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um Aug 13. 2022

그레이와 치즈케이크

주소불명의 마음

그 해 겨울 그레이와 저는 양평으로 드라이브를 갔습니다. 선곡은 저의 담당이었어요. 블루투스를 연결하고는 평소 제가 운전할 때 즐겨 듣던 팝 음악 중 정수만을 딱딱 골라 정성껏 만든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습니다. 그렇게 삼십 분쯤 음악을 들으며 가던 중 그레이가 머뭇거리며 말했어요. 정말 미안한데 음악을 바꿔도 되겠냐고요. 제가 괜찮다고 하자 그레이는 곧장 자신의 폰을 차에 연결하고는 멜론 차트 TOP100을 열었고 곧 차 안 가득 브레이브걸스의 노래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저는 차 안의 분위기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지만 뭐,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치즈케이크 맛집이라는 유명한 카페에 도착해 아메리카노를 곁들여 치즈케이크를 두 조각 먹었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레이는 다시 멜론 차트 TOP100을 틀었고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라며 자기 폰을 내어주었는데 저는 어쩐지 내 플레이리스트를 다시 트는 것이 내키지 않아 그레이가 알만한 유명한 가요 중 내가 좋아하던 음악 몇 곡을 골라 틀었고 저를 집 앞까지 데려다준 그레이는 제가 내린 뒤 창문으로 잘 가라 인사하며 손 흔들고는 다시 멜론 차트 TOP100을 틀고 차를 돌려 자기 집으로 갔어요.


우리는 평범한 연인들이었습니다. 주말이면 영화나 뮤지컬을 보러 가고 드라이브를 했어요. 드라이브를 할 때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먼저 틀었고, 영화를 볼 때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골랐고, 밥을 먹을 때는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었어요. 그레이도 취향이 있었을 것이기에 함께하자며 말해보라 하였으나 그레이는 그것을 말하기보다는 나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고, 나는 그것이 고마우면서도 그레이와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날이면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레이와의 만남을 지루해하지 않으려고, 그레이 또한 나와의 만남을 지루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매번 정성껏 데이트 코스를 짰고, 그레이는 자신의 취향을 양보하고 정성껏 짠 나의 코스에 맞춰 주었으며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간 행복하였으나 그 행복은 석 달도 채 가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그레이에게 정착하고 싶은 마음도 얼마간 있었는데, 그 얼마간의 마음이 얼마나 갈지는 나도 잘 몰라서 수명을 늘리려고 나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고통과 번뇌만 가득했던 지난 사랑의 역사를 끝내고 착한 사람 곁에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는데, 그레이도 내 바람대로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였는데, 실은 그레이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었고,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레이의 본래 모습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헤어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 문득 알아버렸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연인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레이가 자신을 전혀 꾸미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레이는 머리가 너무 길어지면 잘랐고, 늘 무채색 옷을 입었으며, 휴대폰과 지갑 정도만 겨우 들어갈만한 사이즈의 까만 크로스백만을 메고 다녔어요. 자기 방 침구류와 커튼도 전부 검은색 아니면 회색이라던 그레이에게 저는 그동안 고마웠다며 마지막 선물로 회색 장갑 하나를 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레이의 미간이 아주 잠깐 살짝 구겨짐을 느끼며 저는 그레이가 실은 꾸미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대로 꾸미고 가꾸는 것을 꽤나 즐기는 사람임을 그레이와의 마지막 순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범한 연인들이었을까요. 타고난 성향과 취향을 바꾸어 자신을 희생하기엔 우리에겐 일생에 거쳐 다져온 각자의 커다란 우주가 서로 다른 물질로 꽉 채워진 채 개별로 외로이 그리고 공고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서른을 넘기고 만난 사람들의 사랑은 다 비슷한 형태일까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건 나와는 다른 그 사람의 우주로 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만 설령 용기가 있다 한들 꼭 그 우주로 가서 실체를 확인해야만 함께할 수 있는 걸까 하다가, 각자의 생긴 모습 그대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나란히 존재할 수는 없을까 하다가, 그럴 수는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내 기준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서로 다른 물질로 꽉 채워진 우주가 어떻게든 뒤엉키고 합성되어 서서히 새로운 우주로 변모하는 과정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니까. 평범한 그레이가 평범한 나의 연인으로 함께 평범하게 늙어갈 수 없었던 까닭은 그레이가 멜론 TOP100을 듣기 때문도, 무채색 옷만을 입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바라는 누군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에 지쳤기 때문임을 알게 됐을 때 나는 그레이를 사랑하는 데 실패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직감하였기에 나는 그레이가 있는 그대로의 무채색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훨훨 놓아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도

모든 만남에

후회는 하지 않으렵니다


하루키의 단편소설 일인칭 단수에는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가 없는 원을 상상하다 보면 인생의 중요한 에센스를 얻게 된다고 말하는 노인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세상에 그런 것이 어디 있겠냐만은 나는 나의 사랑이 바로 그 원과 참으로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을 지향할 때 차분하고 명료하게 보이는 세상의 실체랄까요. 사랑의 지속은 노력일지언정, 시작은 사고가 터지듯 내 인생 위로 쾅 떨어지는 예쁜 운석이 아닐는지요. 박찬욱의 영화 아가씨에서 숙희는 아가씨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 하였어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는 오랫동안 그 말을 데굴데굴 사탕처럼 달게 혀 위에서 굴려보고는 했습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를 만나버린다면 난 하릴없이 남은 삶을 수습하고 살아가야 할 일만 남아버릴 텐데 그레이는 나에게 너무나도 무해했어요. 무해한 그레이가 자기랑 똑같이 무해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진심 어린 바람을 금세 가져버렸던 나의 얄궂음이 나는 참 슬픕니다. 그레이에게는 내가 운석이었을까요. 글쎄. 난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설령 운석이었다 할지라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최선을 다해 도망치기로 하였던 것일 테고요. 그날 양평 카페의 치즈케이크는 나의 입맛에는 숨 막히게 맛있었는데, 우유를 싫어하던 그레이가 과연 치즈케이크를 좋아했을까요. 글쎄. 모르죠. 솔직히 이제는 관심도 없고요.

이전 07화 느리게 출발해도 늘 가장 먼저 도착하던, 후회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