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를 몰라서 슬픈 것이다.

알고 보면 복잡하고 예쁜 것일지도 모른다.

by Kyum


타인을 배려하되 나의 기준이 명확하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존중하지만 나의 인생을 일 순위로 두는 나라고, 생각했다. 난 자존감이 꽤나 높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성숙한 어른이 되어 보다 나은 방향을 향해 삶을 추진해, 심사숙고하며 한 단계씩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나, 때때로 허무하게 무너져 산산조각 나 버릴 때가 있다. 가령, 실체를 몰라서 슬픈 어떤 것을 만났을 때.


그러면 나는 모든 기준을 상실한다. 자존감은 밑천까지 탈탈 털리고 영혼은 북어포처럼 바싹 마른다. 재난이나 다름없는 열병을 세상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더라. 다른 표현을 찾고 싶은 나다. 하지만 달리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다. 어느 때는 감정의 파도를 타다가, 어느 때는 세상의 파도를 버티는 힘이 되어준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나는 그 감정이 퍽 무섭다. 그래서 슬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던데, 나는 왜 그게 이리 어려울까. 사실 난 속으로 평범해 보이는 그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래.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몰라. 아니, 어쩌면 그저 신중한 걸지도 몰라. 그렇게 겹겹이 누적된 내면의 문제는 방치된 채 내 자아를 형성하는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것은 내게 결함은 아니지만, 만약 누군가 이것을 결함이라 부른다면 사랑해 주자고. 누가? 내가. 적어도 'Love to myself'는 잘하는 나니까. 하지만 다치지 않기 위해 꽁꽁 싸매고 나를 보호하는 노력은 다층적이고 복잡한 데 반해 두려운 그 감정은 단순하고 공격적이었다. 결국 그 감정에 휩싸이면 미션은 하나였다. 살아남아 다시 나의 섬으로, 돌아오기.


누군가는 내가 부럽다 했다. 사랑의 열병은 십 대, 이십 대의 성장통 아니냐. 현실적인 조건에 비례해 몸도 마음도 움직이는 것이 바로 삼십 대가 아니냐고. 글쎄,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내 본성이다. 나는 굉장한 러브 파이터로 타고난 사람인 것을 어쩌란 말이야. 또한, 부러워할 일도 아니라고 본다. 환상을 가져선 안돼. 한강뷰가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서 창문을 쾅쾅 내리치며 고-오-급 양주를 퍼마시는 상상을 해선 안돼. 현실은 뒷테이블 사람과 등이 닿지 않게 바짝 당겨 앉아 플라스틱 막접시에 투박스럽게 던져져 고추장 소스와 함께 나온 5천 원짜리 노가리 한 접시에 삼키는 진로소주임을.


그 감정이 찾아올 때 나는 노래를 만들거나 글을 적으며 도망치려 했었다.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타인이 쓴 글을 읽거나 타인이 만든 노래를 듣거나 타인이 만든 영화를 봤다. 남이 만든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잊고 지낼 수가 있으니까. 이성에 관해서 만큼은 모험 없는 일상을 살자고 다짐할 땐 때로 천천히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알았다. 이렇게 살아온 탓에, 난 상호 간의 사랑에 대한 경험치가 상당히 빈약한 서른여섯이라는 걸. 맙소사.


하지만 알고 있다. 내가 언젠가 다시 그 감정에 사로잡히리란 것을. 슬픔을 등에 업고 온 작은 희망을 맞이하며, 막연한 기분으로 배가 난파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다가, 어. 이번엔 순항을 하고 있구나.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꿈같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희망에게 업혀온 슬픔을 바다에 던지고 희망만을 꼭 끌어안는 하루하루에 적응하는 날도 오리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낯선 행복이라 여기던 것을 결국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 감정에 대해 '실체를 몰라서 좋은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크라잉넛이 말했다. 사랑은 어려운 거야. 복잡하고 예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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