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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20. 2024

그래도 계속 걸어갈 거야

Day 17. 깔사디야 데 라 꾸에사 → 사아군

매일 다른 일출을 맞이하며 걷는 까미노


"에밀, 그 약은 식사하기 전에 먹어야 해. 지금 약부터 먹자."


아침식사를 하러 들린 레디고스의 바에서 나는 에밀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지난밤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위장약을 준 터였다. 나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고 에밀은 간단한 영어만 구사할 수 있기에 우리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기 어려웠다. 에밀이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에 한국에서 챙겨 온 약이 생각났다. 그의 증상을 들어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약이 제법 잘 들 것 같았다. 하지만 약을 주겠다는 내 말을 에밀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브라이언을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브라이언과 에밀은 정말 신기한 방식으로 대화를 한다.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면 분명 영어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프랑스어로 대화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유창한 프랑스어 덕분에 브라이언은 어느 정도 프랑스어로 회화가 가능했다. 덕분에 브라이언은 에밀과 영어로 대화하다가 막힐 때마다 재빠르게 프랑스어로 바꿔 말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프렌치 악센트의 영어와 아이리쉬 악센트의 프랑스어의 대화는 이들의 시그니처 사운드였다.


"에밀을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아군은 제법 큰 마을이거든."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브라이언에게 나는 지도 앱을 켜서 유르젠시아가 있는 병원을 찾아서 알려주며 말했다. 그들은 이번에도 본래 계획처럼 멀리 가는 대신 엄마와 내가 가기로 한 사아군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에밀은 여전히 몸이 좋지 않았고 전문의의 진단과 처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꼭 이럴 줄 알고 알아봐 둔 것 같네? 지난번에 엄마가 알레르기로 고생을 할 때 미리 알아둔 병원에서 쓸만한 스페인어 표현을 까미노에서 에밀의 임시 아버지를 자처한 브라이언에게 모두 전해주었다.


걷기 좋은 바람이 불어온 아침, 사진을 찍는 엄마

"이제 점점 더워지겠지?"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던 리치 아저씨가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미국의 텍사스 주에서 온 리치 아저씨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온 딸 몰리사와 함께 걷는 순례자였다. 레디고스까지 6km 넘게 걸어오는 동안 선선한 바람이 계속해서 불어온 터라 걷기 좋았다. 이제 점차 땅을 데우는 해가 높게 이동을 하게 될 텐데 엄마보다 나이가 있으신 아저씨는 더위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린 계속 걸어갈 거야. 그렇지 않니?"


염려를 다짐으로 바꿔 말하며 리치 아저씨는 배낭을 정리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갈 거니까. 온갖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걸어온 엄마처럼 지금 아프더라도 계속 걸어가는 에밀처럼 우리는 계속 걸어갈 것이다.




사아군에 도착한 우리. 엄마는 세르베사(Cerveza, '맥주'의 스페인어), 나는 수모 데 나랑하를 한 잔씩 즐겼다.


마침내 도착한 사아군. 나는 이곳에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잭과 한바탕 싸운 바람에 이곳에 그를 두고 나는 14km를 더 걸어 깔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까지 가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일도 아닌데 왜 언성을 높이고 왜 서로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말도 없이 14km나 더 걸어가 버리다니. 딸에게 지지 않으려고 달려든 아버지도 너무 하시지만, 나도 참 독한 딸이었다. 잘 걷는 다리를 방패와 무기 삼아 화를 풀어낸 셈이었으니까.


늦은 오후, 엄마와 나는 순례자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을 찾았다. 보통 순례길에 위치한 성당들은 미사를 마치면 마지막 순간에 순례자 축복기도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미사가 끝나자 봉사자가 순례자들을 앞으로 불러 모아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서도록 일러주었다. 사제는 불이 켜진 초를 자신의 오른편에 있는 순례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개인 기도를 하는 시간입니다. 초를 들고 기도를 한 후 옆 사람에게 건네주도록 하세요."


사제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명씩 돌아가며 기도하는 시간을 보냈다. 내 왼편에 있는 엄마에게 초가 옮겨졌다. 엄마는 살포시 눈을 감았고 촛불은 엄마의 숨결에 따라 가늘게 헤엄쳤다. 엄마가 어떤 기도를 했을지 궁금했다. 촛불의 일렁이는 모습처럼 바람을 닮은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자기만의 방에 있다가 눈을 뜬 엄마는 내게 초를 건넸다. 나는 눈을 감고 집을 떠올렸다. 나헤라에서부터 나는 줄곧 집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라는 집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는 깨달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내 마음을 계속 두드려댔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 더 있는 것처럼. 나는 이 여정이 내게 집이란 어떤 곳인지 알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는 기도를 했다.


초가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사제에게 돌아갔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며 건강히 완주하길 바란다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길의 끝에서 각자 행복의 의미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나는 사제의 말을 고스란히 엄마에게 전해주었다. 여행을 시작하며 행복을 이야기하던 엄마에게 말이다.




병원에 다녀온 에밀을 알베르게에서 만났다. 브라이언과 에밀이 옆 방에 머물고 있었다. 벽 너머로 들리는 그들의 시그니처 사운드에 반가웠다.


에밀은 한결 좋아 보였다. 방긋 웃으며 그는 병원을 다녀온 후기를 들려주었다. 의사는 에밀에게 식중독이라는 진단과 함께 주의사항과 먹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고 했다. 병원 진료비는 일절 받지 않은 채. 그가 좋은 의사를 만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이제 에밀은 가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멀리 갈 수 있을 테다.


어느 이름 모를 순례자의 연주


알베르게의 복도에서 일기를 쓰던 나는 밤이 찾아와 방으로 돌아갔다. 불이 꺼진 방에서 조심스럽게 베개에 머리를 뉘이며 생각했다. 이제 그들과 헤어질 준비를 해야겠다고.



Day 17. JUN 26, 2024

Calzadilla de la Cueza → Sahagún, 21.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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