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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껏빛나는 Apr 28. 2020

나에게 허락될 운

사라져 버린 내 인생 최고의 운 - 엄마빽



내가 다니는 회사는 시설 좋은 어린이집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회사다.



각종 기사에서도 여러 번 회자되었고, 아기를 둔 젊은 부부들에게는 꽤 유명해서 이 회사를 다닌다고 하면 셋에 한 명은 “너네 회사 어린이집 엄청 좋잖아!”라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에게 이 기회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교육의 질을 위해 보육교사당 원아의 수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고, 한 해에 30명 내외의 원아만이 입학할 수 있다. 물론 그 기회는 현장 추첨이라는 엄청난 확률 싸움에서 이겨야 쟁취할 수 있고, 그 운을 잡지 못한 부모들은 재직기간 내내 어린이집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일단 입소하게 되면, 나가지 않는 사우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지금의 회사로 이직하는 것이 나에게 과연 어떤 이득이 있을지 가늠하는 과정이 물론 있었다. 그 당시 구체적으로 출산 계획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언젠가 아이를 가진다면 좋은 조건이 될 거란 막연한 기대로 마음이 기울었던 건 사실이다. 어쩌면 나에게 그 낮은 확률의 운이 허락될지도 모르니.



육아가 막연한 미래가 아닌 곧 다가올 미래가 되었을 때, 회사 인트라넷에 어린이집 원아 공고가 떴었다. 모집공고를 자세히 읽어보고는 머리가 복잡해졌었다.


사내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낼 수 있는 시기가 나의 예상보다 한참 뒤인 것이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다 소진하는 시기, 만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으려나 했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회사 어린이집은 원아를 수시로 받지 않고, 매해 3월에 원아를 한꺼번에 받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나의 출산은 20년 5월, 아이가 입학할 수 있는 시기는 22년 3월.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다 소진한다고 해도 1년 2개월 정도의 시간만이 나에게 허락되는 것이고

그 이후 8-9개월 정도의 시간은 결국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 시기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복직 이후부터 아이가 어린이집에 입학할 수 있는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말 그대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순간 앞이 까마득해졌다.

물론 그 어린이집도 운이 좋아 추첨이 돼야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나마 그 운을 기대하고 출산 이후의 삶을 그려보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제동이 걸린 것이다.


가까운 주변인들 중 친정엄마든 시어머니든 ‘조부모 찬스’ 없이 어린 아기의 육아와 일을 병행하고 있는 사람을 아직은 찾지 못했다. (회사 동료 중 한 분 계시긴 하나, 첫째가 이미 초등학교에 입학한 케이스라 내 입장에선 너무나도 아득한 먼 후일을 살고 계신다. 나는 그분이 지나왔을 시간과 그분의 단단함을 이미 마음으로 존경한다.)

물론 풀타임으로 손주 손녀에게만 매달리는 조부모님들이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나, 어떤 형태로든 하루 중 ‘일정 시간’을 딸 혹은 며느리의 육아에 도움을 보태주시는 고마운 조부모님들이 다들 곁에 계셔 나의 고민에 적절한 대응을 해줄 수 있는 주변인이 없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에는 너무 주관적인 감정과 불평들이 차고 넘쳤고, 그 글들을 목도하는 대로 소화하다가는 글에 체할 것 같아 결국 검색을 멈춰버렸다. 만난 적 한 번 없는 나의 성향은 전혀 모르는 이들의 ‘시터 이모님’ 경험담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특히 그녀들이 토로한 소위 말하는 '기싸움'에 질러버렸다. 나는 연륜이 넘치는 이모님들과 초반 기싸움을 할 만큼 모질고 독한 성격이 못 된다. 해야 할 필요성도, 하고 싶단 욕심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고민을 하던 와중, 대학교 한 학번 여자 선배가 육아휴직을 끝내고 곧 복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랜만에 얼굴을 볼 겸 언니를 찾아갔었다. 복직 후 육아를 어떻게 하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아기를 전담할 이모님을 구했고 퇴근 시간이 맞물리는 저녁 몇 시간은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는 언니의 결정을 전해 들었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쩌면 실례일 수 있는 질문을 해버렸다. 아기를 봐주는 이모님의 급여는 어느 정도냐는 질문. 시급으로 11,000원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하루 8시간을 요청할 경우 88,000원. 평일 20일이라 치면 월 176만 원.

내 급여에서 빠지는 돈이라 생각하면 결코 적지 않은 돈이지만, 역으로 내가 시터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저 돈이 나에게 큰 동기를 부여하고 ‘내 아이처럼’ 아이를 봐야겠다는 책임감을 줄만한 돈인가라는 냉정한 질문에 나의 대답은 슬프게도 ‘아니오’로 기울고 있었다.


언니를 보고 온 다음 날은 엄마의 기일 전 날이라 집안 정리도 하고 장도 볼 겸 부산 친정집에 내려갔었다. 나보다 몇 시간 먼저 일찍 도착한 아빠는 빨래를 개고 있었다. 빨래를 개던 아빠가 뜬금없이 꺼낸 말은 너희 엄마가 너랑 오빠를 ‘사랑으로’ 참 잘 키웠다는 이야기였다. 평생을 아빠 자신에게는 애교 있고 다정한 아내는 아니었어도 자식들은 사랑으로 참 순하고 착하게 잘 키웠다고.

아빠가 무슨 연유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다. 타지에서 일하고 있는 아빠가 부산의 불 꺼진 집에 도착해서 집안일을 하다가 마주한 상념 끝에 그런 생각이 있었나 보다 유추할 뿐이었다.


그냥 마음 따뜻한 이야기, 혹은 기일을 앞둬 엄마 생각이 더 또렷이 나는 눈물 글썽일 이야기로 지났을 아빠의 말은 하루 전 날 알게 된 시급 11,000원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시급 11,000원에 내 아이를 '사랑으로' 대해줄 좋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의 세계로.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사랑과 시급 11,000원 노동의 질이 조금이라도 비슷해지려면 나는 어떤 노력을 더 해야만 할까.
마음 졸임 없이 기댈 수 있는 엄마라는 내 인생 최고의 운이자 빽이 사라진 상황에서 나는 어떤 운에 기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아직 명확한 답도, 현실에서 눈 앞에 잡히는 해결책도 찾지 못했다.

일단은 복직 전에 생각해보자는 마음과

좋은 시터 만나는 것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과 같은 복이자 운이니 서둘러서 준비를 하라는 누군가의 충고 사이에서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 가지 못할 지옥길은 아니라 위로도 해주지만 나는 처음 살아보는 엄마의 삶이라 마냥 걱정이 앞선다.


어쨌든 '나의 세계'에 있어서만은 전대미문이자 전인미답의 길인 것이다. 까마득한 그 길에 엄마가 함께였다면 내 마음이 이 정도로 불안하지만은 않았을 거란 생각에 괜한 청승을 떨게 되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달리 방도가 없다.


막상 육아를 시작하게 되면 작고 소중한 '나의 아기'가 내뿜는 생명력과 사랑스러움, 나를 믿고 이 세상에 온 아기라는 뭉클함, 그리고 '엄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상투적인 그 어떤 힘이 두려움을 잊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볼 뿐이다.


그리고 당장은 내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본다. 엄마가 떠난 이후, 밖에서는 마냥 밝아도 집에서는 자주 침체되고 눈물을 보이는 나를 이해하고 달랜다고 이전보다 많이 밝아진 남편.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자랑하는 좋은 시어머니의 표본인 나의 시어머니(이자 우리 엄마의 친구). 세련된 방법을 몰라도, 어떤 형태로든 나를 지지하고 위하려는 아빠. 임신 이후 부쩍 잦은 전화를 하는 오빠와, 작은 선물들로 내 마음을 기쁘게해주는 새언니. 엄마의 몫을 대신하려 고군분투하는 이모. 육아 선배로서 이것저것 아낌없이 내어주고 알려주는 사촌언니까지. 내가 어떤 고민을 이야기해도 기꺼이 들어주는 소중한 친구들. 회사에서 기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류의 공감과 이해를 보여주는 직장 상사까지.(언젠가 브런치에 글로 남길지도 모르겠다. 외손녀를 끝내 보지 못한 엄마를 가진 아픔을 나보다 먼저 겪어 정말 많은 것을 배려해주시는 고마운 존재가 놀랍게도 사무실에 존재한다.)


다 뱉어내자면 끝이 없는 고마움 투성이 속에 살면서도 '엄마'라는 최고의 빽이 없어 괜히 서러운 밤. 복에 겨운 거라고, 이미 가진 것만으로 충분한 운을 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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