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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절에가다 Nov 22. 2023

너와 나 우정의 시작, 친구

<우정도둑> 유지혜

"당신에게 없는 것이 내게 있어요. 이걸 드릴 테니, 당신은 내게 없는 걸 주실래요? 그렇게 우정이 시작된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서로에게서 몰래 훔치며. 당신에게 없는 것으로 인해 당신은 완벽해진다."  

-프롤로그 <우정 도둑>     



너무 소중하면 건드리기도 다가가기도 어려운 것일까. 내 터치 하나에 바스러져 깨어질까, 내 눈 맞춤 하나에 홀연히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 때문에. 혹은 그 소중한 존재를 온전히 내 손으로 담아내기에는 내 두 손은 순수하다 못해 투명하여 손 안의 모든 것을 마냥 흘려보내기만 하는 것을 잘 알아서일까. 이 책이 나에게는 그랬다. 세 번의 서점, 세 번의 눈 맞춤. 세 번의 눈 맞춤일지라도, 허기질 때를 기다렸다 꼭 데려오겠다는 너와의 약속. 그 허기짐은 나에게 비워짐을 의미했다. 내 속에서 많은 것들이 비워지면, 그 비워진 상태 그대로 한동안 머물고 싶을 때, 허기진 채 고요하고 싶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으로 눈맞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소중해서 너를 바라보기만 할 뿐, 너에게 다가가기에 아직 나는 미완성인 상태. 내가 온전히 비워지고 허기져야 너를 오롯이 내 속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 한 자락.

무심한 듯 백지의 얼굴을 하고서 '우정을 도둑질하자'며 드디어 나에게로 왔다. 나는 고요히 비워져 있었고, 그 고요에 한껏 머물고자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다가갔다. 느린 걸음이 무용하게도 보자마자 그 속에 품은 모든 문장을 삼키고 싶었다. 삼키지 않고 오랫동안 곱씹어 고스란히 내 모든 감각세포에 담아두고 싶었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사람이 아닐까, 아니면 정말 사람일까. 진짜 사람일지도. 인공지능이 마치 사람처럼 말하고 쓰는 세상이니, 이런 문장을 써야만 진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시는 몇 백 번 읽어야 하는 한 줄이며 시어들은 수수께끼 눈 뭉치라고. 시는 가닿음을 보장하지도 않으면서 성실함까지 요구하는 짜증 나는 책이다. 그래서 시집을 사는 건 정복할 수 없다는 찝찝함까지 구매하는 것이다" (51쪽) "정말 좋은 시는 시 쓰는 걸 포기하게 만드는 시였다"(53쪽)


나에게 이 책은 저자가 느끼는 '시'에 대한 감정과 동일하다. 몇 백 번을 읽어야 하는 하나의 책이며, 그 속의 문장들은 곱씹을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수수께끼 눈 뭉치. 느린 걸음으로 찬찬히 읽었음에도 가닿음이 보장되지 않는. 내 속을 비웠고, 고요해졌으며 허기가 진 상태에서 오래 기다려 만난 시집 같은 이 책은, 책을 덮었으나 포만감을 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포만감이 느껴질 때까지 앞으로도 옆에 두고 눈 맞춤하고 싶은 책이기도 했다. 정복할 수 없다는 그 찝찝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날을 기대하면서 내 곁에서 영원히.



책에 대한 단상


내가 읽고 있는 책은 나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내가 선호하는 책의 장르나 서사는 나를 말해주기도 한다. 나의 정체성이니 만큼 책을 선택할 때 우리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만의 책장 안에는 내가 택한 자유들이 꽂혀있다. 종종 자유로움에서 벗어난 것들도, 혹은 시행착오의 결과물들도 꽂혀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배타적이고 엉뚱한 철학으로 선택을 지탱할 것, 책은 내가 모든 것의 모든 영향을 외면하며 유일하게 남겨놓는 실패의 영역이다... 타인의 간섭이 없는 나만의 선택은 그 모든 시행착오를 애착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188쪽),라고.

책장 속 책들은 어찌 됐든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자유이며 나의 애착이다.


책은 가끔 우리의 도피를 도와주기도 한다. 도피처가 되기도 하고. 내 현실과 괴리된 책 속 세상에서 내 현실을 잊을 수 있는, 혹은 너무나 내 현실과 흡사해서 헤어져 나오기 힘든 그런 공간이기도 하다. 가끔 소설의 세계로 도피해 현실에서 나를 찾을 수 없게 꼭꼭 숨어 숨바꼭질하던 기억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나의 성향과 비슷한 인물 혹은 나와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인물을 만나고,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나 태도, 혹은 닥친 위기들에 주저앉거나 헤쳐나가는 모습들에서 안타까운 공감을 하기도, 따뜻한 위안을 받기도 벅찬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저자는 말한다.


"밖을 볼 수 없어서 자기 자신만 보게 되는 방, 자기 자신의 결핍 안으로 침잠하는 게 유일한 선택지인 방. 그 시절 책은 나의 유일한 창문이었다"(144쪽),라고.


책 한 권이면 된다. 책이란 창문을 통해 누구나 훨훨 날아갈 수 있다. 현실은 창문 하나 없는 지하 단칸방일지라도.



쓰기에 대한 단상


읽기와 쓰기는 긴밀한 관계로 이어져 있다. 서로가 서로를 갈구하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관계. 읽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쓰기의 재료가 읽기이기도 하다. 읽고 읽고 또 읽다 내 것이 쓰고 싶어지고, 쓰고 쓰고 또 쓰다 타인의 글을 갈구하게 된다.


"쓰는 사람의 정체성은 읽는 사람의 정체성을 넘어설 수 없다. 쓰는 이는 누구보다 더 지독하게 읽는 사람이어야 한다. 읽고 싶은 욕망이 쓰고 싶은 욕망 위에 선다" (226쪽)라고 저자는 말한다.


즉 읽기와 쓰기의 욕망 중 단연 읽기의 욕망이 먼저고, 쓰기는 다음. 또한 쓰는 행위는 읽는 행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읽는 것이 쓰는 것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지독하게 읽고 읽으며 읽는 사람의 내면은 타인의 글로 채워지고, 그것이 내 속에서 흘러넘치고 넘쳐야 그때서 뭔가를 쏟아내고 싶어 진다. 타인의 글을 지독하게 읽다 보면 독서량 임계치를 만나게 되고, 이제는 나도 내 것을 쓰고 싶어지는 일, 즉 읽기만 했던 일상이 점차 쓰는 국면으로 전환된다.


또 저자는 글쓰기가 자신의 '불행을 팔아먹는 일'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울음을 참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바로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쓴다. 팔아먹을 불행이 내게 조금 남아 있다."(151쪽)

"하지만 가난은 우리의 얼굴 어딘가에 표정이 되어 남아 있다. 나는 그 흉터에 대해 쓴다. 금세 젖어드는 불행의 습관을 뿌리 뽑기 위해."(151쪽).


무엇이 우리를 쓰게 할까. 쓸 수밖에 없는 쓰는 사람의 마음 상태. 쓰지 않으면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쓰는 사람의 마음 상태. 그런 마음들이기에 쓰는 사람은 쓰고 또 쓴다. 저자에게 쓰기는 자신의 생존과 결부되어 보인다. 쓰지 않으면 한시도 버티기 힘들고 신물이 날 정도로 게워내지 않으면 숨 쉴 수 없는 상태, 그렇기에 쓰는 행위는 그를 다시 숨 쉬게 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일이다. '자신의 불행을 팔아먹을지라도' 그 '불행을 뿌리 뽑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서 뱉어지는 문장들은 단연 생명력으로 살아 숨 쉬며 읽는 독자들을 치유하고 소생시킨다.



고독에 대한 단상


"나는 나의 유일한 공범이다. 모든 순간이 나와 공유된다. 하지만 혼자 있는 모든 순간을 고독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 고독은 그 순간들 사이에서 건져진, 나를 의식하면서 반드시 품위를 유지하는 자발적인 홀로서기다."(26쪽)


고독에 대한 저자의 정의다. '공범' '순간의 공유' '건져진' '자발적인' '홀로서기'... 고독은 나와 또 다른 내가 연합해서 나의 순간과 또 다른 나의 순간을 공유하는 일이고, 연합한 또 다른 나를 내가 인식하는 것이기에 홀로 있음에도 스스로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자발적인 홀로서기라는 것. 고독이 성립되려면 타인의 부재가 조건이어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나 홀로 고독을 누리지만, 타인의 자리에 또 다른 나를 존재하게 하고, 또 다른 나가 내 옆에 존재하기에 고독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 특히 혼자 산책을 하는 것, 혼자 책을 읽는 것, 혼자 여행을 하는 것은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은 일이다. 내가 나와 함께 산책을 하고, 내가 나와 같이 책을 읽고, 내가 나와 손잡고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그것이야말로 품위를 유지하는 자발적인 홀로서기라는 것.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은 나와 내가 만나는 경험. 즉 내가 나의 유일한 공범.

저자는 자주 여행으로 자발적인 홀로서기를 하고, 고독과 우정을 함께 만나기도 한다. 몇 주에서 몇 달씩 타국에 체류하며 그곳 사람처럼 살아간다. 특히나 뉴욕 거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을 낭비할수록 좋은 하루다. 특히, 이곳 뉴욕에서는 그것이 논리적이다. 모든 사건, 모든 사람을 모든 걸음과 모든 시야로 감당하는 일, 그것이 뉴욕의 규칙이다."(113쪽)

"뉴욕을 산책하는 일은 언어를 산책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무신경한 사람도 도시 전체를 뒤덮은 메시지들 중에 적어도 한 줄은 반드시 읽게 된다."(156쪽)


뉴욕은 차 없이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라 들었다. 빽빽이 들어서 있는 빌딩 사이사이 골목들을 거닐면서 뉴욕도시 전체를 걸어 다닐 수 있다고.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들고 자발적 홀로서기를 일삼으며 뉴욕을 누비는 저자의 품위 있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걷고 또 걷다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그들의 문화에 젖어보기도 하고, 이방인에게 건네는 눈인사를 관대하게 받아들여보기도 하고. 또 뉴욕 거리를 함께 거닐고 있는 나 자신에게 말을 툭 걸어보기도 하고. 또다시 거닐고 거닐다 뉴욕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메시지들에 시선을 두기도 하고, 그것의 의미를 담아보기도 하고. 낯선 곳에서의 홀로 여행은 저자가 말하는 고독을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우정 도둑'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프롤로그라고 적혀 있지 않으나 그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는 첫 몇 페이지에 나와 있었다. '모든 것이 나의 친구다'라며 모든 것과의 우정을 쌓고 있는 사람, 그리고 '훔치기엔 사랑보다 우정이 나았다'라고 말하는 사람, 심지어 책으로써 우정이 시작된다고 여기는 사람, 그래서 '독자는 훔친 이야기를 팔아넘긴 작가의 공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그 사람이 유지혜였다.

너와 나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고 그렇기에 우정을 나눌 수 있다. 책이라는 너, 여행이라는 너, 산책이라는 너, 소중한 사람인 너, 그리고 나라는 존재인 너와의 우정. 그 모든 것들과의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가 이 책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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