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주껏빛나는 May 26. 2020

출산의 순간, 그 이후

엄마가 절실한, 절실할 시간들

2020년 5월 14일 오후 1시 59분. 드디어 딸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말이나 글로는 묘사하기 힘든) 고통이 폭풍처럼 훅 왔다가 사라진 것이 벌써 몇십 번이었다. 그때마다 죽을 만큼 힘을 줘 보지만 출산의 진행은 더뎠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감각을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란 생각에 자꾸 앞이 까마득해졌다. 분만실에 들어온 의사, 조산사, 간호사들이 PT 구령을 외치듯 다 같이 숫자를 외쳐댔고 내 몸의 힘과 호흡은 그 구령을 따라가기에 너무 벅찼다. 나중에 몸이 조금 회복된 후에 나는 남편에게 이 순간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호되게 혼난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그들이 외치는 구령에 맞춰 힘을 제 때 제대로 주지 못하는 내가 마치 잘못한 학생이 된 듯한 느낌.  "아기 어깨 나와야 해요, 힘 더 주세요 산모님!!!!!! 이제 다 돼가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다급한 외침에 말 그대로 '죽을힘'을 줬더니 내 안의 무언가가 풍덩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됐어요, 산모님 고생했어요"라는 말이 조금 지난 후에 들려오던 내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그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속의 무언가가 올라왔고 나는 엉엉 울고 있었다. 몸에 온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 들어 올리기 힘든 와중, 힘겹게 가눈 고개가 앞을 더듬어 찾아간 것은 남편의 얼굴이었다. 남편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3.25kg, 49cm의 작은 생명체, 8개월 동안 너무나 보고 싶었던 아이가 내 품에 안겨졌다. 이 감정은 분명 슬픔이 아닌데, 기쁨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더 깊은 층위의 울컥함이 나를 울게 만들었다. 출산은 내가 태어난 이후 가장 짙게 느껴본 감동의 순간이자 벅찬 감정이었다.




아기는 신생아실로 옮겨졌고, 회복실에 나와 남편만이 남겨졌다.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이 순간이 꼭 꿈같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정신이 조금 차려지자 나는 아빠와 이모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고 나와 아기의 무사함을 전했다. 그 이후, 시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나의 소식을 제일 궁금해할 이들에게, 내가 소식을 제일 전하고 싶은 이들과 통화를 해서 마음의 안정감을 찾고 나자 8개월 동안 수백 번이고 시뮬레이션했던 그 감정이 찾아왔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찾기 힘들 내 감정을 남편에게 무작정 토로하지 말자고 그동안 수없이 다짐해왔었지만 오늘만은 뱉어내야 했다.

오빠, 엄마 보고 싶어


꼭 말로 꺼내고, 조금의 위로라도, 조금의 온도라도 전달받아야 이 응어리가 해결될 것 같았다. 속에서 맴돌다 터지듯 내뱉어진 말에 나는 또 울고 말았다. 평소의 남편이라면 울지 말라는 말과 함께 나를 토닥여주고 말았을 테지만, 출산의 순간에는 달랐다. 손을 꼭 잡고 토닥이더니, '어머님도 다 보시고 기뻐하고 계실 거다'라는 내 마음에 힘이 되는 위로를 해 주었다.




간이침대에 누운 남편과 불 꺼진 병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 밤의 감각은 생경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던 강도의 고통을 느끼고, 내가 언제 이런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애를 쓴 하루였다. 그래서 그런지 온 몸에 힘이 없었고, 아이가 나온 그 경로를 따라 저릿한 통증은 여전했다. 출산의 감각이 강렬했는지 놀이기구를 많이 타고 온 날 밤에 잠자리에 누웠을 때처럼 온몸이 울렁거렸다. 자려고 누워서 그 날 하루를 복기했다. 복기하는 그 순간들에 이야기를 다시 써보듯 내 마음 가는 대로 엄마를 데려와봤다. 초산이라 가진통과 진진통을 구별 못하는 내가 당장 연락한 사람은 사촌언니가 아니라 엄마였을 것이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마음이 다급해 혼자 택시를 타는 순간, 아마 엄마가 옆에 있었을 것이다. 남편밖에 병원 출입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병원 앞까지 엄마가 함께해 나를 병원에 넣어주고 근처에서 엄마는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아기를 만난 직후,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한 건 '우리 엄마'였을 것이다. "고생했다, 우리 딸 장하다"라는 엄마의 말 한마디가 절실했을 테니깐. 병실에 있는 내가 걱정돼 남편에게 자꾸 안위 전화를 하는 건 아마도 우리 아빠가 아닌 엄마였을 것이다. 이렇게 떠올려보자니, 매 순간순간 엄마가 절실했다.


앞으로도 매 순간이 이럴 것임을 안다. 몇 년 전부터 충분히 마음을 준비해왔던 일이고, 한동안 임신에 대한 마음을 접은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 이유를 넘어서 임신을 다짐하게 됐을 때, 숱하게 찾아올 서러움이나 애달픔도 다 안고 가자 생각했었다. 막상 겪은 그 순간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지나갔다. 드라마나 영화 같지 않았고, 슬픔이 기쁨을 잠식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순간, 엄마가 너무 절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몇 시간 후 마주하게 될 딸아이의 모습에 대한 궁금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아마 앞으로의 날들도 그렇지 않을까 한다. 8달 동안 내가 겪은 임신의 과정도 그랬고, 출산 이후의 일상도 그럴 것이다. 감정을 다잡지 못하는 순간들에, 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엄마 생각이 불현듯 치밀고 올라와 감정적으로 가라앉겠지만 그 순간을 무마해버릴 일상의 작은 기쁨들이 금방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엄마 생각에 눈물짓다가도, "어머님은 지니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아실걸?"이라는 실없는 위로를 해주는 남편의 말에 웃음 짓고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 TV를 보며 잠들었던 임신기간의 밤들처럼. 아빠가 우리 집 문을 열고 처음으로 나의 딸을 만나러 올 며칠 후에도 그 자리에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감정이 또 요동치겠지만, 금세 정신 못 차리고 '맘마'먹는 아기의 모습에 다 같이 한바탕 웃고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지 않을까.


항암치료가 지루하게 이어지던 그 날들에, 엄마의 바람은 단 하나였었다. 5년을 넘게 봐온 의사 선생님이 제시해 준 최선의 미래였던, '암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 작아질 일 없는 암세포를 더 이상 키우지 말고, 제발 사라지라는 마음으로 그 암세포를 저주하지도 말고 친구처럼 지내는 것.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암세포를 몸에 지닌 암환자들은 그런 마음으로 암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도 가능한 치료방도가 없어 항암치료를 그만두게 된 후에도 엄마는 주문처럼 바랬었다. 이렇게, 고통 없이 지내게만 해준다면 아무 상관없으니 내 몸 안에서 친구처럼 오래오래 지내보자고. 결국 엄마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엄마를 향한 애달픔이 나에게도 딱 저 정도이기를 바라본다. 애달픔이 깊어져 그 슬픔이 내 일상을 잠식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잊지도 않고, 늘 내 속에 간직하고 있을 테니 서운해 말기를. 엄마가 절실한, 그리고 절실할 시간들이 앞으로 수도 없이 있겠지만 내 나름의 방식으로 잘 이겨나가 볼 테니 그 애달픔들이 앞으로의 나와 딸아이의 삶에 원동력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사실 이 와중에도 나는 엄마가 뱉어냈을 한 마디를, 머릿속에서 최대한의 감각과 기억을 동원해 엄마의 목소리로 시연해본다. "우리 딸, 고생했어." 이 한마디를 원동력 삼아 앞으로의 육아를 씩씩하게 맞이하자고 다짐하고 있다.


  

이전 11화 나에게 허락될 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