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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Apr 23. 2024

나의 이상형

다른 날보다 보름달이 뜬 날이 더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보름달이 좀처럼 지나칠 수 없을 만큼 크고 환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승달이 지닌 은은한 분위기나 반달이 지닌 귀여운 모양새가 주는 인상도 매력적이지만, 보름달은 마주하는 순간 가던 길을 멈추고 서게 돼요. 새까만 하늘에서 유일무이하게 자리한 존재감에 꼼짝도 못 하는 것이죠.


옆에서 재잘거리며 이야기를 하던 친구의 말소리를 잊은 채 밤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멍하니 바라보며 보름달에 취했던 날이 떠오릅니다. 나를 지금 여기(Here and Now)로 머물게 하는 보름달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보름달 같은 연인을 만나면 좋겠다고 말이에요.


저는 생각이 무척 많은 편이에요. 제가 불면증을 달고 사는 이유는 잠자리에서도 끊이지 않는 생각 때문입니다. 방금까지 작업하던 그림이 계속 떠오르고, 앞으로 쓰고 싶은 글감 사이에서 숨을 고르지 못하고 요령 없이 헤엄치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생각을 자르는 가위를 떠올리며 싹둑 자르려 애를 쓰지만, 혼자서는 생각을 멈추는 것이 여간 어렵습니다.


이런 제가 쉼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때입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다 보면 생각이 자연스럽게 꺼져요. 아주 간단한 회로로 설계된 전원장치의 OFF 버튼을 누른 것처럼 말이에요. 이처럼, 보름달도 제게 그런 존재로 다가옵니다.


"여기 앉아 봐. 그리고, 지금 나를 봐."


혼자서 몸을 망처가며 또 어딘가로 향하며 질주하던 저를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보름달은 말하는 것이죠. 멈추고 자신을 보라고. 저는 그렇게 보름달을 보며 쉼을 느낍니다. 모든 이를 압도하도록 빛나는 보름달에게 다정함을 종종 발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나 봅니다.


네, 저는 이때부터 이상형을 보름달 같은 사람으로 정하기로 했어요.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저만치 달려 나가는 저를 잡아끌며 잠시 나를 보고 함께 숨을 고르자고 하는 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함께 있으면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한 관계를 꿈꿉니다. 서로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도록 차근히 발걸음을 맞춰 걸을 수 있는 관계 말이에요. 지금의 서로를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말해주며 서로의 곁을 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굳이 서로가 지닌 모습을 솔직하지 못하게 포장하거나 겪고 있는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지금 여기에 내가 머문다는 감각은 정말 근사한 일이에요. 보통 그것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말하니까요.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주는 행복을 만끽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상형을 고백하는 편지를 쓴 탓일까요. 오늘의 보름달은 구름에 슬쩍 가렸지만, 그 자체로도 유난히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4월의 싱그러운 공기가 저와 보름달 사이를 가득 메우며 빛이 더욱 생기 있게 전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보름달이 전하는 빛을 품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 존재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요.


아, 한 가지 깜박하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제 이상형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자면, 보름달을 마주하며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어요. 만약, 그가 보름달에 감동하지 못하더라도 보름달을 보며 싱긋 웃는 저를 통해 보름달을 함께 알아갈 사람이어도 좋아요. 그렇게 깊어지고 또 넓어질 수 있는 관계를 통해 사랑을 키우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보름달에게 소원을 빌어봐야겠습니다. 보름달, 당신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이에요.




이천이십사 년 네 번째 보름달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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