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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껏빛나는 May 05. 2020

내리막길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출산과 육아 - 새로운 시작, 내 인생 가장 큰 도전


임신 6개월이 넘어갈 때까지도 내가 먼저 굳이 말하지 않으면 나의 임신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두터운 겨울옷에 배가 가려져,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지나갈 정도였다.

임신 후기에 들어서고서는 회사에서 마주치는 같은 층 사람들이 한 마디씩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출산이 얼마나 남았냐, 몸이 힘들겠다, 휴직은 언제부터냐, 복직하면 아기는 누가 봐주시냐 등의 질문도 위로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는 말들을 쏟아냈다.

이상하게 임신 초기에 소식을 들은 이들이 보여준 감정은 ‘놀람과 축하’였는데, 배가 불러온 나를 보고 건네는 감정들은 ‘걱정 섞인 농담’이 대부분이었다. 다 모아 요약하자면, ‘이제 고생길 열렸네’ 정도의 농담들.

그나마 마지막 말들은, “겪어본 적 없는 기쁨이 기다리고 있어”인데 그 앞에는 이상하게도 ‘그래도’라는 수식어가 꼭 붙어있었다.

‘그래도’와 ‘기쁨’ 사이에서 나의 케이스는 어디에 더 가까울지 알 수 없었다.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에게 농담으로 그런 말을 했었다. ‘노잼 인생’이 되어버렸다고.

워낙 밖으로 놀러 다니고, 술자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땀 빼며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극초기에는 정말 그 모든 것을 못하게 되어 나에게 남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책 읽기와 넷플릭스뿐이었다. 그래도 생기 넘치게 반짝이는 20대 30대 초반을 보내왔다 생각했는데 임신 이후 어쩐지 그 반짝임이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내가 나로서 반짝이는 순간’들이 언제였을까’를 복기해보게 되었다.


그 순간들에는 나를 좋아하고, 알아봐 주고, 인정하는,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혹은 집중해서 나의 일을 하고 그 일의 결과물에서 오는 성취감에 내가 나 스스로를 ‘수고했다’ 여기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때 그 순간, 함께하는 사람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나의 마음과 노력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Give and Take’.

나의 시간과 노력, 나의 마음, 에너지를 내어주고 얻은 ‘내가 나로서 반짝이는 시간들’.

그 노력들은 앞으로 내가 출산과 육아에 들여야 할 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는 ‘퀵 윈(Quick Win)’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마주할 시간들은,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어쩐지 앞으로 내가 갈 길이 '내리막길' 같다는 생각.


내가 떠올린 내리막길은 두 가지 의미에서의 내리막길이었다. x축에 '시간'을 두고 y축에 '나의 반짝임'을 뒀을 때 일별로 어느 정도의 기복이야 있겠지만 먼발치서 보면 혹은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우하향'하는 내리막길.


그리고 또 하나는 산 정상에 오른 후 내려갈 일만 남은 돌아가는 길.

산을 타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등산하며 길을 오를 때 필요한 것이 행동력과 담대함, 근성이라면 내려오는 길에 제일 필요한 건 '조심성'이라는 것을.


정상에 올랐을 때 만나게 되는 탁 트인 뷰가 주는 보람과 성취, 흘린 땀에 대한 보상은 나를 살아있게 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다르다. 정점이 끝난 이후의 시간. 발을 헛디디진 않을까, 혹여나 길을 잃지는 않을까, 해가 너무 빨리 지지는 않을까 노파심과 두려움의 연속이다. 그 모든 것이 끝나고 하산했을 때 드는 감정은 성취감보다는 안도에 가깝다. 그야말로 '잘해야 본전'의 영역. 그래서 그럴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이들은 많아도, 산 아래에 발을 디딘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은 드문 것은.


출산과 육아를 하게 되면 어쩐지 '나 자신'은 뒷전이게 될 것이란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나로서 반짝이기 위한 도전과 시도를 탐하는 것은 후순위가 되어 버릴 것 같다는 생각. 엄마로서의 나와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둘 다 꾸역꾸역 유지하기 위해, 그저 넘어지지 않으려 모든 일에 '조심'하기만 하며 이 길이 맞는지 노심초사하는 '반짝임'과는 거리가 먼 내 모습이 그려졌다.


자기 계발도 게을리하지 않고, 육아도 잘하고, 일도 잘 해내는 여러 개의 자아를 때와 장소에 맞춰 스위치 온-오프 해가는 삶을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출산과 육아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시작 길부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잘 해내는 소수를 우리는 어디선가 만나고 어디선가 접하지만 어쩐지 그게 나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거란 생각과 함께.


사람이 가진 에너지는 정해져 있고, 그것을 여기에 일부, 저기에 일부 나눠 쓰다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예전만 할 리 없을 거란 생각. 그 생각은 내가 가진 에너지를 늘리는 것 말고는, 예전의 '나로서의 내'가 가지고 있는 반짝임의 정도를 유지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 결론은 또 다른 질문들로 나를 이끈다. 나는 매너리즘에 잠식되지 않고 어떻게 내가 가진 에너지를 늘려갈 수 있을까.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원동력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 결국 '자식'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 반짝임을 잃은 생각해본 적 없던 나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여러 개의 나의 모습들을 잘 만들어 나가겠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이루어질 리 만무한 내 욕심인가 하는 여러 가지 질문들.


마음에서 올라오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나 스스로 찾아보고자 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글로 써내려 가다 보면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리하고,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답을 찾게 된다. 내 속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기저가 자리 잡고 있으니깐.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지금 당장 내릴 수는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이 길이 내리막길이었는지, 어쩌면 오르막길이었는지 실체를 알 수 있을 거라. 지금 당장은 내리막길일 거라 생각되는 시작과 도전에서 다른 기쁨을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움직여보고 있다.


내가 우하향이라 생각했던 곡선의 y축에 '나의 반짝임'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축으로 삼아보자는 생각을 먼저 해본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방점을 찍을 다른 무언가는 '단단함'이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틸 수 있으니' 단단함이라는 다른 기준에서는 우상향 하는 시간으로 앞으로의 출산과 육아의 과정을 삼아보려 한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는 길에서 느낄 소소한 기쁨에 마음을 내주자는 생각을 해본다. 내리막길이 끝나고 땅에 발을 디딜 때의 안도감과, 하산 후에 먹을 맛있는 음식과,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같은 것에. 화려하고 반짝이진 않더라도 나를 지탱하는 '일상의 쓸모'에서 그때그때의 기쁨과 작은 행복들을 찾아보자는 생각.


이때까지 해야 할 일을 흔히들 말하는 '때'에 맞춰 해왔던 것과 달리, 나의 선택과 계획에 따라 마주하게 된 내 인생 가장 큰 도전의 시작. 비집고 나오는 두려움을 눌러보려 시작해 본 글쓰기가 내 인생의 방향을 조금씩 다듬어주고 있다. 나의 시작을 대하는 태도를 찾아가게 한다. 여기서 글쓰기의 쓸모를 알아가게 된다.


그리고 난 또다시, 나보다 더 나은 필력을 가진 누군가의 문장에 기대 마음을 다 잡는다. 이 글들이 나와 비슷한 시작과 도전을 앞둔 이들에게도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 내 마음속 밑줄로 긴 글을 마무리해본다.


"나는 살아가면서 내가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내가 나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을 필요로 한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입하는 기분은 생생히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실감을 안겨준다. 그렇게 조금씩 걸어 나가는 일, 건전한 욕심을 잃지 않는 일은 무척 소중하다. 결국 열심히 한 것들만이 끝까지 남는다."  -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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