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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m Jun 30. 2022

싱글몰트 위스키를 닮은 나의 그리움에게

주소불명의 편지

성인이 되어 술집에 갔을 때, 맥주 한 모금만 마셔도 두피부터 발끝까지 새빨갛게 변하는 날 보며 친구들은 몸에서 불이 나는 것 같다고 놀려대며 한편으로 나를 걱정했어.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술이 나를 마신 듯 열이 오르고 몸이 부어 아팠는데, 그 와중에도 가을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이 가장 신경 쓰였던 게 기억나. 얼음잔을 달라하고는 얼음 몇 개를 손에 쥐고서 볼에 비비며 얼굴을 식히기도 해봤어. 그렇게 해봐도 빨개진 얼굴은 집에가는 내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었지만.


그때 난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마시며 그리움과 그리움으로 인한 나약함을 잊으려 했던 것 같아. 코끝을 찌르는 맑은 소주를 투명 잔 가득 채워 입안에 쪼르륵 부어 넣으며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강한 사람 같았고, 강해지면 누구도 그리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나 혼자만으로 오롯이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데 나, 실은 지금은 소주와 맥주는 입에도 안대. 소주 맥주와의 치기 어린 승부에서 비참하게 패배했던 몇 번의 쓰디쓴 경험을 통해 마침내 난 소주와 맥주를 싫어하게 되었거든. 그럼에도 요즘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주종이 딱 하나 있어. 그건 바로, 진한 보리차 색깔의 싱글몰트 위스키. 바에 가면 꼭 얼음잔과 싱글몰트 위스키 한잔을 주문해. 맥켈란, 발베니, 글렌피딕... 몇 가지 유명한 브랜드들을 두고선 고민하다 매번 맥켈란 12년 산을 고르곤 해. 딱 한 번 맥켈란도 발베니도 글렌피딕도 없다 해서 메뉴판 보고 적절한 가격대에 아무거나 주문했다가 한 모금 삼키고 그대로 뿜을뻔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싱글몰트 위스키가 아니었어. 하얀 액체였고 냄새만 맡아도 위가 뻥 뚫릴 듯한 쓰고 비린 맛임을 단번에 알아챌 만큼 독해서, 첫 한 모금을 삼키고는 잔에 담긴 얼음이 전부 녹을 때까지 손도 대지 않았지. 학습의 힘으로 그 후론 반드시 내가 아는 유명한 브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만을 주문하게 되었고. 온더록 잔에서 얼음이 녹으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싱글몰트 위스키의 맛과 향이 좋아. 체질상 술을 못 마시는데도 싱글몰트 위스키만은 뒤끝이 없더라. 천천히 조금씩 마셔서 그런지 얼굴색도 거의 변하지 않고 말야.


내가 왜 이렇게 한참 술 얘기를 한 줄 알아? 그리움 너가 싱글몰트 위스키를 참 닮았거든. 그리움.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라며. 애가 타고 사무치는 뜨거운 마음이라며. 나는 뜨거운 마음에 얼음을 타서 조금씩 음미하는 걸 제법 즐기는 어른이 되었어. 그런 어른이 되어 참 다행이지. 생각해봐. 그런 어른이 되지 못했더라면 난 하마터면 용광로 같은 마음의 불길에 집어삼켜져 내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을걸. 아님 종이비행기에 너의 이름이 담긴 온갖 단어와 문장을 적어 날려 보내며 어딘가에 있을 내 행복을 찾아 방황하느라 현실에 발붙이지도 못하는 애어른이 되었거나. 나는 종이에 너의 이름을 적어 날려 보내는 대신, 얼음을 담은 글라스에 위스키를 부어 그리움의 농도만큼 삼키는 방법을 익혔어. 그렇게 하면 가끔 기척 없이 불쑥 나타나 나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는 너를 내 안에 전부 담아 천천히 음미할 수도 있었지. 때로 너로 인해 유난히 들뜨는 밤엔 참지 못하고 혼자서 노래를 불렀어. 한참 노래를 부르고도 내 마음에 네가 취기처럼 아련히 남을때,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또렷하게 네 이름의 발음을 혀 끝에서 굴리다 잠들고는 했었지.


얼마 전에 어떤 바에서 오랜만에 칵테일을 한잔 마셨어. 달콤한 칵테일 한잔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싱글몰트 위스키 아니고선 안 되는 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금세 새빨개지더라. 열이 올라 몸이 붓고 아픈 와중에도 가을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이 창피하고 신경 쓰여서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히려 했어. 얼굴이 빨개진 이유는 술이 잘 안 받는 체질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얼마간은 곁에 앉은 사람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얼마간은 말야.


요즘의 나는 더는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마시진 않아. 술을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아. 지금의 나는 혼자만으로도  지내고 있거든. 혼자라도 오롯이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다만 오롯이  지내고는 있어. 그래도 있잖아, 가끔은 익숙한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칠 곳이 필요해. 가끔 어디든   있지만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같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 사방이 고요한데 도망칠  하나 없는 밤엔 싱글몰트 위스키를  모금 마시고 달리기를 . 숙취가 사라지면 네가 지워질  같고, 숙취를 빨리 이겨내는 사람이 되면 강해질  있을  같아서. 강해지면 그리움 따위 쉽게 이겨내고 혼자서 오롯이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오래전 내가 바라던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과, 지금 내가 바라는 그리움의 흔적을 쉽게 지워버리는 사람  어느 쪽이  강하고  행복한 사람일까. 술을  마시지만 숙취로 괴로워하는 사람과, 술을   마시지만 숙취를 금세 이겨내는 사람  어느 쪽이  강하고  행복한 사람일까. 어느 쪽이건 결국 똑같은  아닐까. 뜨거운 마음에 얼음을 타서 조금씩 음미하는걸 즐긴다던 나의 이야기는 사실 거짓이 좀 섞여있는 게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지금은  모르겠으니,  깨고 다시 한번 생각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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