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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22. 2024

길 위의 이웃

Day 19. 엘 부르고 라네로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엘 부르고 라네로


"네 엄마랑 같이 사진 찍어줄까?"


캐나다에서 온 순례자 클리 아저씨였다. 엄마와 내가 엘 부르고 라네로에 떠오른 태양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 주는 걸 보며 아저씨가 다가오며 물은 것이었다. 우리는 그와 깔사디야 데 라 꾸에사의 알베르게에서 처음 만났다. 17km의 강행군 끝에 수영장이 딸린 알베르게로 몰려든 순례자들 사이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줄을 서고 있을 때였다. 앞에 서 있던 클리 아저씨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은영이니?"


분명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얼떨떨해하던 중, 그의 옆에 있던 모니카가 나를 돌아보며 킥킥 거리는 바람에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브라이언에게 네 모녀 얘기를 들었단다. 반갑구나."


아, 역시 브라이언이었구나.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모니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침에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제 알겠지?"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맞이한 일출




"은영, 까미노에서 어떤 순간이 제일 인상 깊었니? 혹은 인사이트를 얻은 게 있니?"


엘 부르고 라네로를 이제 막 떠나는 길에서 클리 아저씨가 물었다. 까미노에 온 이유 중 하나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라고 꼽던 아저씨다운 질문이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다시 집을 떠올렸다.


"음… 처음 까미노를 찾았을 때는 집을 떠나와 이곳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집으로 가는 여정이었다는 걸 알았어요. 이번에는 엄마라는 집과 함께 걷는 기분이에요.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아요. 정말 이 여정이 제게 그걸 가르쳐 주려는 건지 말이죠. 그래서 계속 걸어가는 중이에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닿으면 진정으로 제가 찾고 싶었던 집의 의미를 깨닫길 바라요. 그러니, 아직 아저씨에게 전해줄 답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산띠아고에 가는 날이 무척 기다려지겠구나. 그나저나 그때는 왜 집을 떠나고 싶었니?"


"자유로워지고 싶었어요. 스스로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까미노뿐만이 아니에요. 저는 줄곧 자유를 찾아 떠나곤 했어요. 한국만 벗어나면 나를 설명하는데 이름 말고는 필요한 게 없더라고요. 한국에 있으면 성별, 나이, 가정에서 자리한 위치, 출신 학교, 다니고 있는 직장이 따라다니며 제 역할이 규정되고 제가 해야 하는 행동을 관계를 맺기 전부터 요구받게 돼요. 하지만, 여행 중에는 여행자라는 신분 외에 필요한 게 없잖아요? 저는 그냥 은영인 채로 존재하는 거죠. 다시 말하자면, 나를 아무것도 아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여행이라서 좋아하고 사랑해요. 스스로 비겁하다는 것도 알아요. 여행을 이런 이유로 좋아한다는 게. 그런데 제게는 그만큼 자유가 중요해요."


걸어야 볼 수 있는 길 위의 작은 생명들

"자유가 중요하다는 네 말에 동의한단다. 나도 자유가 몹시 중요한 사람이거든. 조심스럽다만, 내가 생각하건대 네가 사는 사회는 좀 더 전형적인 역할이 요구되는 곳인 것 같구나. 물론 나는 한국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틀렸을 수도 있어.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거라면 반드시 바로 잡아주렴. 내가 사는 곳은 삶의 모습이 다양하다 보니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존중받는 편이란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는 삶을 살고 있지. 그렇다 보니 언제든 원하는 걸 할 수 있지. 내가 지금 까미노에 있는 것처럼. 물론 이게 꼭 네가 말하는 자유의 답이 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야. 나로서 존재하는 삶을 이런 방식으로 찾은 셈이지. 나는 그저 클리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나는 네가 그저 은영으로 살고 싶다는 그 말이 반갑구나. 이미 그 방향으로 삶을 굴려가고 있으니 네가 말하는 자유를 닿게 될 거라고 믿는다."




짧은 거리를 걸어 도착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서 지난 여정 동안 보아온 많은 순례자들과 재회를 했다. 


"앞서 가실 줄 알았는데 왜 다시 적게 걸으시는 거예요?"


한국인 순례자 김이 건넨 질문이었다. 우리는 순례를 시작한 첫날부터 보아온 사이이다. 김은 엄마와 내가 32.5km를 걸어 멀리 떠난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로 보기 어려울 거라고 김이 생각한 것과 다르게 엄마와 나는 그 이후로 이곳까지 매일 20km 내외의 짧은 호흡으로 걸은 터라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어쩐지 답을 하기가 난처했다. 그저 그때는 그만큼 걷고 싶었고 이번엔 이만큼 걷고 싶었다는 게 이유였다. 그냥 그렇게 답하면 될 것을, 왠지 모르게 한국인과 대화를 섞으면 상대방이 납득할만한 이유로 잘 포장해 답을 해줘야 할 것은 의무감이 들었다. 김이 그런 이유를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아둔한 불안감 마저 나를 장악했다. 결국 그에게 전하는 답에는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서 멈추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빠뜨리고 말았다.


저녁이 되자 나는 식사를 예약해 둔 어느 호텔에 엄마와 함께 방문했다. 그 호텔은 지난 까미노에서 머물다 간 곳이었다. 알베르게가 아닌 호텔이라 평소와 다르게 돈을 제법 써야 했지만 전체 일정의 반을 지났을 무렵이니 이 정도 사치는 괜찮지 않냐며 들어섰다. 좋은 침대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호텔을 떠나려던 찰나, 세뇰 하비에르는 내게 두 개의 돌을 건네주었다. 며칠 후 내가 걸어서 닿을 철 십자가에 놓아둘 돌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폰세바돈을 지나 도착하는 철 십자가는 순례자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올려놓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세세한 정보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순례를 떠난 나는 하비에르 덕분에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내게 색이 다른 두 개를 돌을 손에 올려주며 말했다. 흰색 돌은 철 십자가에 올려놓고, 파란색 돌은 한국으로 가져가 이 호텔을 기억해 달라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며 줄곧 이 호텔을 추억했다.


저녁 식사를 예약하러 갔을 때, 나는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스마트폰 화면의 하비에르가 찍힌 사진을 리셉션에 보여주며 그의 행방을 물었다. 세뇨라는 바에 있던 또 다른 세뇰을 부르더니 내가 들고 있던 사진을 보라고 일러주었다. 세뇰은 자신의 동공 크기 만한 안경을 코에 걸쳐 쓰고는 유심히 살펴보더니 나를 호텔의 정원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한 어르신께서 아내로 보이는 분과 함께 와인을 한 잔 들고 계셨다. 세뇰은 어르신을 가리키며 그가 하비에르의 형제 호세라고 알려주었다. 호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며 말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그의 동작이 왠지 버거워 보였다.


"하비에르는 이제 여기에 없어요. 이 호텔을 떠난 지 몇 년 됐답니다."


나는 그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여기에 없다는 게 무슨 말이지? 하비에르는 그 당시에도 제법 나이가 있는 편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굳어 있던 내게 호세는 하비에르가 여전히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아휴, 놀래라. 나는 정말 그가 영영 이곳을 떠났다는 말인 줄 알았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가 12년 전에 이곳을 왔을 때, 하비에르에게 환대를 받았어요. 정말 많이 챙겨주셨거든요. 그 기억을 따라 여기까지 왔어요. 그에게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리고 정말 감사했다는 말도 함께요."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 자리한 호텔 (좌) 2013년 1월에 만난 하비에르, (우) 이제는 그가 없는 2024년 6월


이제는 비건 메뉴로도 식사가 가능한 이곳에서 엄마와 그야말로 만찬을 즐겼다. 12년 전에 내게 따스한 쉴 곳을 내준 이곳에서 이번에는 손꼽는 저녁 식사를 하게 된 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떠나는 우리에게 호텔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부엔 까미노로 인사를 건넸다. 다정한 배웅으로 내게 인사하던 하비에르의 모습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그는 떠나고 없어도 순례자를 향한 정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끔은 나 자신도 내가 지난 여정을 왜 이토록 쫓아다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저 잘 찾아왔다며 말을 건네는 흔적은 '왜'라며 마땅히 답이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질문을 무장해제 해버리고 만다. 그 까닭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며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라고 말이다. 12년 전의 추억에 괜히 눈물이 나도 이제는 그 울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 흐르는 에스라 강

"어머, 꼭 얘네를 만나러 온 것 같다."


엄마와 함께 클리 아저씨가 알려준 마을의 강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엄마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청춘을 즐기고 있던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 프란체스카, 페데리카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지미를 만났다. 그들도 클리 아저씨를 만났던 깔사디야 데 라 꾸에사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노곤한 발을 깨워주려고 찾은 강이었는데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엄마가 반갑게 말한 것이었다.


"이따가 자정이 되면 레온으로 출발할 거야."


낮에 만났을 때에도 그들은 더워서 더는 못 걷겠으니 이따 해가 떨어지면 다시 걸어야겠다고 말을 했었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다니! 해맑은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그들을 보며 엄마와 나는 걱정하던 마음을 살짝 내려놓았다. 엄마는 그들에게 '인조이!'(Enjoy)라고 말하며 격려했고 그 말에 지미는 빰쁠로나에서 만난 이름 모를 한국인 순례자에게 배운 '감사합니다'로 답을 했다. 그에 엄마는 한 술 더 떠서 '사랑해요'로 응답했고 나는 그것이 'I love you'라는 뜻이라며 알려주었다.


강에서 마을 중심으로 돌아오는 길, 벨기에에서 온 까리나를 만났다. 그는 친구 린다와 함께 걷는 순례자이다.

까리나는 엄마가 까미노를 좋아하시는지 물었다. 나는 요새 엄마가 스페인어 인사말을 익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여행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까리나는 샘터에서 물을 받고서 돌아오는 엄마를 향해 스페인어로 밤 인사를 건넸다. 엄마는 까리나의 말을 그대로 베껴가며 인사를 했다.


"부에나스 노체스!"(Buenas noches, 'Good night'에 해당하는 '좋은 밤'의 스페인어)


이번에는 산책길에 만난 클리 아저씨가 엄마와 대화를 하고 싶다며 우리를 불러 세웠다. 내게 아침에 했던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까미노에서 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스페인을 피부로 느끼게 돼서 좋다고 말이다. 말로만 듣던 백야를 직접 보고 이게 백야구나,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들에 자라는 밀을 관찰하고 철에 맞춰 자라는 열매를 먹어보고 물기 없는 여름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이곳이 스페인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엄마는 같은 질문을 낮에 김에게도 받았었다. 그러나 선뜻 그의 질문에 답을 떠올리지 못했던 엄마는 내심 아쉬웠는지 계속해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간 사이 혼자 알베르게에 머물며 생각하고, 함께 저녁을 먹고 강가에 발을 담그며 놀면서도 그 질문을 계속 곱씹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줄 사람을. 나는 엄마의 그런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인 양 물어봐준 클리 아저씨에게 감사했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며 엄마가 말했다. 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이젠 제법 이웃 같다고. 길만 나서면 다 아는 얼굴이라 친근하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셈이네. 이웃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아주 적절했다. 앞뒤로 함께 걷는 순례자들을 이웃으로 여기며 걸을 수 있는 길이 바로 까미노이다. 



Day 19. JUN 28, 2024

El Burgo Ranero → Mansilla de las Mulas, 18.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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