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불명의 편지
우리나라 문짝들이 철컥거리던 열쇠랑 묵직한 자물쇠를 떼네고 도어록을 달기 시작한 지 대략 20년쯤 됐지. 도어록으로 바뀌고 나선 잃어버릴 일도 없어졌다지만, 열쇠 쓸 땐 내가 하도 열쇠를 잘 잃어버리는 바람에 몇 번이고 다시 맞춰야 했어. 새로 맞춘 열쇠를 3일 만에 잃어버리고 또 열쇠 가게에 갔을 때는, 사장님이 왜 또 왔냐고 나더러 뭐라고 했다니까. 그랬던 내가 엄마에게 어떤 이야길 들은 뒤로는 한 번도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그때 엄마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니 열쇠 주운 사람, 주소 알아내면 나쁜 맘먹고 문 따고 들어와 우리 집 다 털어간다."
엄마가 뱉은 문장 중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은 '나쁜 맘먹고'와 '우리 집 다 털어간다'가 아니라, '주소 알아내면'이었어. 때는 90년대 말이었는데, 어떤 주택에 강도가 들어 일가족을 죽이고 귀중품을 훔쳐갔던 끔찍한 사건이 뉴스에 크게 났었어. 범인은 잡히기 전이었고. 뉴스에서 보니까 강도가 든 주택이 우리 집 구조랑 꼭 닮았더라고. 내가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열쇠에 불도그 인형 열쇠고리가 달려있었는데, 초등학교에서 전교에 불도그인형 열쇠고리를 매달고 있는 앤 나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열쇠를 주웠거나 내 가방에서 몰래 훔친 범인이 날 미행한 후 주소를 알아내, 몰래 우리 집 문 따고 들어와 가족들 다 죽일까 봐 벌벌 떨었다니까. 그런 일 생기는 것도 끔찍하지만, 그렇게 됐을 때 전부 나 때문일까 봐 그게 너무 무섭더라. 한동안 나는 밤마다 대문에 안전장치가 잘 걸려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을 했고, 그러고도 불안해서 방문을 잠그고 잤어. 강도 들면 경찰에 신고하려고 머리맡에 전화기를 놓아뒀고.
하여간에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내가 택한 방법이란, 열쇠를 한 곳에 보관하는 거였어. 즉, 열쇠를 들고 다니지 않기로 한 거야. 보통은 하교하는 시간에 집에 조부모님이 있어서 그게 가능했어. 그래도 혹시나 싶어 등교하기 전에 날마다 물었어. 할머니, 오늘 고스톱 치러 가요? 할아버지, 오늘 출근해요? 하고. 오늘 거시기 계모임 있는디. 오늘 시방 일하러 가야 하는디. 하고 대답하시면 난 그제야 내 방 민트색 책상의 첫 번째 서랍을 열어 열쇠를 챙겨 가방에 넣었지. 근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외출한단 말을 안 하고 외출할 때가 가끔 있었거든. 보통 동네 시장이나 슈퍼에 잠시 들른 것 뿐이라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돌아오셨단 말이야. 그런데 그 날은 말야,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아침에 어디 간단 말 안 하셨으니 금방 오시겠지. 하고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 너무 지루해서 책가방에서 국어 교과서 꺼내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거든. 근데도 안 와. 생각해봐. 요즘이랑은 달라. 그땐 게임기도 없지, 스마트폰도 없지, 어디 가있을만한데도 없지, 돈도 없어 슈퍼마켓도 못 가지, 시계도 없어서 지금이 몇 시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어린애가 얼마나 갑갑했겠어.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점점 어두워지더라. 그러자 갑자기 화가 나는 거야. 도대체 왜. 아. 무. 도. 안. 오. 냐. 고!! 소리 지르면서 대문을 쾅쾅 차며 화풀이했거든. 뭐 그래 봤자, 발만 아프지. 그러고도 한참을 기다려 하늘이 보랏빛으로 완전히 바뀌고 나서야 장 보고 오는 길에 양로원에 들러 고스톱 한판만 하려다 판이 커지는 바람에 동네 할매들 다 이겨 5관왕을 하고 득의양양해진 할머니가 등장해. 나는 화가 잔뜩 나서 왜 이제야 왔냐고, 왜 아침에 열쇠 갖고 가라는 말 안했냐고, 할머니 밉다고 막 씩씩거렸지... 근데 있잖아, 그렇게 화가 났었는데, 밖에 있을 때 집에 당장 못 들어가는 것에 격노할 땐 언제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때 느낀 괴로움의 몇 배 이상으로 집이 주는 안도감을 크게 느끼며 마음이 스르륵- 녹는 거야. 할머니가 사 온 캔디바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은하철도 999 보는데 그게 행복인 거지. 그때 내가 뭘 깨달았는고 하니, 나는 집이라는 기댈 곳이 있는 든든한 사람이라는 거였어. 누가 내쫓지만 않는다면 이 집에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어. 그런데 말이지.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그때, 물리적 소속감이 주는 편안함 사이사이에 천장으로 물 새듯 원인 모를 통증 같은 것이 막 불쾌하게 스며드는 거야.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면서 세상에 혼자 남은 듯 막연한 공포가 밀려오는데 누구에게도 그 공포에 대해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았어. 하지만 오랫동안 밖에 있어서 스트레스받았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거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느꼈던 그 막연한 공포 말인데, 그건 아마 너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 아니었을까.
계단에 앉아 가족들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울던 아이는 그로부터 15년 후 자취를 시작해. 15년 동안 나는 너의 존재를 이따금 느끼곤 했지만, 자취를 시작하고선 넌 내 삶에 더더욱 가까이 침투해 옷에 쏟은 커피 얼룩처럼 엉겨 붙었어. 그 방식이 참 묘해. 넌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 있지는 않아. 그렇다고 나를 떠나지도 않아. 항상 몇 걸음 떨어진 모퉁이 벽 뒤에 숨어 내게 들킬까 숨죽이며 흘긋흘긋 나를 훔쳐보곤 했지. 난 그런 널 내내 모른 척 해주었고. 상관없었거든. 넌 내 일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를 못했으니까. 네가 그 정도로 나와 거리를 두고 있을 땐 말이야.
혼자 사는 건 좋았어. 내가 산 가구, 내가 산 접시, 내가 산 침대커버, 내가 고른 포스터와 식물들로 집을 꾸몄지.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플레인 보드카에 레몬을 짜넣고 토닉워터를 타서 1:3 비율로 만든 칵테일을 마시며 요리를 했어. 모든 게 완벽했지. 근데 그게 딱 세 달 가더라. 세 달 후엔 어땠냐고? 한마디로, 징그럽더라. 칠평 자취방엔 온통 나뿐이고, 주변을 둘러보면 내 손때가 뭍은 물건이나 내 손길이 닿지 않아 오염된 물건들 뿐인 게 말야. 통풍의 반대말이 뭔 줄 알아? 밀폐? 폐쇄? 정답은 곰팡이야. 집주인 아저씨는 분명 통풍이 잘되는 방이라 했는데, 그 조그만 방에서 자꾸 곰팡이가 피었어. 화장실에서, 벽면에서, 냉장고 야채칸에서. 매번 쓸고 닦고 어지르는데, 그게 전부 나야. 내 방에 나밖에 없는데 내가 너무 많아서 숨이 막히고 그래서 내가 너무 지긋지긋했어. 자취방에서 가장 행복할 땐 그 방을 벗어날 때였어. 근데 돈을 아껴야 하니 외출도 자주 할 수가 없는 거야. 자취 시작하고 2년이 지났는데, 월급 받은 걸로 월세랑 생활비를 내고 가끔 비싼 소모품을 할부로 지르는 와중에 남는 돈은 학자금 대출을 갚는 데 털어 넣다 보니 2년 동안 돈을 한 푼도 모으지를 못했어. 월급은 고작 200만 원밖에 안되는 데다 별 볼일 없는 회사라 앞으로도 월급이 크게 오르길 기대할 수는 없었어. 그럼 나는 언제 돈을 모아서 차를 사고 집을 사냐고. 결혼은 할 수 있을까? 당장 결혼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결혼하고 싶은데 선택권이 없어 강제 비혼이 되는 건 비참하잖아.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닌데. 더 좋은 직장에 가서 돈을 많이 벌었어야 했나. 하루 이틀 세상 탓을 하며 억지로 시간을 삼키던 중,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려고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니 내 눈앞에 네가 서있더라. 눈 씻고 다시 봐도 그건 너였어. 드디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너는 쭈뼛거리며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 너는 그래, 이때다. 하고 나타났던 거야. 그동안 벽 뒤에 서서 숨죽이며 기다렸겠지. 내 앞에 나타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타이밍을. 즉, 내가 완전히 구겨지는 순간을.
어제는 손톱깎이로 새끼발가락 측면에 붙은 굳은살을 떼내어 그걸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봤어. 한때 내 피부의 일부였던 것이 내게 고통을 주다가, 결국 강제로 떨어져 나와 폐기물 찌꺼기로 전락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통쾌하더라. 나 말이야, 얼마 전에 은행 대출을 많이 끼고 경기도에 있는 낡은 아파트를 하나 샀거든. 그래도 내 집이니 앞으로 월세방에서 사는 일은 없을 테지 싶으면서 한편으로 겁이 나는 거야. 다시 혼자 살게 되면, 그때 내가 느꼈던 그 끔찍한 기분을 또 느낄까 봐. 무표정으로 내 앞에 서있는 너를 또 만나게 될까 봐. 난 그럼 너에게 꺼지라는 말도 못 하고 그저 노려보다가 그래, 내가 졌다. 말하고 고개를 떨굴까 봐. 내 집이니 그때 하고는 또 다를까? 은행에서 받은 대출과 원금을 갚아나가는 편이 월세를 내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삶이 그때 하고 뭐가 또 많이 다를지, 얼마나 더 좋아질지는 모르겠어. 바람이 있다면, 그땐 적어도 하루하루가 떼어내야 하는 굳은살 같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늘 외로웠어. 그런데 이 말을 하기가 싫었어. 외롭다고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될까 모른 척했어. 그런데 그날, 민낯으로 내 앞에 나타난 너는 눈빛만으로 나의 모든 의지를 단숨에 꺾어버리더라. 네가 강하단 말이 아니야. 실은 그 반대야. 연약하고 여린 너를 내가 무슨 수로 상대하겠어. 고작 너 같은 걸 이긴다고 내가 행복해질 것 같지가 않았어. 오히려 널 이기고 나면, 나는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널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은 너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평범한 척하는 게 아닐까?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게 실은 너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 한때 나는 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너를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누군가에 기대어 사는 걸 기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막상 나만 가득한 공간에선 내가 숨 쉴 곳이 없더라. 무엇보다도 나밖에 없는 내 공간에서, 초췌한 몰골로 날 보던 네가 돌연 표정을 달리하여 싸늘한 눈빛으로 날 비웃으며 숨겨뒀던 본색을 드러낼까 봐 두려웠어.
그거 알아? 너의 대척점엔 아무도 없다는 거. 열등감의 대척점엔 자신감이 있지. 후회의 대척점엔 정확한 단어는 없어도 '최선 혹은 최고의 선택' 이란 표현이 있고. 근데, 외로움은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말이 없는 거야. 난 그제야 넌 역시나 너일 수밖에 없고,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거라며 너의 존재를 인정하게 됐어. 보살핌을 받지 못해 어른이 될 수 없어서 언제까지나 작고 연약한 아이로 살아갈 너를 난 이따금 다독여 주기로 결심했고 말야. 다들 그 정도로만 너를 대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는 못하나 봐. 어떤 사람들은 고작 작은 네가 오는 게 두려워 자기 자신마저 속여. 유흥주점 간판들이 내뿜는 뜨겁고 알록달록한 섬광은 외로워 죽겠다고 내지르는 비명들 같아. 너를 외면한 대가로 자기 인생의 중요한 어떤 부분을 체념한 채 살아가는 누군가의 비명 말이야. 드라마나 영화 속 신파는 어떻고? 뻔뻔하게 쏙쏙 뽑아내고 쥐어짜는 눈물들도 난 비명 같아. 코미디도 만만치 않아. 웃기기 위해 억지로, 울리기 위해 억지로 만든 어떤 것들이 그래서 난 때로 역겨워.
나의 열등감에게 난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 말해주었어. 후회에겐 꺼지라 경고했고. 근데 너에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너에게 내가 적극적으로 관심 갖지 않아도, 네가 내게 갖고 있는 관심 하나만으로 우리의 관계를 이어가기엔 충분한 것 같으니까. 내 삶의 흔적이 가장 짙게 깔릴 때면 예외 없이 네가 나타나는 걸 알아. 그래서 내 흔적의 밀도를 낮추려 해. 나는 오늘도, 모레도, 다음 주에도 사람들을 만나. 사람들 사이에 섞일 거고, 모였다가 흩어지고 새로운 집단으로 다시 모일 거야. 이 과정에서 내 삶의 체취는 옅어지고 흐려지고 난 타인과의 균형 잡힌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될 테지. 그래. 난 균형감을 기르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모였다가 흩어질 거고, 새로운 집단이 되어 다시 사람들을 모을 거야. 항상 길모퉁이 벽 뒤에 숨어서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하는 나를 훔쳐보는 너를 알고 있어. 소심하고 마음 여린 넌 곁에 있지만 낯선 모습으로 그렇게 언제까지나 나를 바라보고, 갈망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