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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껏빛나는 Jan 21. 2021

나는 어떤 아기였어?

엄마는 어떤 엄마였어?


나는 딸아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나에게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그보다 더한 행복?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
가령 윤서가 행복해할 때
나의 행복은 그 곱절이 된다.
열 살의 나도 부모님에게 그런 존재였을까.
이젠 물어볼 수도 없지만,
그런 마음이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 「다정한 구원」 중에서, 임경선 지음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다.
- 「숨결이 바람 될 때」 중에서, 폴 칼라니티 지음




태어난 지 8개월 된 그 시절의 나도 엄마에게 과연 그런 존재였을까.

요즘 매일 하는 생각이다. 일어나서 하는 거라곤, 아기와 놀고, 아기 밥을 챙기고, 기저귀를 갈고, 나머지 집안일을 하는 것뿐인 육아휴직 중인 나는,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마음이 충만하다. 이유는 너무 명확하게도 단 하나, 눈만 마주쳐도 아무런 계산 없는 웃음을 보여주는 나의 딸 때문이다. 아기를 만나기 전에 읽었을 때도 마음이 뭉클해지던 그 문장의 감정을 나는 요즘 몸으로 겪어내고 있다. 엄마가 아프고 난 이후로는 처음으로, 허한 마음 없이 충만하게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나도, 과연 엄마에게 그런 존재였을까?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는, '이렇게 내가 사라지는 건가..'라는 생각에 잠깐 우울해지려 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건 몸이 너무 힘들었던 이유가 컸던 것 같다.

잠이 모자라 눈밑이 퀭하던 100일까지의 시기, 커가는 아기의 몸에 적응한다고 손목과 어깨가 지끈했던 200일까지의 시기를 지나고 나니 어느덧 아이와 함께하는 삶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이 아이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9개월 차에 접어든 나의 딸아이는 감사하게도 자기 방에서 의젓하게 통잠을 자고 남편도 나도 육아에 적응한 꽤 괜찮은 2인조가 되어서 우리는 우리 둘, 그리고 거기에 아기까지 더한 세 식구에 딱 맞는 생활 패턴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요즘은 여유가 생겼다. 아기가 울어도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는다. 왜 우는지를 얼추 알고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고, 울음의 원인이 해결되고 나면 우리 딸은 또 세상 행복한 아기가 되니깐. 그렇다, 지금은 말로만 듣던 육아 황금기인 것이다! 여유를 찾고 임하는 육아는 그야말로 '황금'이다. 세상에,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육아라니. 이제는 표정도 다양해지고, 아기만이 낼 수 있는 귀여운 소리도 제법 내고, 자기 의사도 생기고, 왕성한 옹알이도 뱉어내는 정말 귀여운 '생명체'가 되었다. 어느 날은 이래서 둘도 낳고 셋도 낳는 건가 보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혼자서 고개를 휘저으며 정신을 차리자 생각한 날도 있었다.


그러고는 다짐했다. 이 여유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 딸은 어떤 아기였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남겨놓자고. 나중에 혹시나 딸아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날이 온다면, "네가 어떤 아기였는지 엄마가 아주 속속들이 남겨놨어. 엄마가 남겨놓은 네 모습에 네 아이 모습이 겹쳐 보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라고 이야기하며 내가 남긴 기록을 꼭 보여준다면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거란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물론 성인이 된 나의 딸이,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내 인생에는 너무 많아요. 나의 선택이에요."라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된다한들, 이 기록 자체는 너무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요즘의 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아마 이렇게 눈짓 몸짓 한 번으로 누군가를 황홀하게 기쁘게 하는 존재였을 테고, 그것만으로 내 존재가치는 어떤 의미에서는 충분한 것 같다는 생각.

내 기록이 어른이 된 딸아이가 봤을 때, 딸아이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가지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써 내려가 보자면 서아는.

- 엄청난 우량아다. 나의 체격은 딱 보통, 남편은 마른 편인데 어떻게 이렇게 먹성이 좋은지 미스터리이다.

- 그래서 오동통한 미쉐린 캐릭터 스타일의 팔목과 발목을 가지게 되었다.

- 우는 이유는 단 두 가지. 배고프거나 졸리거나. 절대로 달래지지 않는 울음은 배고픔이 원인일 때. 50일이 겨우 넘어가던 시기, 하루 먹는 분유량 1000ml를 넘기지 않기 위해 엄청난 씨름을 했었다.

- 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곳의 살이 너무너무 너무 보드랍다. 한참을 만지게 된다.

- 다소 더러운 부분도 사랑스럽다. 트림할 때 나는 분유 내, 더운 날 손에서 나던 쿰쿰 내, 통통한 살 사이사이에 낀 때, 구강기가 온 이후 손에서 나는 묘하게 시큼한 침 냄새, 지금보다 어린 시절 꼭 쥔 주먹을 피면 손가락 사이에서 나오던 작은 먼지뭉치들까지 죄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 허리에 힘이 생긴 이후부터는 아빠가 안아주면 허리와 등을 뒤로 곧게 세우고 아빠 얼굴을 '빤히' 쳐다볼 때가 있다. 아빠는 아마도 그 모습 때문에 딸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 오른쪽으로 세워 눕혀서, 등을 토닥이며 '섬집아기'를 불러주면 잠이 잘 든다. 노래 가사가 너무 슬퍼 그만 불러주고 싶은데...

- 뒤집기도 조금은 늦더니, 또래에 비해 많이 늦다. 9개월에 접어드는 데 아직 이도 나지 않고, 서지도, 기지도 않는다. 다 자기만의 때가 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 엄마나 아빠 배 위에 앉아서 노는 것을 좋아한다. 목마 타는 것도 좋아한다.

- 자기 싫을 때는 몸을 엄청 뻐튕기며 절대 자기를 재우게 둘 수 없다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가끔 몸부림이 엄청 길어지기도 한다.

- 아침에 일어나면 혼자서 자기 손가락을 보며 놀다가, 인형이랑도 놀다가, 지루해지면 소리를 내서 엄마나 아빠를 부른다. 그때 방에 내가 들어갔을 때 보여주는 환한 웃음은, 평생을 두고도 못 잊을 귀중한 '나의 순간'이다.

- 눈을 마주 보고 재밌는 소리나 표정을 내면서 얼굴 가까이 다가가는 장난을 치면, '까르르' 하고 웃는다.


아기가 낮잠을 자는 동안, 식탁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이렇게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는 순간에도 나는 아기 생각에 미소 짓고 있다.




이렇게 행복한 와중에 아기가 곤히 잠든 밤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가끔 슬퍼지는 건, 나도 정말 그렇게나 예쁜 아기였는지 물어볼 수가 없어서이다. 그리고 엄마는 어떤 엄마였는지 물어볼 수 없어서이다. 엄마 없이 엄마가 되고 보니 애달픈 점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시절의 엄마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모유수유는 얼마나 했었는지, 뭐든 느린 나를 보고 마음이 초조하지는 않았는지, 지금 내 눈 앞의 아이가 갓 태어난 나와도 닮은 구석이 있는지, 속눈썹이 몇 개 인지 세어볼 수 있을 정도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었는지.


오빠와 나 사이에는 태어나지 못한 아이가 한 명 있었다 했는데, 나를 가진 마음은 많이 기뻤을까. 둘째니, 첫째 때보단 덜한 마음이었을까. 그래도 딸은 아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니, 나를 보며 또 다른 류의 기쁨을 찾았었을까. 결혼 전엔 일을 했다는 엄마에게, 이렇게 태어난 자식들이 혹여 짐처럼 느껴진 날들도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역할을 묵묵히 해나가게 한 원동력에 나는 어느 정도를 차지했었을까. 궁금한 점이 수두룩하다.


그 어떤 질문에도 답을 들을 수가 없다. 왜 몇 년 전의 나는 엄마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엄마와 이런 진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마치 이별이 다가올 것을 알고서는 서두르는 사람처럼 느껴져 차마 묻지 못했던 걸까. 그래도, 나중에 너무 서글프지 않게 실컷 물어보고 실컷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가 남는다.


그 후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애석하게도 없다. 시간은 지났고 엄마는 떠났으니깐. 망자가 남긴 물건과 일기, 사진, 망자와 나눈 대화 등을 데이터로 기반 삼아 가상의 망자와 대화를 나누게 해주는 어느 SF 소설 속의 서비스가 현실화되기 전까진 그 물음에 답을 결코 찾을 수 없을 테다.


그래서 나는 그냥, 얼마 남지 않은 휴직 기간 동안 최대한 진하게 아이와 시간을 보내자고 다시금 다짐한다. 그 시간들이 내가 어떤 아기였는지에 대한 답을 찾게 할 수는 없어도, 엄마가 어떤 엄마였는지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있게 할 거란 생각이다. 세상 모든 엄마 마음이 사실은 비슷하다고 하니, 그 옛날 엄마의 마음도 지금의 나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작은 손짓, 몸짓 하나에도 느껴본 적 없는 기쁨을 느끼고, 세상 환한 웃음에 언제 그랬냐는 듯 피로를 잊게 되고, 이 아기에게는 나와 남편이 온 세상이자 온 우주라는 생각에 기분 좋은 책임감을 갖게 되는 것. 이 마음들에 시간을 많이 내주고 잘 간직하고, 잊지 않고 이렇게 조금씩 남기다 보면 그렇게 엄마의 마음에 조금씩 선명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기회를 잃었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얼마 되지 않겠지만) 사람들이, 꼭 '나는 어떤 아기였는지, 엄마는 어떤 엄마였는지' 이야기 나누었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 인생에 이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얼마나 될까. 진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가 느낄 수 있는 충만함을 잃지 않고 잘 끌어안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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