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불명의 마음
10년 만에 만나서 이런 걸 물어보는 건 실례일 테지만 그래도 꼭 물어봐야겠습니다.
혹시, 남자를 좋아하시나요?
라고 했을 때 블루는 그런 오해를 자주 받지만 자신은 남자를 싫어하며, 여자를 정말 좋아한다고 힘주어 말했어요. 나는 하하, 그랬구나. 하고 뒤에 남겨진 말들을 묵음 처리했습니다. 그리하여 제가 3년 간 짝사랑했던 사람은 게이가 아니었다는 게 10년 만에 밝혀졌습니다. 그 얘기를 하고 바로 이어서 블루가 최근에 아는 동생에게 영문도 모르는 채 사과를 받았다며, 그 동생이 2년 동안 자신을 게이라 착각하고 있었다며 미안하다 했더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저는 웃어야 할지 진지하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날씨 좋은 여름 오후라서 우리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걷고 있었는데, 마침 고개를 딱 드니 해가 질 무렵이라 보라색과 오렌지색이 뒤섞여 칵테일처럼 층층이 쌓인 하늘의 색이 황홀하게 예쁜 데다 바람도 적당히 불어 저는 어, 하늘 봐요. 하고 화제를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스물한 살 때 저보다 세 살 많은 블루를 만났어요. 스물네 살의 블루는 전역 후 학교로 방금 막 돌아온 복학생이었고, 키가 크고 피부가 새하얗고 테가 없는 안경을 썼습니다. 검정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늘 같은 백팩. 학교-집-도서관을 드나드는 흐트러짐 없는 일상. 저는 블루의 그런 점들을 좋아했어요. 그 일상에 나를 슬쩍 끼워 넣어주길 바라며 대학생활 내내 쫓아다니다시피 블루 곁을 맴돌았습니다. 공강 시간에 학생식당으로 혼자 걸어가는 블루를 따라 식당으로 들어가 아무렇지 않게 블루의 앞자리에 식판을 내려놓으며 말을 걸었고, 다 먹고 난 후에 도서관으로 들어가려는 블루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아메리카노 마시자며 카페에 데려갔고, 주말에 만나자며 답장할 때까지 메시지를 보내며 귀찮게 굴기도 했습니다. 블루는 그런 저에게 정색을 하지도, 환대를 하지도 않고 다만 어. 또 너니. 하는 반응이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체념한 듯 내버려 두었습니다. 몇 년이나 그렇게 행동을 하니 아마 저에게 적응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일 년에 한 번씩 블루에게 고백을 했지만 우리 사이는 연애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블루가 게이였으면 했어요. 뭐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wish you were gay. 빌리아이리쉬의 짝사랑은 게이였다는데, 블루는 게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때의 내 고백을 거절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았어요. 뭐, 내가 별로였나보죠. 대신 오랜만에 만난 블루에게 저는 좋아하는 것들을 물었습니다. 10년 전에 블루가 좋아하던 책, 뉴스, 경영철학서, 프랭클린 다이어리 등을 지금도 좋아하는지 궁금했고 블루는 한참 뜸을 들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어요.
저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해요. 그래서 밤에만 등산을 하고, 새벽 네시에만 조깅을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닙니다. 뭐,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좋아하는 게 없어요. 취미도 없습니다. 인생에서 이루고픈 목표나 욕구도 없습니다. 대학 때는 지적 유희를 즐겼죠. 지금은 안 그래요. 뭔가를 보면서 깊게 생각하는 시즌은 한참 전에 끝났어요 제 인생에서.
당신이 인생을 얼마나 살았다고 벌써 뭔가가 끝났다고 단정 짓는 거냐고 추궁하는 대신 저는 블루에게 지금의 삶에 만족하냐 물었고, 블루 씨는 대단히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불만은 없다고. 변화해볼 생각도 있지만 이렇다 할 계기나 확고한 의지는 없어서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본인도 그러하지만 저 또한 예전 모습 그대로라 말하며 블루는 플라스틱 컵을 들고 남아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전부 마셨어요. 컵을 쥔 블루의 손은 예뻤습니다. 전 오래전부터 하얗고 가늘고 긴 블루의 손을 좋아했어요. 우리는 그렇게 잠시 커피빈 의자에 마주 앉아 10년 전 대학시절로 돌아갔습니다.
블루를 보며 10년 전의 내가 어땠는지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만하고 겁이 없으며 막무가내였을 거예요. 블루는 어른스럽고 소신이 뚜렷한 사람이기에 멋대로 행동하는 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하며 옆에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가능했고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블루를 저는 지금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다르기에 블루를 좋아하는 마음의 형태도 그때 하고는 다릅니다. 지금의 마음은, 블루가 본인이 바라는 대로 새로운 뭔가를 찾아서 그것을 실컷 누리며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길 바라는 축복과 응원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10년 전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아요.
해가 진 후 랜턴을 들고 아차산에 오르는 건 블루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래요. 야간산행 장비를 갖추고 밤하늘을 가득 채운 달을 눈에 담고는 열심히 산을 올라 정상에서 야경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댔어요. 그날 블루가 '좋아한다'라고 말한 유일한 게 바로 야간산행이었죠. 2년 전 겨울에 저도 밤에 아차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정상에서 바라본 잠실 시내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올 가을이 지나기 전에 그 불빛을 만나러 다시 아차산에 가볼까 합니다. 깜빡깜빡. 이따금씩 서글프게 반짝거리며 흔들리던 서울의 밤. 고요하게 슬픔을 안아주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