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꼭 갚아. 니 후배 생기면
욕쟁이 선배와 한 판 뜬 썰
방송 작가는 프리랜서고, 메인작가가 한 프로그램을 위해
연차별로 세팅하는 무리가 함께 하는 구조다.
팀마다 사람들의 집합이 바뀌다 보니
후배는 매번 다른 선배 스타일에 맞춰야 한다.
나 역시 가는 곳마다 적응하려고 애썼지만
C언니는 정말... 쉽지 않은 언니였다.
출근하자마자 맥주 한 캔 따 마시고
일본 가수 뮤비를 보며 감동받아 우는
엄청난 하이텐션에 달랑달랑 빈 가방 들고 다니는
뭐랄까.. 언닐보며 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름 눈치를 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팀의 작가는 메인 언니까지 다섯이었다.
메인. 세컨. C언니, 나, 막내
그때 하나 뿐인 후배는 남자였는데
우직한 성격의 친구였지만 (동갑이었다)
멀티가 안 되어 실수가 잦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늘 내게 돌아왔다.
얘 이러는 동안 너는 뭐 했어??로 시작해
태어나 처음 듣는 욕으로 샤워를 하고
죄송합니다..로 땅 파고 들어가는 녀석을 보는 일.
그 상태로 이 꽉 깨물고 일을 다시하다가
집에 가는 길에 우는 일도 많았다.
일은 하면 줄어드니 괜찮았는데
어려운 건 C언니와의 관계였다.
언니는 케이블 프로그램을 많이 한, 센 언니였다.
메인 언니와도, 세컨드 언니와도 잘 지내는데
왜 C언니와는 불편한가 하던 때에 일이 터졌다.
어느 날, 메인 언니가 나를 불렀다.
C가 너랑 일하기 힘들대, 잘 좀 풀어봐. 이것아.
...? 가슴이 철렁했다.
지난번은 선배가 이간질한 거라고 치자.
같은 일을 또 당하는 건 진짜 문제 있는 사람이다.
나의 문제인가 부터 확인해야했다.
나는 C언니와 잘 이야기해보겠다고 했다.
말이 그렇지. 선배 불러 말하는 게 쉽나.
기회를 엿봐도 언니는 일끝나면 바로 집에 가버려서
시간을 내 달랄 수 조차 없었다.
계속 조바심이 나던 나는 그만.
어느 날 눈을 딱 감고 질러버리고 말았다.
"언니 오늘 저랑 술 한잔 하실래요?"
언니는 미친 듯이 웃었다.
"술?? 네가 술을 마시겠다고??"
내가 거의 술을 못 마신다는 걸 알고 있던 언니는
무슨 소리하려고 그러냐며 퇴근하고 보자고 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 도아니면 모다.
회사가 있던 오피스텔 건물 옆에 오래된 호프집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기억이 희미한데
나중에 언니한테 물어봐야 될 것 같다.
몰라~? 하겠지만..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마카로니 과자에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꺼냈던 첫마디다.
"언니 저 마음에 안 드신다면서요."
놀라지마라, 두 번째 말이 더 압권이다.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데요."
마음에 안 든다니 맞춰주고는 싶다.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알려주시면 고치겠다.
고쳐보고도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때는 나가겠다.
거기까지 있는 힘을 쥐어짜내 말하고 나는 술을 벌컥 마셨다.
...
그러고 나서는 기억에 없다.
다만 언니가 기막혀하며 웃었고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선배한테 이러는 또라이가 어딨냐며
니는 애교가 없고 뻣뻣해 뭘 편하게못 시키겠다며
욕을 한참 들었던 것만 기억날 뿐 -_-
그다음 컷은 둘 다 술을 진탕 먹었고
그다음 컷은 둘이 껴안고 울었고 (언닌 왜 울었을까..)
"언니 저 미워 좀 하지 마요. 막 시키면 되자나요. 엉엉!!"
"미친 너 안 밉다고. 엉엉!"
새벽 4시 반까지 술을 마시고
둘 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비몽사몽 가게를 나온 게 어렴풋이 기억 날 뿐....
그 날 언니는 헤어지는 순간 지갑에서
만원 짜리 몇 장을 손에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지겨운 것 진짜.. 택시 타고 가!"
술꾼 C언니는 늘 헤롱 거릴 거란 나의
추측을 깨버리는 완벽주의자였다.
대본을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써냈고,
아는 자료도 희한하게 많았으며
혼자 어마어마하게 많은 일을 해결하고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가
꼼꼼하게 체크해내는 신출귀몰한 언니였다.
그리고 스타일을 맞추는 방법을 모르는 나에게 언니는
직접 맞춰 주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욕은 좀 했지만.
잔소리를 실컷 한 뒤 고쳐주었고
내가 자막을 쓰는 날이면 옆에서 잠을 잤다.
"야. 5분 쓰고 깨워."
왜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자나 싶었는데
망설이다가 언니를 깨우면.
잠결에 언니는 내가 쓴 자막을 다 뜯어고쳤다.
"야 이거 답답해서 언제 읽냐"
"다 고쳤잖아. 세 번 읽어보고 다음 5분 써."
언니는 5분씩 잘라 한 시간 분량의 자막을 다 쓸 때까지
옆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다음은 10분씩. 그다음은 15분씩.
그렇게 한 번에 쓰는 시간이 늘어나다 언젠가.
"오늘 고칠 거 없어. 나 간다." 하고 언니가 가방을 들었고
며칠 뒤 "이제 혼자 쓰고 넘겨. 보여줄 필요도 없어."
하고 퇴근해버렸다.
옆에서 자고 있는게 무서웠던 언니가
잡을 새도 없이 가버리는 게 나는 너무 서운했다.
언니는 늦은 시간 집에 갈 때면
내 손에 늘 3만 원을 쥐어주었다.
주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
택시타고 퇴근하라는 거였다.
왜 자꾸 줘요. 그만 줘요. 저 이거 택시비 하고 남아요.
하면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니 후배 생기면 후배 줘." 너는 왠지 후배 생기면
택시비 안 줄 거같이 생겼어. 하고 킥킥 웃으면서..
그 후로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언니보다 연차를 더 먹은 선배가 되었고
언니 말이 기억나는 날이면
후배에게 택시비를 주기도 밥을 사주기도 했다.
그리고 언니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한다.
선배가 그러더라. 나중에 후배한테 해 주라고.
그래서 하는거야. 너도 나중에 니 후배한테 해 줘.
지금도 언니와 가끔 만난다.
만나자마자 지겨워~ 하고 말을 시작하는 언니.
나한테 진짜 욕 더럽게 많이 했잖아요. 하고
기억나는 게 그거밖에 없다고 티격태격하지만
그럼에도. 사랑한다고
내가 제일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라고
껴안고 말해주는 언니.
돌아보면 내 곁에 오래 곁에 있는 사람 중에
한 번쯤 부딪힌 사람이 많다.
악연인 줄 알았는데, 오랜 은인인 사람.
그러니 글을 읽는 당신도 누군가와 부딪혔을 때,
악연이라고 단정짓지 않기를 바란다.
자아가 센 사람은 주변과 자주 부딪히고
그게 당신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일테니.
상처받고 힘들겠지만 버텨라.
극복해 나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