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주껏빛나는 Dec 14. 2020

속눈썹이 몇 개인지 안다는 것

진짜 사랑한다는 증거

어떤 소설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면 노래 가사였을 수도 있겠다. 드라마 대사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요는, "너의 속눈썹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류의 메시지가 담긴 고백을 마주하고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상당히 오글거리는 고백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말 많은 것을 함의한 고백이라고 생각했었다. 연애 초기의 그 간질거리는 기분과 '나만큼 너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걸?'이라는 수줍은 자신감을 담은 고백.


연애 극 초기를 제외하고는, 상대방을 그렇게 오랜 시간 빤히 쳐다볼 일이 없으니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상대의 얼굴만 바라봐도 좋은 찰나는 지나고,

(그렇다고 애정의 크기가 줄어든 다는 것은 아니다, 형태가 변할 뿐...!)

'무한정 얼굴 바라보기' 외에도 차고 넘치게 재미난 일들이 많은 것이 연애의 즐거움이니깐.


그래서 실로 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그렇게 빤히 바라본 지는 오래되었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남편의 속눈썹이 몇 개인 지 모르겠다. (남편은 나의 글을 읽을 일이 없기 때문에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으며, 행여 이 글을 읽는 날이 온다고 해도 나는 '무한정 얼굴 바라보기' 느낌과는 다른 차원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있기에 당당하다 :) - 남편 사랑해!)




그런 내가 저 간질거리는 사랑고백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수유를 하게 되면서이다.


어떻게 안아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작은 신생아부터 영유아 시절까지,

아기들은 젖 먹는 것이 힘에 부쳐 분유를 먹다 자주 잠이 든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이 힘겨운 때에는,

10분 정도 젖꼭지를 빨다가 잠이 들기 일쑤다. 그럴 때는 발바닥을 간지럽히고 귀를 마사지해가며

잠들려는 아이를 깨워서 겨우겨우 밥을 먹이기도 한다.


신생아 시절이 지나고 나서 체력이 어느 정도 붙으면, 이제 아기는 원하는 만큼 양껏 분유를 먹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ml 가까운 분유를 꿀떡꿀떡 먹고 나면 막바지에는 거의 눈을 감고 잠의 세계로 스르르 넘어간다.


그럴 때는 아기를 조심스레 안아 올려 깨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키고

다시 품 안에 꼭 안아 꼼짝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고도의 스킬이 필요하다.


그때의 평온한 아기 얼굴은 그야말로 천사의 얼굴이다.

몇 날 며칠을 빤히 쳐다만 보다가 어느 날부터는 언젠가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사진을 남기기 시작했을 정도로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그때, 나도 모르게 아기의 속눈썹을 조용히 세어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너무 얇고 여려 어떻게 이렇게까지 작을 수 있을까 싶은 속눈썹들을 감탄하며 바라보다,

하나하나씩 세어보는 것이다.


그러다, 세어온 숫자와 내가 있는 지점이 묘하게 어긋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하나'를 시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그 문장이 생각났다.


아, 속눈썹이 몇 개인지 안다는 건 상대방을 정말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구나.

혼자서 바라만 봐도 즐겁다는 말은 과연 이런 거구나.

이런 생각을 문득 하게 된 것이다.


존재만으로 누군가를 이렇게 기쁘게 해 주려고, 그 지난한 세월을 거쳐 이렇게 나에게 왔구나.

너는 정말 사랑스럽고 아름답구나, 라는 세상 누구에게도 품어본 적 없는 생각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의 설렘'이 주는 기쁨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이 주는 또 다른 기쁨으로 마음 전반이 옮겨가던 나의 30대에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설렘'이 다른 국면으로 찾아왔다.

세상 모든 사랑 노래 가사들이, 실은 아기와 사랑에 빠진 엄마 마음을 표현한 것이 틀림없다는 혼자만의 확정적인 깨달음에 빠지는 요즘이다.


그리고 나 또한, 나의 엄마에게 이런 사랑스러운 존재였을 거라는 확신을 마주하게 되면서

집 안에만 갇혀있는 육아 시기에도 혼자 조용히 나만의 자존감을 키워나가곤 한다.

이것이, 육아가 주는 기쁨이겠지.


혹시, 내 자녀의 속눈썹이 몇 개인지 안 세어본 엄마 아빠들이 있다면 오늘 밤 꼭 한 번 도전해보길 바란다.


속눈썹을 하나하나 세어가는 도중,

조그마한 얼굴에 야무지게 자리 잡은 이목 구비하며,

그 시간 동안 조심스레 내 손안에 들어와 나를 기분 좋게 할 작고 따뜻한 손하며,

쌔근쌔근 뿜어내는 사랑스러운 숨소리에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테니.

이전 12화 출산의 순간, 그 이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