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8. 사아군 → 엘 부르고 라네로
에밀은 내가 그에게 약을 챙겨준 날 이후로 부쩍 내게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엄마는 애들은 그러면서 크는 거라며 말했다. 막내 동생보다 더 어린 나이의 에밀이 나는 무척 귀여웠다.
막내 동생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은 동생을 두고 '귀염둥이'라고 불렀다. 친근하게 막내 동생을 부르는 이름인 귀염둥이는 동생이 성인이 되고 직장에 다니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도 유효했다. 키는 내 머리 위로 불쑥 솟아오르며 몸집도 제법 큰 동생이 내 눈에도 여전히 귀여웠다. 심지어 세상에 갓 태어난 조카를 처음으로 보고 온 날에도 나는 동생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여태 그래온 것처럼 너를 가장 귀여워해주겠다고.
그래서였을까. 에밀이 귀엽다고 느낄 때마다 괜히 막내 동생과 한 약속이 떠올라 편치 않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이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막내뿐이었는데 새롭게 등장한 귀여운 인물에 혼란스러웠다.
인터내셔널 큐트 보이. 엄마와 나는 막내 동생과 에밀을 구분 지을 애칭을 생각해 냈다. 인터내셔널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귀염둥이보다 더 큰 무대에서 귀여움을 뽐낼 것 같은 이름이지만, 정말 '더' 귀여운 쪽은 어쩐지 귀염'둥이'에게 돌아갈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한국에서 지금도 열심히 사고 접수를 받고 불을 끄러 다닐 늠름한 귀염둥이를 생각하며 일말의 죄책감을 모두 덜어내고 에밀에게 우리가 지은 새 이름을 불렀다. 인터내셔널 큐트 보이!
브라이언과 함께 걷던 중 그가 내게 자신의 비전 보드를 보여주었다. 그 보드에는 브라이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담겨 있었다. 나는 영어로 작성된 그의 비전 보드를 보며 몇 해 전 필사를 하며 마음에 새긴 대목을 떠올렸다.
중요하다 : 소중하다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다. (…)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어느샌가 소중했던 당신이 중요한 당신으로 변해가고 있다. 조금씩 덜 소중해지면서 아주 많이 중요해지고 있다. (…) 우리는 중요한 것들의 하중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약속과 소중한 약속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중요한 약속에 몸을 기울이고 만다.
- 김소연, 『마음사전』 중에서
내게 김소연의 『마음사전』의 '중요하다'와 '소중하다'의 정의는 지금까지 '추구'하는 삶에 무게를 두며 살아온 나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서, 꼭 참석해야 하는 미팅이 있어서, 피할 수 없는 회식 자리가 있어서… 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소중함을 나중으로 미룰 구실을 만들었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중요한 것에 몸을 기울이며 살다가 아차,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서야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소중한 것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으므로.
여태 내가 접한 비전 보드는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대게 우러러보도록 위를 향하게 설정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지만, 브라이언의 비전 보드는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도록 시선을 달리하고 있었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인용해 말하자면, 중요한 것보다 소중한 것들이 채워져 있었다. 퇴근 후 가족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가까운 이들과 인생의 중대사를 잊지 않고 기념하고, 바쁜 와중에도 곁을 내준 이의 안부를 묻는 노력까지……. 보통 이것들은 일상의 중요한 것들을 챙기느라 좀처럼 지키기 어려운 소중한 것이라는 결을 함께 하고 있다.
소중한 것은 옆을 향하기도 하지만 내면으로 에너지의 방향을 돌리기도 한다. 여기에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는 과정이 따라온다.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소중한 것을 알아차리며 나의 선택에 확신을 갖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를 몰아붙이며 잘 해내야 한다고 채찍질을 하지만, 소중한 것은 다정하게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나를 보살펴준다. 더불어 무엇을 추구할 것인지 묻기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묻는 것에 가깝다. 어떻게는 한 번 달성하고 나면 목표를 재설정해야 하는 무엇과 다르다. 어떻게는 삶을 대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가꿀 수 있게 도와준다. 이것이 바로 소중한 것이 지닌 태도이다.
"은영, 사람들은 저마다 꿈을 품고 있잖아. 그리고 그 꿈을 향해 가고 싶어 하고. 그런데 가끔은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그 꿈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중요한 것 대신 소중한 것으로 자신의 비전 보드를 채운 브라이언이 이미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브라이언, 나는 이렇게 생각해.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미 그 꿈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음… 그러니까, 꿈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거야."
브라이언의 눈이 환하게 반짝거렸다.
"맞아. 꿈은 우리 안에 있어."
사아군에서 엘 부르고 라네로까지 쭉 함께 걷던 브라이언과 에밀과 헤어질 시간이 찾아왔다. 엄마와 나의 목적지인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다 같이 점심 식사를 한 우리는 배낭을 고쳐 메고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 브라이언과 에밀은 더 멀리 걸어갈 것이다. 이미 며칠 전부터 매일같이 이별을 고한 사이임에도 허전함이 맴돌았다.
"이래놓고 내일 또 길에서 만나는 거 아니야?"
엄마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에밀이 말했다. 작별 인사와 재회를 계속 반복했던 우리였다. 그때마다 내심 반가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부디 이제는 그런 일이 없길 바라야 했다. 에밀이 더는 아프지 않기를, 그들이 원하는 때에 맞춰 피스떼라까지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앞세워야 했으니까.
"아스따 루에고!"
대신 나는 브라이언과 에밀을 향해 나중에 보자는 작별 인사를 했다. 어쩌면 며칠의 시간차를 두고 엄마와 내가 도착할 산띠아고에서 그들을 다시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피스떼라에서 다시 산띠아고로 돌아올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은 그때 산띠아고에서 맥주 한 잔을 하자고 했다. 그래, 그때 우리 꼭 만나자. 나는 그들을 뒤로한 채 엄마와 알베르게를 향해 걸어갔다.
엄마와 알베르게에서 라면을 세 봉지를 함께 끓여 먹고서 산책 길에 나섰다. 오스삐딸레로가 이 마을에 김치를 파는 슈퍼마켓이 있다며 일러준 덕에 사 먹은 김치맛에 반한 우리는 배낭에 김치를 쟁여둘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김치를 사러 처음 방문한 슈퍼마켓은 생각보다 훨씬 작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 김치가 있다고? 천천히 가게를 살펴보던 내게 주인이 다가와 살라미를 건넸다. 이제 보니 가게 손님들이 모두 하나같이 한 손에 살라미를 들고서 먹는 중이었다. 일종의 웰컴 푸드인 셈이었다. 나는 비건이라 먹을 수 없다고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나는 다시 진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말 김치가 있었다. 같은 선반에 라면과 스낵 등 갖가지 한국 식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캔 김치에 손을 뻗는 순간, 가게 주인이 다시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주인은 내게 갓 튀긴 감자튀김을 내밀며 이건 어떻냐고 물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친절하시다니!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감자튀김을 모조리 다 해치워버렸다.
엄마도 함께 가면 좋았겠다고 신남 반, 아쉬움 반으로 엄마에게 라면을 먹는 내내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매콤하게 푹 익은 김치가 마음에 쏙 든 엄마는 내가 그 가게에서 서비스로 받아온 대나무 젓가락으로 라면을 먹으면서 이따 산책 삼아 가게에 다시 가보자고 했다. 장을 보는 건 내게 맡기고 좀처럼 알베르게 밖으로 나오지 않는 엄마를 움직이게 한 놀라운 김치 맛이었다.
슈퍼마켓에 다시 찾은 날 알아본 주인은 한국에서 왔냐며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한국인 친구에게 배운 말이 있다며 상기된 미소로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행복하세요."
나는 곧바로 감사합니다, 하고 답했다. 그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 답이었다. 이에 주인은 천만에요,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들은 내가 김치를 샀던 선반을 가리키며 한국인 친구가 어떤 것들을 갖다 두면 좋을지 알려줬다고 했다. 친구 이름을 따서 '정민의 선반(Shelf)'라고 부른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정민의 선반에서 김치를 하나 꺼내 계산대로 가져왔다. 그리고 주인의 도움으로 동물성 식품이 첨가되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엄마와 나 수에 맞게 골랐다. 아차, 내일 아침도 챙겨야지. 주인 뒤편에 있던 바나나를 가리키며 '도스, 뽀르 파보르'(Dos, Por favor, '숫자 2' 그리고 'Please'에 해당하는 스페인어)라고 말했다. 주인은 아까처럼 우리에게 대나무 젓가락을 서비스로 챙겨주었다. 이번에는 인원수에 맞게 두 매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우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 레몬향이 가득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엄마는 말했다. 평소 한국에선 라면도 아이스크림도 잘 안 먹는데 여기선 챙겨 먹고 다닌다고. 맞는 말이었다. 엄마가 라면이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까미노에서는 하나 반 봉지만큼 라면을 먹고 후식으로는 꼭 아이스크림을 떠올리는 엄마였다. 평소와 다른 음식으로 배를 채운 엄마와 엘 부르고 라네로를 활보했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바람이 길게 불어오는 테라스에 우비를 깔았다. 엄마와 나는 그 위에 신발을 벗고 올라갔다. 나는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일기를 썼고 엄마는 옆에서 내가 여행을 시작하며 챙겨준 노트를 꺼냈다.
"아까 애들한테 네가 한 인사말이 뭐지?"
엄마가 말한 애들은 브라이언과 에밀이었다. 엄마는 아스따 루에고를 시작으로 스페인어의 인사말을 노트에 내가 불러주는 대로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든 친구를 멀리 보낸 날이었다. 아래층에서 어느 순례자가 연주하는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를 지나다니며 우리에게 인사하는 순례자들은 최근 며칠간 새로 얼굴을 익힌 이들이었다. 앞으로는 조금 다른 까미노를 걷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마치 오늘 내가 첫 번째 까미노와 다른 길을 걸어온 것처럼.
사아군에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까지 구간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엘 부르고 라네로 루트이고 다른 하나는 깔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 루트이다. 나는 지난 까미노에서 더 길고 편의시설이 부족한 깔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 루트를 걸었다. 이번에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엘 부르고 라네로 루트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웬만하면 엄마와 걷는 길은 되도록 쉬운 길이여야 하니까. 나 역시 새로운 경험은 환영이었다. 이미 한 번 선택을 내렸던 갈림길 위에 다시 서서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일은 좀처럼 오지 않는 특별한 기회이니까.
"네가 아침마다 사람들한테 하는 인사는?"
"아, 그건 부에노스 디아스."
새롭게 마주한 갈림길에서 나는 엄마와 함께 있었다.
Day 18. JUN 27, 2024
Sahagún → El Burgo Ranero, 18.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