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불명의 편지
마음이 아플 땐 속이 타는 듯 해. 손으로 속을 만질 수 있다면 금방이라도 데일 것 같지. 얼음물을 마셔도 뱃속에서 액체가 뜨뜻미지근하게 퍼지는 게 느껴진달까. 그 뜨거움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식어. 하지만 후유증이 남는게 문제야. 바싹 타버린 마음에 나풀나풀 흩날리는 잿가루 때문에 재채기가 나거든. 기침을 바닥까지 토해내고 나면 그때부터는 견딜 수 없이 공허한 거야. 그럴 때 나는 공허한 마음을 뭘로 채워야 할지 몰라서 눈에 보이는 대로 여러 물건들을 잔뜩 사들이곤 했어. 그때 사들이는 건 대부분 쓸모없는 것들이었지. 얼마 전에도 그랬어. 3일 동안 50만 원을 썼는데 정작 산 것 중에 기억에 남는게 하나도 없는 거야. 옷이며 화장품이며 주방용품이며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을 인터넷이랑 매장에서 보이는 대로 장바구니에 담았어. 그러다 하루는 택배 상자 뜯는 게 귀찮아서 상자채로 세 개를 겹겹이 며칠 씩이나 쌓아두기도 했어. 그리고 또, 향수를 샀어. 백화점에서. 근데 너무 섣불리 사는 바람에 향수는 발향 컨디션에 따라 향이 완전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망각했지 뭐야. 백화점이 너무 추워서 내가 산 향수가 겨울용으로 출시된 향수였다는 것도 몰랐어. 밖에서 써보니까 향이 뭐랄까 좋은 말로는... 포근하더라. 요즘 날씨는 폭염이고 말야. 새로 산 향수 용량은 100ml야. 써도 써도 줄지 않을 것만 같아. 게다가 인터넷으로 샀다면 4만 원이나 싸게 살 수 있었어. 충동구매한 주제에 그다지 자주 쓸 것 같지도 않으니, 아무래도 이 또한 실패한 소비일 테지.
6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 백화점 1층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45만 원짜리 머플러를 샀지. 디자인도 색상도 딱 건반에 먼지 쌓이지 말라고 올려놓는 피아노 덮개같이 생긴 머플러였어. 그딴 걸 왜 45만 원이나 주고 샀냐고? 바로 '그딴 거'였기 때문이야. 나, 백화점에서 45만 원에 파는 피아노 덮개같이 생긴 우스꽝스러운 머플러를 편의점에서 음료수 사듯 아무렇지도 않게 구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나 봐. 그날의 소비는 요즘 말로 시발비용이였던 것이지. 일시불로 호탕하게 시발비용을 지출한 다음날 나는 머플러를 담은 봉투를 여민 테이프가 뜯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조심 공손하게 매장에 머플러를 돌려드리고 3개월 카드 무이자 할부로 긁은 45만 원을 환불받았어. 그때 내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은 돈이었어. 한 달에 월세만 45만 원을 내고 살았으니까 말야. 근데 막상 매장에서 환불을 받고 있자니 전날 시발비용을 지출하며 느꼈던 쾌락의 세 배쯤 수치스럽더라. 그날 다신 충동구매 안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요즘도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사람 참 안 변하네. 향수를 잘못 샀던 날 나는 화장대 위 투명한 향수용기에 담긴 노르스름한 용액을 한참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어. 6년 전 머플러를 샀을 때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가 산 건 향수가 아니었지. 그럼 지난 주에 내가 백화점에서 산 건 도대체 뭐였을까.
가끔 내가 허물을 벗는 파충류가 되는 걸 상상해. 충동구매로 감정을 채우려 할수록 허물은 점점 두꺼워져. 허물이 점점 두껍고 단단해지며 몸을 바짝 조여오니 이러다 질식하거나 폐쇄공포증으로 죽어버릴 것 같지. 그런 상상을 하면 충동구매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가 있어. 고작 그런 일로 죽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야. 근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상처받은 마음을 물건 말고 다른 걸론 채울 수 있는 방법 말야. 구태여 사람으로 채우려는 바보가 되긴 싫어 물건을 샀던 건데, 사람 말고 물건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 그런 게 없다면 제발 그저 앞으로는 제발 속이 까맣게 타들어갈 만큼 마음 아픈 일은 내 인생에 그만 좀 일어났으면 해. 그러함으로써 안온히 하루하루를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나는 8년째 안고 자는 낡은 바디필로우를 꼭 끌어안고 기도했지.
미친 사람처럼 물건을 사들이는 시기가 지나면 뭘 하는 줄 알아? 비우기를 시작해. 얼마간 채웠으니 비울 때도 된 거잖아. 비울 땐 그냥 다 버려. 안 쓰는 물건, 덜 쓰는 물건, 아까워서 안 버렸지만 필요 없는 물건, 마음에 안 드는데 누구 줄까 싶어 갖고 있던 물건까지 전부. 그렇게 다 버리고 방청소도 싹 한 다음에는 다이어트를 시작해. 내 다이어트 방법은 좀 독특해. 거의 굶다시피 하거든. 하루에 두부 반모만 먹으며 2주를 버티면 7kg~8kg 정도가 빠져. 근데 이건 위험해. 길에서 휘청거리다 넘어지고, 계단을 오르다 숨이 차서 주저앉기도 하지. 아. 오해하지 마. 요즘은 안 그래. 요즘은 몸을 비울 때도 건강하게 먹고 덜 먹고 운동 열심히 해. 근데 옛날에는 정말 저랬어. 나를 괴롭히면 아픈 마음도 좀 괜찮아지곤 했거든. 아마 저건 일종의 자해행위였을 거야.
상상 속에서 나는 도마뱀이 되었어. 채우려 할 땐 허물이 두꺼워져 숨이 막혔고, 비우려 할 땐 몸이 너무 나약해져 허물을 벗을 힘이 없었지. 균형을 잃으면 허물은 나의 일부가 되어 내 생명을 갉아먹었어. 나는 뭐든지 갖고 싶었어. 내 것이 아닌 것을 갖고 싶었고, 내 것이면 더 갖기를 바랐어. 갖고 싶어 조바심을 내며 발을 동동 굴렀고, 기어이 갖지 못했을 때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괴롭히며 자책했어. 뭐든지 갖고 싶은 감정이 사람을 향할 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하였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그저 욕심이었을 뿐, 불안이었을 뿐. 이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나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을까. 채울 자신도 비울 자신도 없어 나는 언제까지나 나만 바라보고 나만 생각하며 살았을까. 때 되면 탈피해야 하는 허물이나 갖고 싶은 욕망 따위는 알지 못한 채 어쩌면 찬 피를 품고 사는 진짜 파충류처럼 살 수 있었을까.
언젠가 유품 정리사가 쓴 에세이를 읽었는데, 사람이 죽고 난 자리에 남은 물건들을 보면 평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대. 그 사람이 입던 것, 먹던 것, 자주 쓰던 지문 뭍은 물건들이 그 사람이 누군지 모두 말해준다는 거야. 나는 그걸 읽고 가능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기로 결심했어. 3년 전에 나만 보려고 쓴 일기를 내가 죽고 난 후 누군가 보는 건 싫으니까 말야. 마시던 위스키가 책상에 반쯤 남아있는데 죽어버리는 것도 어쩐지 찜찜하고. 그래서 나는 죽기 전에 다 버릴 거야. 나를 무겁게 하는 모든 걸 전부 갖다 버릴 거야. 하지만 내가 죽는 날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당장 내일은 아닐 것 같아서 난 오늘도 물건을 사. 그래도 이런 생각은 내 안에서 너를 간신히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시스템인 것 같아. 메멘토모리. 난 나의 죽음을 기억할 거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정녕 평온할 수 있을까. 활활 타오르는 마음 대신 고요한 영원의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 실은 애당초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할 때 느끼는 고통은 내가 자초해 만든 자해적 망상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물건을 사들여도 공허함 채울 길 없을 때의 나를 그저 한번 안아주는 것 만으로는 너를 영영 놓아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마음일까. 충동구매의 늪에 빠질 때, 내게 돈이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다면 난 더욱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사댔을 거야. 물론 그런다 한들 마음의 균형을 되찾을 수는 없었을 거고. 그래. 정말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날은 내가 육신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