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주껏빛나는 May 12. 2020

지니야 할머니야

엄마를 사무치게 하는 한 문장


5월 황금연휴, 부산에 계시는 시어머니께서 우리 집으로 올라오셔서 함께 출산 준비를 해 주기로 하셨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남편과 마지막으로 둘이 하는 여행이라며 어디로든 훌쩍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잠잠해질 줄 알았던 코로나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그 기간에 우리는 집에서 머물며 출산준비를 하기로 했다. 둘이서 지내는 생활패턴에 맞춰진 집을 신생아 키우기에 적합한 공간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아기가 집으로 왔을 때 편하게 지내기 위해 필요한 각종 '준비물'들을 갖추는 것이 이번 황금연휴 우리의 목적이었다. 산후도우미로 10년 넘게 일하신 시어머니는 일 년에 스무 가정 정도를 들락날락하시며 최신 육아템을 꿰고 계신다. 그리고 어떤 효율이 아기를 키울 때 필요한 지까지. 그래서 출산 준비에 나는 큰 부담이 없었다. 심성이 좋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님은 기꺼이 본인의 휴가를 우리에게 내어주시기로 하셨고 어머님만 믿은 채로 우리는 그저 필요한 것을 '구매'하기만 했다.


급할 것 없이 여유롭게 출산 준비를 마무리했다. 집의 배치도 바꾸고, 필요 없거나 위험한 가구와 전자기기들은 베란다로 치워버리고, 선물 받아 한 가득인 아기의 옷들과 이불까지 깨끗하게 세탁하여 준비했다. 이 모든 과정들이 수월했고, 특별할 것 없었지만 이번 연휴가 내 머릿속에 인생의 한 순간으로 남을 이유는, 연휴 첫날 나의 딸에게 '할머니'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설이 지난 이후 어머님을 처음 뵀다. 3월 아버님의 생신이 있었지만, 코로나가 불안하니 이번 생일은 그냥 지나자 하셔 거의 세 달만이었다. KTX 기차역으로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동네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수박을 한 덩이 사와 후식으로 먹으려고 거실에 앉았다. 서 있을 때보다 앉아있을 때 도드라지는 나의 배에 어머님은 손을 올리셨다. 이제, 배 안에 있는 이 생명체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니 나는 큰 용기를 내서 무려 8달 동안 한 번도 내뱉지 못했던 단어를 입으로 내뱉었다.


지니야, 할머니야.

내 입 밖으로 내뱉기가 너무 두려웠던 단어, '할머니'.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울음이 날 것 같아 차마 못 내뱉던 단어지만 조심스레 내 배에 올리신 손을 어떤 식으로든 언젠가는 나의 딸에게 소개해줘야 할 터였다. 그제야 어머님은 미소 지으며 본인도 "지니야 할머니야, 건강하게 만나자"라고 내뱉으셨다. 마음 맞는 동네 친구에서 어떻게 하다 보니 사돈이 되어버린 우리 엄마와 어머님 덕에 결혼 준비도 일사천리였고 남들은 잘 가지도 않는 양가 부모님 합동 여행도 가능했었다. 아마도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셋이서 많은 것을 함께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엄마를 잃었고, 시어머니는 남은 여생 단짝이 될 뻔했던 친구를 잃은 것이었다. 나에게 '할머니'라는 단어가 입 밖에 내기 힘든 말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 시어머니셨다. 아마도, 내가 먼저 아기에게 본인을 소개해주기 전까지 조심하고 조심하셨을 거다. 그런 마음이 감사해 내가 먼저 용기를 내기로 한 것이었다.


배가 점점 불러오는 모습을 거울로 볼 때마다, 이 모습을 제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단연 엄마이다. 엄마가 몇 번 만져주면, 밤잠 설치게 하는 불편함은 금세 잊고 너무 뿌듯하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부른 배를 쓰다듬을 때 오는 기분 좋음을 제일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좌절감은 내가 그동안 맛보지 못한 크기의 좌절감이라 당혹스럽다. 하지만 그 좌절감을 평생 안은 채로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무엇보다도 우리 엄마가 원하는 내 모습이 아닐 거다. 바꾸지도 못할 상황에 허우적대며, 소득 없는 '실망'에 빠져 있는 딸은. 게다가 그건 시어머니에게도 너무 큰 불편함이다. '친할머니'가 된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게 되는 불편함.


임신 준비를 하기 전에 스치듯 상상할 때도, 임신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도 쭉 가장 두려운 장면은 그 장면이었다. 내가 막 출산을 끝냈을 때, 시부모님과 남편과 짝 잃은 외로운 아빠가 내 눈 앞에 서 있는 병실 혹은 조리원의 모습. 다행이라 말할 순 없으나 코로나로 인해 그런 상황은 연출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어찌 됐든, 아이가 언젠가는 알고 내뱉게 될 '할머니'라는 단어는 내 일상에 아무리 촘촘히 자리 잡는다 해도 매번 내 마음을 콕콕 찌르는 그 무엇이 될 것이다. 매번 같은 자리가 찔려 언젠가 고통에 무뎌질 수는 있겠지만, 흉은 사라지지 않아 나에게 진하게 자리 잡아 있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도 모두를 위해서도 그저 그 흉을 안은 채로 일상을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에는.




내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위로 중 내 마음을 가장 잘 달래준 건 친한 직장선배의 위로였다. 그동안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도 마음 한켠에 어머니가 자리 잡아 마음이 좀 그랬을 텐데, 그동안 힘들었을 자신을 좀 놓아주고 홀가분해지라는 위로. 그게 어머니도 원하시는 네 모습일 거라는 위로였다. 그 말 덕분에 나는 조금 덜 죄책스럽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왔던 일상이 새로운 국면(임신과 출산)을 맞이하며, '엄마가 할머니가 되었어야 하는' 세계로 흘러왔다. 우리 아빠와 시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될 테고, 시어머니도 '할머니'가 되는데 어쩐지 우리 엄마만 '할머니'가 되지 못하는 이상한 세계로. 그 슬픈 괴리감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어떤 형태로 나의 아이가 본인의 '외할머니'를 알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 나는 슬퍼진다. 어떤 사진을 보여주고, 어떤 글을 보여주고, 어떤 이야기를 들려줘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외할머니'를 나의 딸이 과연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하는 슬픔. 그 슬픔을 견뎌내는 건 어쩐지 남편의 몫이 될 수 없고, 오롯이 나와 아빠의 몫인 것 같아 조금은 서운하다. 결코 남편이 해줄 수 없는 역할을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발휘하는 대신, 나중에 해야 할 나의 몫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으로 나의 서운함을 스스로 해결해보려 한다. 그 고민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해보기 위해 오늘도 타자를 두드린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애니메이션 '코코'와 한강 작가의 '희랍어시간'에 나오는 장면, 그리고 병상에서 엄마가 사위에게 건넨 생일 용돈 봉투에 써 내려간 짧은 편지 정도이다.

그 사람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으면 진정한 죽음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기억과 추억이 엄마를 붙잡는 중력이 될거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나에게 울지 말라고 여러번 타일렀었다. 내 감정이 차고 넘쳐 잊을 뻔 했지만 분명 그랬었다.
병상에서도 사위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글로 남기는 낭만을 알던, 그런 사람이 내 딸의 '외할머니'였다.



짧은 글로라도 사위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했던 마음씨 좋은 장모님, '실망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내가 우는 걸 지독하게도 싫어했던 외할머니를 나의 작은 딸도 기억하고 떠올릴 수 있게 내가 끊임없이 '소개하자'는 마음을 먹어본다. 그러기 위해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여러 문장들을 떠올려본다. 엄마를 잊히지 않게 해서, 엄마도 '외할머니'로 기억되는 사람으로 남게 하는 것이 내가 무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오늘도 여러 방식으로 엄마를 떠올리며 평온한 하루를 보내보려 한다.


(출산예정일까지 7일, 혼자서 조용히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전 09화 내리막길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