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에필로그
“자기야, 우리 해장하러 망원동 갈까?”
남편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이마가 욱신거려 거울을 들여다보니 파란색 멍이 생겼다. 어디에서 다쳤을까? 이전에도 주차장 차단기 기둥에 이마를 부딪혀 멍든 적이 있었는데.
간병으로 무너진 일상을 되찾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나간 모임에서 과음을 하다니. 부끄러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하지만 이내 무료함을 못 이기고 오디오북을 뒤적이다가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 여행 II' 재생 버튼을 눌렀다. 놀랍게도 이 책은 저자가 자동 주차 차단기에 머리를 부딪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방금 차단기가 올라간 것을 보고서도 그 아래에 서 있다가 육중한 차단기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놓았다. 영국 사는 오라버님이 생긴 것처럼 반가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나를 부르는 숲'을 펼쳤다. 어릴 적 지리산에서 홀로 길을 헤매던 일이 생각났다. 해가 지자, 순식간에 나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사라지고 계곡물 소리와 동물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진한 흙 내음 속에 주저앉아 있을 때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의 암 진단은 나를 다시금 숲속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어둠이 나를 잠식하며 방향감각을 잃었다.
빌 브라이슨은 어떻게 3,50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고 험한 여정을 준비하고, 헤쳐 나갔을까. 궁금하던 그때, 책 속 초청장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함께 가 주시겠어요? 일부분이라도.... 제발요.’
남편이 다시 안방에 고개를 내밀었다.
"망원동 안 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우리, 망원동 말고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어때?"
그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했다.
"거긴 다음에 가자. 배낭 지고 갈 힘 길러서."
그와 나, 우리 두 사람이 어린아이 키만 한 배낭을 메고 숲길을 향하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상상 속에서, 뒤따라오시는 부모님을 향해 몸을 돌려 손을 내밀었다. 그 손 아래로 희미한 길이 드러났다. 문득 깨달았다. 우리를 가두었다고 생각했던 이 숲이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내주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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