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했지만 프리랜서는 못 됐습니다
명함이 없는 첫 번째 삶
"잘 생각했어.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퇴사 후 시간은 참 더디게 흘렀다. 하루가,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지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명함이 없는 삶도 이제 겨우 3주가 지났을 뿐이다. 이렇게 시간이라는 게 상대적이다.
한참 동안 밀린 잠을 잤다. 평소엔 4시간에서 6시간 정도 잤고 그마저도 불면증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해서 수면의 퀄리티가 좋지 못했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나서 일주일 동안은 정말 정신없이 잤다. 10시간은 기본, 낮잠을 자고도 오후 10시가 되면 잠이 쏟아졌다. 마음이 편했다. 쏟아지는 눈을 보다가도 잠들었고 책을 읽다가도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러다 12월 초에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스카우트 제의였다. 전에 함께 일했던 기획팀장은 내가 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퇴사하자마자 전화를 하는 건 그래서 이제야 연락한다고 했다.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앞으로 프리랜서로, 1인 사업가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런 제안을 먼저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덜컥 수락하기에는 겁이 났다. 그러자 괜찮다고 천천히 생각하라며 괜찮으면 자기네 회사 이사님과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확실히 회사가 주는 안정감은 있다. 지난 16년을 겪어봐서 안다. 큰 사고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울타리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고정적인 수입 또한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즈음 프리랜서로 평생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위 말해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었다. 취미 생활이 업이 된 사람도 있었고, 기존에 하던 일과 전혀 다른 비즈니스 카테고리에 도전해서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대기업에 다니면서 쌓인 노하우로 책을 쓰고 강연을 하기도 했다. 나는 어느 영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예전에 본부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래도 큰 대행사에서 CD를 달고 나와야 기획실장을 할 수 있다고. 어느 대행사 출신 CD라는 그 명함 자체가 일을 물어다 준다고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도 900명 가까이 되는 대기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OO 출신의 CD라고 나에게 일을 줄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다. 회사의 특징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내가 덜 유명한 탓이었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고민하는 나에게 친구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회사를 다시 들어가는 건 좋은데 조금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그 회사에서 기다려 주기만 한다면 3월쯤 어떻냐고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나를 위한 걱정이었다. 전전 회사 이사님께도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가야지. 지금 너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 잃을 게 없거든. 갔다가 아니면 나와서 다시 제대로 니 사업을 준비하면 돼. 솔직히 너 아무런 준비 없이 퇴사했잖아."
"맞아요. 그런데 가면 또 사람들한테 치일 텐데 그게 좀 겁나기도 해요."
"그럴 거야. 가면 너는 또 일에 뛰어들 거고 사람들 때문에 힘들겠지. 내가 봤을 때 너는 조직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야. 아직 어리니까 거기 다니면서 배울 거 배우고 니 사업 준비해."
모든 게 맞는 말이었다. 이사님은 사업은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돈에 관한 스트레스까지 함께 오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회사는 관계 스트레스만 있지 않냐고 하면서 말이다.
"다음 주에 같이 점심 드시죠."
만나기로 결심하고 나니 오히려 계획이 명확해졌다. 못해도 2~3년 다니면서 새롭게 배울 거 배우면서 사업을 준비하기로, 요즘 같은 세상에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하기로 했다.
전 회사에서 잘했던 점은 그대로 이어받고, 힘들었던 점은 최대한 피하고 줄여가면서 건강하게 일해볼 참이다. 과연 그게 얼마나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