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소불명의 마음
서른 살의 A에겐 두 아들을 둔 누나가 있었어요. 누나는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 후 우울증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는데, A는 그런 누나 대신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정성껏 돌봤어요. 나는 나보다 고작 세 살 많은데도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운 A의 모습이 좋았답니다. 공무원인 A가 받는 월급의 대부분은 가족들의 생활비와 조카들의 교육비로 나가야 했죠. 근데도 나를 만나면 늘 먼저 지갑을 열고 그날 데이트 비용을 전부 내려고 하던 A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때 명상을 한댔어요. 자기 마음속에 불구덩이 하나를 만들고, 분노와 슬픔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일렁일 때면 그것을 전부 불구덩이에 몽땅 던져 태워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얼마간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있다나. 근데 저는 그 말을 할 때의 A가 무서웠어요. 표정과 눈빛도 무서웠지만 몸에서 어떤 강한 살기가 에너지처럼 막 뿜어져 나왔거든요. 무엇보다도 저는 뜨거운 감정을 뜨거운 곳에 쏟는다면 그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A를 걱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을 A에게 솔직하게 말하지는 않았죠.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 사이에 대화가 점점 줄어들던 어느 날 A가 저보고 헤어지자고 했어요. 저는 붙잡지는 않고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 돌려줘야 할 물건들이 있는지를 헤아렸으나 다행히 아무것도 없었어요. 낮에 카페에서 만나 헤어지기로 합의한 후 A는 저에게 이제 어디로 가냐고 물었고, 저는 친구를 만날 거라고 하며 오빠는 어디에 가냐고 물었고, A는 조카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간다고 했고 저는 그 말을 듣고 속이 메쓰꺼웠고, 이 사람과 헤어지게 된 게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곧장 했습니다. A가 조카들 주려고 사는 김에 생각나서 샀다며 건네준 파이리 인형과 피카추 인형이 집에 있었는데, 저는 6개월이 지난 후 그것을 버릴 수가 있게 되었을 무렵에 사랑꾼 B를 만났습니다.
B는 사랑은 늘 함께 하는 것이라며 저에게 처음부터 사랑하였고 앞으로도 사랑하겠노라 하였습니다. 자주 연락하고 틈만 나면 저를 보러 오고 제가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늘 신경 쓰는 자상한 사람이었죠. 저는 그의 자상함이 고마웠는데 얼마 못 가 문득 저를 아이처럼 보살피는 그의 태도가 숨이 막혔어요. 네. 고마운 것과 좋은 것은 별개니까요. 근데 다른 사람들은 이런 보살핌을 고마워하고 그 또한 상대방을 보살피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거라면 나는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일까. 내 마음은 어딘가가 뒤틀리고 고장이 나서 정상적인 사랑은 할 수 없게 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충동적으로 B에게 전화를 걸어 일방적으로 우리 헤어지자 말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린 후 그날 밤부터 이상하게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분명 헤어지자고 말한 사람은 난데도 너무 슬펐고 무엇보다도 죽을 죄를 지은 것만 같았거든요. 하지만 B에게 다시 연락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일 뿐이란 생각을 어릴 적부터 늘 해왔기에 내 인생에 어떤 상황이 닥치건 연연하지 말자는 결심 또한 늘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냥 울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베개에 눈물 얼룩이 생기고 마르고 생기고 말라 속 베개까지 누렇게 바래도록 엉엉 울었습니다. 하지만 우는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아마 나는 내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야 만족하지 않을까. 라는 거였어요. 근데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참 힘든 데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어쩌다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이전까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만 만나다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려니 용기가 부족해 잘될 리 없었죠.
그 후 몇 번의 크고 작은 만남들을 겪고 나는 새삼 사람들이 참 신기하다 생각했어요. 다들 평범하게 누군가를 만나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사는 것 같았는데 실은 내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삶에는 상처로 얼룩진 대서사와 그럼에도 함께할 때 온전해지는 서로의 존재가 있었음을 저는 그제야 알았습니다. 공짜로 얻어지는 마음 따위는 세상에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내가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상대에게 필요 없는 것이라면 상대는 떠날 수도 있어요. 내가 B를 떠났듯 말이죠. 네가 배가 불렀다고, 행운을 걷어찼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미안한데 귀담아듣지 않아요. 나는 내가 잘 아니까.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나는 나를 지겨워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 된 걸까 하고요. 원래부터 이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누구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반에 반도 허용치 않기로 결심하고 요새를 쳐버린 옹졸한 내가 좀 부끄럽고 속상했어요. 내가 바라는 건 심플한데. 그저 자본주의적 인간의 쓸모를 다하지 않고도 존재 자체로 서로를 살려주고 채워주는 관계. 이런 내가 너무 이상적인 가요? 애초에 뭔가를 채워준다는 생각 자체가 상대방에게 결핍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일 테니 어찌 보면 오만일까요? 내가 그를 채워주고 있다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요? 결국 간헐적 사랑에 목말라 허기진 마음으로 함께한 시간을 곱씹고 곱씹는 불행한 관계에 대한 변명일까요?
요즘 나는 내 앞에서 너무나도 태연자약하고 평온한 유자를 내내 생각하고 유자와의 대화를 곱씹고 또 곱씹었어요. 그렇게 유자의 기분과 감정을 가늠하고 또 하더라도 나에겐 늘 유자가 부족하여, 나는 유자를 생각하며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내가 유자의 결핍을 채워 유자가 온전해지고, 내 결핍을 유자가 채워 내가 온전해짐으로써 그렇게 우리가 딱 맞는 퍼즐 조각처럼 서로를 채워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도를 하고 또 하면서요.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람의 완성 말예요. 간헐적 사랑을 주는 유자가 밉고 그렇지만 그 사랑마저 고파 허덕이는 어린아이가 된 나는 아마도 결핍중독일까요. 하지만 이것이 유자에 의한 결핍인지, 본래 내가 가진 감정의 결핍이 유자를 만나며 밑천을 드러내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변함이 없어요. A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그의 조카들이 조금 부러웠습니다. A의 조카들은 A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랄 테지만, 나는 그 사랑이 뭔지를 죽을 때까지 결코 알 수 없을 테니까요. 모두와 잘 지내는 것보다 한 사람과 깊게 잘 지내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 저는 여전히 인간관계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저 얕은 관계에서 상대방을 자유롭게 해주는 방법만을 알고 있을 뿐이라 늘 혼자가 되곤 하지만 저는 이번만큼은 유자를 정말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감정에 도취하여 마음을 마구 휘두르는 사람이 될까 봐 걱정하면서도 유자에게 나의 마음을 말하는 것을 멈추지 못합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자꾸 목이 마르고, 유자가 고파요. 그렇지만 유자의 마음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습니다. 다른 걸 먹느니 그냥 차라리 바싹 말라죽거나, 굶어 죽어버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