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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Nov 27. 2023

하는 사랑의 모습

보름달을 기다리는 저는 조금씩 차오르는 달의 형상을 쭉 지켜보는데 익숙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커진 마음에 놀라곤 했던 시절이 문득 떠오르곤 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점점 움츠려 들게 하는 날씨 가운데 가슴을 펴고 고백을 하나 할까 합니다. 바로, 제 첫사랑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요. 보름달이 뜬 오늘, 11월 27일은 도무지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거든요.


이 편지를 읽는 당신은 응답 없는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제가 사랑한 사람은 마냥 바라만 봐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교차하는 지점을 찾지 못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은 점점 부풀어만 가는 탓에 때때로 버겁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닿는 어떤 우연도 일어나지 않아 마음을 전할 수도 그 방법도 모르는 저는 그저 어린아이였거든요. 후회 없이 용기라도 내봐야 했던 것 아니냐고 누군가는 묻겠죠. 하지만, 그 역시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에게 이런 조건 없는 애정을 품는 사람이 저뿐만이 아니었거든요. 바로, 그는 화면 속 오빠였기 때문입니다.


서로 오가는 친밀감에서 시작한 마음이 아니라, 특정할 수 없는 이가 특정할 수 있는 이를 향해 품는 마음은 쉬이 사랑이 아니라고 치부됩니다. 팬심을 사랑이 아닌 단어들의 조합으로 정의하며 제 마음을 심판대에 기어코 올려버리는 그 시선에 의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비아냥을 가볍게 무시하고 사랑이라는 과녁에 정확히 한가운데를 조준해 명중하고야 맙니다. 그리고 화살을 뽑아 되돌려줍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에 그를 향한 제 마음이 기대되는 것을 사랑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나라는 사람이 생생하고 또렷하게 그 마음을 중심으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을 사랑이 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랑의 본질은 '하는' 사랑에 있습니다. 돌아오는 그 어떤 시선과 손길도 없이 쏟아 내지만 그에게 닿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랑을 말이죠. 그래요. 그는 저를 몰라요. 과거형의 사랑이라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겠지만, 지금도 그는 저를 모른다는 사실만 남아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를 앞에 두고 말해본 적 없으니까요. 그저 제 마음을 알리기보다 그의 행복을 우선하며 하는 사랑에 집중했습니다. 그가 나를 향해 웃지 않아도 그가 웃기 때문에 즐거운 그 기쁨을 당신은 아시나요?


하는 사랑은 보름달을 닮았어요. 시간만 성실하게 흘렀을 뿐인데 모자란 구석하나 없이 원을 그리고 있는 보름달을 말입니다. 그 모습이 받은 사랑이 없더라도 하는 사랑만으로 충분히 자라난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맞아요. 누군가 순수한 사랑의 형상을 그려보라고 하면 저는 주저 없이 보름달을 그리겠어요.


어쩐지 보름달이 조금 부럽기도 합니다. 제 마음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보여줄 수가 없는데, 보름달이 품은 마음은 선명하게 빛나니까요. 보름달처럼 사랑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제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 텐데요.


태양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고 열렬한 모습으로 까만 밤 한가운데에 온 세상을 비춰줄 만큼 빛나며 자리하는 것이 보름달입니다. 아마 달 자신도 몰랐을 거예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본질을 초월해 자신이 이렇게나 큰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부정해도 자신만은 또렷하게 느끼는 사랑의 온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은 하는 사랑이 아니고서야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첫사랑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의 깊이와 너비를 알게 된 계기가 되어준 셈이니까요. 더불어 제 마음은 가늠할 수 없이 무한히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것 또한 알려주었어요.


마음은 재단하거나 그 모양을 다듬을 필요 없이 충분히 사랑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보름달을 맞이합니다. 이 편지를 받는 당신의 사랑 이야기도 궁금해지네요. 이번에는 답장을 꼭 받았으면 해요. 늦어도 좋으니 언제든 기다릴게요.



이천이십삼 년 열두 번째 보름달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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