연말이면 남들 다 한다는 2024년 회고록과 2025년을 위한 만다라트도 써볼 참이다.


쓰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어떤 내가 되고 싶은지, 내가 내려놓지 못하는 것과 쌓아 올린 것이 무엇인지.




*혹시나 궁금할 사람들을 위해 링크 공유합니다.

https://publy.co/content/7712?fr=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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