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잘할 수 있겠지?
되돌아보니 출산 전에 나는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몰랐다.
"조부모 찬스를 당연하게 여기는 건 너무 염치없는 거 아니야? 할머니들도 한 명의 인간인데 그 연세까지 육아라니. 나는 진짜 되도록이면 손 안 벌릴 거야."라고 생각했었으니.
그 생각이 틀려서 세상을 한참 몰랐다는 게 아니다. 지금도 저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조부모 찬스에서 자유로우려면 아래의 조건 중 어느 하나는 우리의 이야기여야 했다.
1. 엄마 혹은 아빠 둘 중 한 명만 일을 해도 노후 걱정이 없고 일을 하지 않는 둘 중의 한 명이 '일을 하지 않는 스스로'의 삶에 공허함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2. 엄마 혹은 아빠 둘 중 한 명의 직장이 2년 육아휴직 정도는 당연하게 쳐주는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
3. 베이비시터에게 하루 종일 아기를 맡겨도 아이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 정신이 건강 & 담대하며 리스크 매니먼트에 강한 부모이다. (사실 아이에게 미안할 이유는 정말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 입장에서는 본인에게 애정을 쏟는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지, '핏줄'이 아니어도 상관없을 테다. 끝없는 불안과 의심, 그리고 그것을 증폭시키는 끄악 할만한 뉴스들이 세상 부모들을 미안함의 궁지로 몰고 있는 게 아닐까.)
애석하게도 1,2,3번 모두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오랜 기간 임신을 두려워했었다. 심플하게 설명하자면 엄마만 외할머니가 되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싫었다. 그게 너무 서글플 것 같았다.
임신을 하고서는 조부모 찬스를 쓰는 게 염치없는 거라 생각하기도 했지만 친정엄마 찬스를 쓸 수 없는 그 상황이 싫었던 것도 컸다. 아이를 보며 기뻐할 시어머니의 모습이 선명했고 우리 엄마만 그 상황에 없는 게 나를 하염없이 슬프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남편과 나 둘이서 해결해보려 했었다.
그러나 웬걸, 집에는 고작 4kg도 안 되는 생명체 하나가 늘었을 뿐인데 집 안의 모든 것들 (사람 포함, 상황까지)이 전적으로 아이에게 맞춰 세팅되게 되었다. 그것이 처음부터 순리였던 마냥, 그리고 남편과 나는 원래 그러려고 존재했던 사람처럼 생활패턴도 사고 회로도 아이 중심이 되어버렸다.
남편과 나는 별다른 논의도 없이 아이를 중심으로 생각하니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다. 생후 10개월 아이의 주양육자를 '감사하게도' 선택할 수 있다면 다른 그 누구보다 '할머니'가 아이에게 최선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돌봄 기관 혹은 시터에게 생후 3개월 만에 맡겨지는 아이들도 여전히 많다. 나의 상황 정도는 매우 감사해야 하는 상황임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시어머님의 손을 빌리게 되었다.
친정엄마는 돌아가시고 시댁이 지방인 나는 하염없이 아이를 '남의 손'에만 키우게 될 줄 알았는데 그 상황이 오는 것을 감사하게도 시어머님께서 막아주셨다. 원래 직업이 산후도우미이신 어머님께서 남의 자식도 보는데 그 어린아이를 하루 종일 남의 손을 타게 할 수 없다며 손녀를 위해 기꺼이 우리 집에서 지내시겠다 하셨다.
그래서 나의 육아휴직과 복직 사이클은 이렇게 정해졌다.
- 20년 4월 말 휴직
- 20년 5월 중순 출산
- 21년 2월 초 복직 & 시어머님과 동거 시작
- 21년 8월 초 조부모 찬스 종료(으악!!!) = 하원 도우미 고용
내가 이렇게 하는 동안 우리 아기는 아래 사이클에 적응해주어야만 했다.
- 20년 5월 탄생
- 21년 2월 엄마 없이 할머니와 지내기 시작
- 21년 3월 어린이집 등원 시작(하루 30분부터 적응)
- 21년 5월 어린이집에서 낮잠 도전
- 21년 7월 어린이집 오후 3시 하원 목표
- 21년 8월 하원 도우미 선생님과 지내기
6월까진 아무 생각이 없었다. 복직한 후 직장인의 삶에 다시 적응하기에 바빴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휴직한 동안 천지가 개벽해 재택근무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나는 방문을 닫고 재택근무를 하고 아이는 할머니와 거실에서 신나게 노는 삶이 이어졌다.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그러시지 말라해도 어머님은 집안일을 해놓으셨고 퇴근하고 방문을 열면 이미 저녁 메뉴는 마련되어 있었다. 죄송하고 감사했다. 어머님의 체력과 시간이 여기에 쓰여도 마땅할까 하는 죄송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이면, 아이는 세상 예쁜 미소를 할머니에게 시전했다. 그 미소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며 한 켠으로는 어머님에게도 이 시간이 행복이겠다는 확신이 들어 안도감에 젖었다.
6월 중순쯤 되니 너무나도 좋은 이 생활패턴을 정리할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고용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마음에 드는 시터나 하원 도우미를 만나는 것이 '전생에 나라 구한 격'이라던 SNS에서 본 웃픈 말들이 떠올랐다.
조부모 찬스에 견줄 만큼의 돌봄을 고려하다 보니 우리는 절대 '갑'이 될 수 없었다. 아이에게 애정을 줄 수 있고 아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말 아이의 '돌봄' 외에 우리는 다른 그 어떤 가사도 맡기지 않기로 했다. 애정과 안정에만 케어 시간을 오롯이 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시한 시급을 웃도는 시급을 원하셨고 기꺼이 응해 드렸다. 돌봄산업에서는 '고용주'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파트너'를 구하는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분이라 생각되는 하원 도우미 선생님을 만났다.
구인 공고를 올린 지 한 달 반만이었다. 총 네 분 면접을 진행했고 최종 채용 직전 단계까지 갔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못하게 되었다'는 거절을 두 분에게나 당한 뒤에 맺어진 분이었다. 아이를 천성적으로 좋아하시는 분 같다.
재택근무를 방 안에서 하는 동안 선생님과 아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음이 한결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2주 만에 이 삶에 적응했다.
하원 도우미 선생님과 보내는 3시간을 즐거이 보내주는 아이에게 고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이 열리는 순간 언제 다른 사람이 자기를 돌봐줬냐는 듯 엄마 껌딱지로 돌변하는 아이가 아직은 고맙다. 너무 엄마가 필요 없어져버린 것 같으면 서운할 테니깐.
하원 도우미 구인공고를 올리기 시작한 날부터 남편과 입버릇처럼 나눴던 이야기가 있다.
우리 잘할 수 있겠지??
곧 끝나버릴 조부모 찬스,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것, 누군가의 고용주가 되는 것,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 우리가 고용한 사람이 우리 마음 같지 않을 리스크, 엄청난 멀티태스커가 돼야 할 상황, 시어머님 덕에 잠깐이나마 둘만의 외부 활동이 허락되던 여유가 사라지는 생활.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출산 이후 가장 걱정되는 주간이었다. 시어머님이 부산으로 돌아가시고, 하원 도우미 분과의 생활을 시작하는 21년 8월 둘째 주.
감사하게도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선생님은 너무 좋은 분이시고 아이들은 자기를 예뻐하는 사람은 단번에 알아차린다더니 자기를 보며 웃는 선생님에게 매우 잘 적응했다. 선생님과 나는 서로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파악하고 필요한 것을 조심스레 요청하며 서로에게 맞춰가고 있다.
어찌어찌 잘 적응해가고 있는 듯한 이 생활이 무탈하게 쭉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할머니로서의 어머님과, 엄마로서의 어머님을 동시에 겪어내는 건 참 좋은 경험이었다. 배려와 사랑이 넘치는 성인이 보여주는 내리사랑을 배울 기회였으니까. 나에게는 없을 줄 알았던 조부모 찬스를 감사하게 소진했으니 그 찬스에서 얻은 힘과 노하우를 앞으로의 멀티태스킹에 잘 녹여봐야겠다.
앞으로도 우리, 잘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