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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Dec 22. 2023

'롱롱타임'을 좋아했던 그 남자

     

요새는 왜 밥만 먹으면 꼬박꼬박 조는지 모르겠다. 남편과 시댁에 가기 위해 점심식사를 하고 출발한 지  10 분쯤 지났을까? 천근만근 내려오는 눈꺼풀 때문에 떡방아를 찧고 있을 때다. 비몽사몽 중 라디오에서 애절하고 간드러진  린다 론 스태드의 ‘롱롱타임’이 흘러나왔다.

     

아, 그가 좋아했던 팝송! 

아주 오래전이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래방에서 부를 노래 한 두 곡만 외우고 있을 뿐이다.  낯익은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저 그 분위기에 젖어 흥얼거리곤 하지만 누구의 곡이고 가사가 어떻고 뭐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른다.

     

그와의 만남은 첫 미팅 때였다. 어두컴컴한 경양식 집에서 우리는 파트너를 정했으나 내가 원한 사람과는 짝이 되지 못했다. 원래부터 오동통하고 키가 컸던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는 오직 키 큰 남자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가장 작고 마른 사람이 걸렸다.  

   

잔뜩 뿔이 난 나는 그날 말없이 밥만 먹었다. 그때 이 팝송이 나왔고 그는 내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도 린다 론 스태드에 대해 식사가 끝나도록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예의 상 그저 가끔 고개만 끄덕였고 별 약속 없이 헤어졌다.  그러나 우리 네 커플은 그 후로도 자주 어울려 다녔다.  

  

하루는 우리 모두 수락산으로 등산을 갔다. 꽃단장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우리들의 손에는 대문짝만 한 카세트테이프 레코더에, 기타에, 먹을 것까지 잔뜩 들려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후가 되자 잔뜩 찌푸렸던 하늘은 기어코 엄청난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 큰 바위가 있던 곳은 어디쯤일까? 

우리는 커다란 바위 동굴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나 어떡해’ 등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며 한참을 기다렸으나 비는 좀체 그치질 않았다. 벌써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어 우리는 그냥 비를 맞으며 하산하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그가 자기 점퍼를 벗어서 내게 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옷을 받아 입었다. 한참을 내려오다 돌아보니 그의 바짝 마른 몸은 홀딱 비에 젖어 비 맞은 생쥐가 되어 있었다.  

“저기, 이거 그냥 다시 입으세요”

“아니, 괜찮아”

그는 눈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파랗게 변한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후에는 비탈길에서 내미는 그의 손을 잡기도 했다. 아주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그러나 그 만남이 끝이었다. 물론 내가 찜했던 사람과는 남사친이 되어 그 후로도 몇 번 만났다.   

  

그리고 가끔 그의 소식을 들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일하고 있다던가, 이혼했다던가, 그러다가 연락이 끊어졌다는 이야기까지.  지금도 ‘롱롱 타임’만 들으면 그날 그의 눈썹에 맺혔던 빗방울과 함께 떨리던 그의 파란 입술이 떠오른다. 

    


“안 자고 있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남편의 한 마디에 갑자기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나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 남자 잘 살고 있겠지? 그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더 뚱뚱한 아줌마로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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