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재 May 04. 2023

방송 구성작가는 소모품이라는 말에 대하여

교체용 부품이 된 자의 숙명


작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 너 제발 대충 해. 지금부터 더 일하지 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뭘 잘못했냐 물어보면 아니라고 하니 이유는 더욱 알 수 없었다.  

이후로도 신기하게도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선배들은

늘 뭘 더 해 내라고 했지만 친한 선배들은 힘들면 도망치라고 했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몸 갈아서, 영혼걸고 일하지 마.

작가는 소모품 같은 거야.

프로그램은 계속 새로워야 하고 아이템도 사람이도 바뀌어야 해

출연자 뿐 아니라 작가도 마찬가지야

배터리가 다 되면 갈 듯이

니가 나간 자리에 누구든 다른 사람을 불러서 쓰는 거야

돈을 받으면 누구든 너의 일을 할 수 있고

간혹 니가 없어도 큰일 나지 않아

그러니 너 아니면 안 될 것 처럼 사명감 갖고 일하지마.


틀린 말이 없었다. 반박할 수 없어서 슬펐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고생하는 건가.

돈 받는 만큼 적당히 해야 하나 싶은데

그건 더 어려웠다. 그리고 나에게는 게임 속 퀘스트처럼

극한의 케이스가 계속 생겨났다.


일요일 저녁에 면접보자더니

월 인터뷰, 화 대본 쓰고 녹화 준비 수요일 녹화를 한 다거나

세 명이 돌아가며 대본쓰기로 한 프로그램에서

뛰쳐나간 작가의 회차까지 떠맡다 탈진해서

일하다 링거를 맞고 돌아와 다시 대본을 쓴다거나.


가끔은 서글펐다. 둘러보면 다 그렇게 일하지 않던데

취미도하고 여행도 가고 거짓말하고 남친이랑 놀기도 가던데

왜 난 이렇게 살고 있지...?

그나마 다행인 건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은 없었다.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하고 나면 끝난 뒤 후회는 남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보안이 중요한 복잡한 일을 급히 해야 하는데

너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고.


전화 너머의 말을 들으며 어쩌면 이 말을 들으려고 나는

그동안 괴로웠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부품이라는 선배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해마다 수 많은 작가가 쏟아져 나오고

프로그램은 사라지고 생기면서 수요도 공급도 활발하다.

그 사이에서 20년 가까이 버틴 나는 이미

꽤 연식이 있는 부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산이 끝난 클래식 카의 부품이라면

구하기 어렵고, 성능이 확실하다는 말은 듣고 싶다.


아마도 작가를 하는 내내 나는

그걸 목표로 살아내지 않을까.


그 작가 만큼 꼭 맞는 부품이 없어, 라는 말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