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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m Jun 18. 2022

죽고 싶은 날의 유일한 친구였던, 게으름에게

주소불명의 편지

영화 트루먼쇼 알지? 내가 생각하는 트루먼쇼의 주제는 깨달음이야. 진실을 알기 전까지 트루먼은 행복한 사람이었어. 어느 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송출하는 라디오 채널을 우연히 듣고, 얼마 안가 하늘에서 조명이 떨어지고, 길을 걷다 우연히 죽은 아버지와 만나는 이상한 일들이 없었더라면 트루먼은 드라마의 완벽한 주인공으로 평생 행복하게 살았을걸. 아무튼 내가 그 영화를 20년 전에 봤어. 그러고서는 오랫동안 다시 보지 않았거든. 근데도 트루먼이 세트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거야. 그만큼 그 장면이 내게 큰 충격을 줬던 거지. 고등학교 때 내가 친구와 그 영화의 결말을 이야기하다 우긴 게 하나 있어. 내 주장은 이거야. 세트장 문을 열고 나가는 것 까지가 시즌 1이다. 즉, 트루먼이 문을 열고 나간 것은 제작진의 의도였다. 시즌 2는 세트장 바깥의 또 다른 세트장에서 시작되는데 시즌 1의 세트장보다 훨씬 힘들 거고, 그런데도 트루먼은 자신이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고는 덧붙였지. 바보 같은 트루먼. 그냥 세트장 안에서 살아도 좋았을 텐데. 누구도 내게 그런 결말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도 나는 그렇게 믿었어. 왠 줄 알아?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참모습이었거든.



아침에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가기 귀찮을 때가 있었어. 실은 늘 그랬지. 심한 날은 눈 안 뜨고 그대로 콱 죽어버리고 싶더라. 그런 생각을 한다고 죽어지는 것도 아니라서, 체념하고 일어나 씻고 옷을 입고 좋아하는 향수를 옷과 손목에 서너 번 뿌리고 밖으로 나왔어. 지옥철에서 구겨진 빨래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찌그러지는 한 시간 반 동안 향수 냄새는 전부 증발해버렸고, 승강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쏟아져 내린 뒤 코를 킁킁대 봤자 내 옷과 손목엔 아무런 향도 남아있지 않았지. 출구를 빠져나오면 습관처럼 역 앞에 있는 카페에 갔어. 여름에는 아아, 겨울에는 따아를 사들고 사무실에 도착해 오전 업무를 봤지. 점심을 먹고 또 여름에는 아아, 겨울에는 따아를 후식으로 마시며 퇴근시간을 기다렸어. 퇴근 후 지옥철을 버티고 집에 돌아와 눈을 감고 침대에 몸을 내던질 땐, 침대가 건물 옥상으로 변하는 상상을 했어. 그런데 누우면 일어나기가 힘들더라. 아침에도 일어나기가 힘들었는데, 밤이 되어도 그건 마찬가지였어.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때 나는 문득 헷갈리는 거지. 이건 게으름일까, 우울일까.


다음날 출근을 하려면 일곱 시에 일어나야 하니 열두 시엔 자야 하거든. 하지만 그대로 잠들기엔 뭔가 좀 허전한 거야.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채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열었어. 나 보란 듯이 추천 영상 하나가 뜨더라. 제목은 게으름을 느낄 때 꼭 봐야 하는 영상이래. 5초씩 스킵하며 1분 만에 다 봤는데 내용은 별거 없어. 우리가 다 아는 최연소 억만장자의 인터뷰야. 성공하려면 어쩌고 저쩌고. 도전 열정 긍정 어쩌고 저쩌고. 뻔한 영상인데 댓글은 왜 그리 많은지. 좀 볼까. 화물트럭을 운행하며 두 딸과 아내를 돌보는 20대 가장인데, 영상 보니까 부지런히 살면 자기도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대. 누군 수험생이래. 영상 보고 기운 내서 공부 열심히 해서 꼭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거라나. 댓글을 보니 초조해. 이럴 때가 아니라 일어나서 당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네. 근데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너무 귀찮고 졸려. 그럼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부터 자격증 준비나 해볼까 하며 눈을 감았어. 잠들면서 나는 또 헷갈리는 거지. 이건 게으름일까, 피곤함일까.


고등학교 때 나는 내가 커다란 돌덩이 같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맨날 교실 책상 맨 뒤에 엎드려 꿈쩍도 안 하고 잠만 잤거든. 얄궂은 권력관계로 애들 위에 군림하며 인신공격을 일삼는 선생들과 그것을 묵인하는 학교가 끔찍해 그런 조직에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 그 학교는 여학생들에게 단정한 복장을 강요하며 한겨울에도 패딩을 못 입게 하고 운동화도 못 신게 했어. 입고 신다 걸리면 권위에 도전한 대가로 교문에서 보란 듯 따귀를 맞았고, 그게 나였던 적도 있었지. 치마가 짧다며 드럼스틱같이 생긴 막대기로 복도를 지나는 애들 치마 끝에 막대기를 걸어 슬쩍 들추는 변태 새끼도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학교, 미투 크게 터지더라. 그럴 줄 알았어. 이왕이면 그때 누가 그 학교 좀 없애줘도 좋았을 텐데. 그때 나는 정말 억지로 살았어. 생각해봐. 가짜 인생인 줄 알면서도 나갈 용기가 없어서 세트장 안에 사는 트루먼의 인생이 어땠겠어. 매일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지만, 엄마는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았어. 그래서 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로 결심했어. 게을러지기로 한 거야. 그래서 매일 잠만 잤어.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지.


넌 다른 감정 친구들과는 달라. 외로움은 늘 혼자 다녀. 그래서 더 눈에 띄고, 숨어도 티가 나서 관리가 가능해. 후회는 항상 대놓고 나 왔다며 티를 내다 얼마간 내버려 두면 알아서 떠났지. 열등감은 조금만 다독여주면 자신감으로 변하는 재밌는 애거든. 근데 넌 달라. 내가 택해서 너를 내 삶에 끌어들였지만, 나는 한 번도 너를 진심으로 원한 적 없었어. 넌 설명할 수 없는 일들, 해결되지 않는 감정엔 '게을러서'라는 수식을 붙이며 내 탓을 하게 만들었지. 내 인생은 트루먼과는 달랐어. 가짜 인생인 걸 알아도, 세트장 출구까지 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어른이 되어 드디어 진짜 인생을 살게 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지. 아침에 집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을 때 나는 또 트루먼을 생각했어. 가짜 인생을 끝내고 세트장에서 빠져나가려면 우선 너를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내 삶에 네가 개입되지 않게끔 철저하게 방어했어. 퇴근 후엔 영어학원에 다니고, 수영을 배우고, 주말엔 약속을 빼곡하게 잡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지. 그러다 보니까 너를 내 안에서 완전히 내보내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그제야 좀 알겠더라. 난 나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어. 온전히 내 취향, 내 취미, 내 관심사를 최우선으로 하며 여러 경험을 소비했지. 그렇게 사니까 인생이 달라지더라. 너무 즐거워. 시간이 모자라. 그동안 다들 이렇게 즐겁게 살았는데, 나만 너를 친구 삼아 꾸역꾸역 견딘 건가 싶어 좀 억울하기도 했어. 회사도 그만뒀어. 출퇴근을 안 하면 게을러지기도 쉬워서, 요즘 난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돌아와서는 씻고 밥을 먹고, 두 시간 동안 일을 해. 네가 올 틈이 없도록 그렇게 하나씩 루틴을 쌓아 가다 보면 나는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 있잖아. 난 널 이길 생각이 없어. 피곤하거나 우울할 때는 그냥 쉴 거야. 네가 오든 말든 개의치 않고 내버려 둘 거야. 구태여 나의 아픔에 너의 이름을 붙이며 내 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아침에 러닝을 하면 기분이 좋아. 새벽에 달리기를 하면 햇볕을 피할 수 있어서 더 좋겠지만 아침잠이 많아 그건 어렵더라. 그래도 조금씩 기상시간을 앞당기려고 노력하고 있어. 달리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어찌나 설레는지. 뜨거운 날씨, 숨 막히는 더위, 갈증까지 모두 이겨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얼음물과 찬물 샤워가 보상으로 주어지니까. 근데, 트루먼의 쇼에 시즌2가 있었을까? 글쎄. 그게 뭐 중요한가. 설령 있었대도 트루먼은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몇 번이고 세트장을 빠져나갔을 걸. 뜨거운 날씨, 험난한 파도, 강도의 위협도 문제가 안돼. 깨달음을 수용하고 자기 발로 바깥세상에 나간 트루먼은 분명 어떤 힘든 일이건 극복하려는 노력과 함께,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오랫동안 잘 살아갔을 거야.


그래서 난 뭘 깨달았냐고?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세트장이건, 세트장 바깥이건, 아무 상관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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