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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Mar 07. 2024

‘서글픈 익살스러움‘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인간 실격> 13쪽




드라마 '인간 실격'과 원작 소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몇 해 전 TV에서 방영된 '인간 실격'이라는 드라마를 즐겨 본 적 있다. 호불호가 있었던 드라마로 기억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무척 호감을 가지고 흥미롭게 봤던 드라마 중 하나다. 방영 당시 가을로 저물어가는 때였지만, 드라마의 계절적 배경이 추운 겨울이었기에 '인간 실격'이라는 스토리는 나에게 차가운 겨울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모두가 움츠릴 수밖에 없는 추운 겨울 어스름한 밤, 옥상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 남녀의 어두운 그림자. 그것이 '인간 실격'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이미지였다.


방영될 당시 드라마는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드라마의 흥행과 상관없이 지금까지도 이 소설은 스테디셀러로 자리하고 있고, 우연한 기회로 나는 드디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드라마에서의 서늘하고 어둑하지만 그 안에 따스한 남녀애를 되살리려 노력하면서.


하지만 이 원작 소설은 드라마와 상이한 부분이 많았다. 드라마가 이 원작 소설과 상이한 부분이 많은 거겠지만. 겨우 찾아낸 것은, 책 후반부에 주인공 '요조'가 약을 구하기 위해 약방에 들어가 약방 주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드라마가 슬쩍 떠오르긴 했다. '이 사람도 틀림없이 불행한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에도 민감한 법이니까..' 라며 불행한 사람들끼리는 본능적으로 서로의 그림자를 응시할 수 있는 듯 묘사한 문장에서 드라마 속 두 남녀가 떠올랐다. 인간과 실격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 낯설다 못해 불합리하게 느껴지지만, 인간 실격을 경험한 두 남녀가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고 가까워지는 부분에서는 드라마와 소설의 공통점이 보였다. 두 사람의 나이차와 상관없이 동류의식으로 인한 연민의 감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글픈 익살스러움을 가진 '기묘한 얼굴의 남자'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통은 자신이 듣고 보고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허구적 요소를 섞어 소설화하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 속 주인공 요조가 마치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듯 독자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간 실격>이 일본 문학의 장르 중 '사소설'이라는 것의 대표 소설이기도 하듯, 요조는 작가와 동일한 인물처럼 아주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다.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서문에서는 사진 세 장으로 주인공 요조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어린 시절과 십 대 그리고 좀 더 자란 모습의 요조. 하지만 전혀 상상할 수가 없는 얼굴이다. 그를 묘사한 글자들을 가까스로 조합해 보아도 쉽지 않다.


'섬뜩하고 으스스한 기운, 웃고 있는 주름투성이 원숭이, 대단한 미남, 여자 같은 미모, 악몽 같은 섬뜩함, 사람 몸뚱이에 짐 끄는 말의 목, 기묘한 얼굴의 남자...'


이런 모습을 한 요조는 어린 시절부터 시기마다 여자들이 꼬인다. 모성애를 자극하는 모습 혹은 연민과 사랑이 혼합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일 것도 같다.


요조는 천성적으로 섬세하고 예민해 항상 불안하고 과민하지만, 타인과 다른 듯한 자신을 숨기려 '익살스러운' 가면을 덧씌운다. 자신을 장난꾸러기인척 희화화하거나, '서글픈 익살스러움'을 몸에 장착하면서. 허위와 위선 가득한 세상과 그 안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이해타산적인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하면서도,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아가려 노력하는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소위 부적응자나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인처럼 생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선물로 책을 받고 싶었음에도 결국 아버지가 주길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해야 했고,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어디에도 없으며 겉으로 자신을 도와주는 듯 보였던 사람들도 모두 본인의 이득때문이었음을 알아가게 되면서, 가면을 벗겨낸 인간들의 실체, 그들이 사는 이 세상의 비정함을 요조는 여러 번의 자살 시도로 벗어나려 한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 처절한 자기반성


요조는 신에게 묻는다. "신뢰는 죄인가요?" "무저항은 죄입니까?"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상과 그것보다 더 비밀투성이인 인간에게 처절하게 상처를 입은 요조는 신에게 그렇게 묻는다. 대체 신뢰가 죄냐고, 왜 무저항이 죄가 되냐고.

사랑해서 결혼한 요시코에게 어느 날 닥친 비극. 순진무결한, '더러움을 모르는 처녀성의 숭고함'을 지닌 요시코가 '전깃불 아래 두 마리 짐승'이 되어버린 것을 목격한 요조. 그로 인해 그는 인간에 대한 공포심과 의심이 무한히 커지게 되었고, 신에게 포효한다. 무구한 신뢰심이 죄냐고. 또한 그는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면서 미치광이 취급을 받아야 하는 자신의 상황이 옳은지, 이 무저항은 죄냐고 신에게 묻는다.


서문을 제외하고 첫 문장은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이다. 이것이 내가 꼭 기억하고 싶은 한 문장이다. 요조는 적어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처절하게 자기반성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위선과 허위로 가득한 세상에 의문을 품으며 바람직한 인간상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뇌하는 사람이었다. 공포스럽고 무서운 인간들에게 상처 입지 않으려 서글픈 익살스러움으로 자신을 숨겨야 했던 연약한 한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그것을 실행한 한 연약한 사람이었다.

상처 입어 너덜너덜해진 한 인간이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 이르며,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자조하는 모습에서 가슴 아린 슬픔이 밀려왔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번쯤 생각한 적 있을 것이다. 인간다움을 상실한 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로 또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삶의 필연이라는 자기 위로를 하면서 말이다. '내가 살려면, 내 가족이 살려면'이라는 전제 뒤에 숨은 어둡고 비정한 자기 합리화와 자기 위선을 인간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인간 실격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누가 누구로인해 인간 실격을 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자격이란 게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어둡고 침울한 이야기였지만,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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