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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oneyberry

회오리감자와 회오리바람

바람에 흔들리는 건

by 허니베리


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변화기 시작했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거나, 할 수 있는 요리가 생기는 건 매우 긍정적인 변화이다. 독립된 개체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에 착수한 듯하다. 섭섭함보다는 10년의 육아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해서 환희가 스치곤 한다. 하지만, 이 터널을 지나면 곧바로 사춘기라는 땅굴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 징조 중 하나가 헤어스타일의 변화이다.


아이 아빠는 멋과는 무관한 사람이다. 이십여 년 전 티셔츠를 입는 것은 기본이고, 머리카락은 멋이 아닌, 지켜야만 하는 대상이다. 결혼 전 시대를 과도히 앞선 패션 피플이던 나는, 지금은 의복보다는 식(食)과 주(住, 경우에 따라서는 酒)가 먼저인 백패커 같이 살고 있다.


그런 우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장발의 파마머리를 고수하기 시작했다. 굽실굽실한 뒷머리가 어깨에 닿자, 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던 '옛날 사람'으로서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아들을 미용실로 데려가기 위해 ‘머리가 커 보인다’라는 돌직구를 날렸으나 '크면 큰 거지'라는 쿨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엄마가 관리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로도 사정도 해보았으나, 실제 관리 안 하는 것이 맞지 않냐는 반문에 말문이 막혔다. ‘학교 선생님은 별말씀 없으시냐’며 선생님의 권위로 은근히 압력을 가했으나, 학생 인권 때문에 그런 말씀은 안 하신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인형 탈을 뒤집어쓴 것 같다’라는 충격요법을 사용한 끝에야 미용실에 데려갈 수 있었다.


행여 아들의 마음이 바뀔까 봐, 미용실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도착 직전, 앞머리 파마 및 뒷머리 정리로 아들과 타협점을 찾았다. 미용실 원장님이 장사를 참 잘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고 말이다.


원장님은 아들을 보자마자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해줄게. 나한테 말해줄래?”

내가 급히 그들 사이로 다가가 끼어들려 하자, 단호한 목소리로 내가 아닌, 아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어머님, 아이가 머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중학교 올라가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스타일이잖아요. 아이가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게 어떨까요?”


교양 있는 그녀의 말투에 나는 이 나라 꿈나무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또한 원장님의 말속에 심긴 지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아이와 원장님은 스타일 이미지로 가득 찬 태블릿을 보며 한참을 속삭이더니 카드를 쥔 나의 동의 없이 값비싼 결정을 내렸다.


원장님이 빠른 손길로 롤을 말았다. 뒷모습이 익숙했다. 이 녀석, 롤을 돌돌 만 뒤통수가 꼭 외할머니 닮았구나.


롤을 푼 아이의 머리는 마치 알 굵은 소라를 잔뜩 얹어 놓은 것 같았다. 아이가 당황하여 울음을 터뜨릴 것을 예상했다. 그 즉시 나는 근엄하게 머리를 다듬을 것을 지시하고, 가격을 흥정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거울을 바라본 아들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퍼졌다.


“어때, 맘에 드니? 손질하면 컬이 이보다는 펴질 거야.”

“네, 제가 원하던 스타일이에요.”


그 광경에 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또다시 뒷걸음질 쳤다. 원장님이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드님의 취향을 존중해 주니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나왔네요. 어머님 생각은 어떠세요?”


마음과 달리 내 엄지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 엄지는 아들의 헤어스타일을 향한 것이 아니라, 아들과 원장님에게 인정받기 위한 비굴하고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드라이를 하니 컬이 늘어져 회오리감자를 잔뜩 달고 있는 듯한 아들을 바라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원장님의 말투와 카드값이 떠오르자 더욱 분통이 터졌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아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엄마, 엄마는 내 머리가 그렇게 맘에 안 들어?”

“응.”

기다렸다는 듯 본심을 내뱉었다. 그러자, 아이의 입가가 실룩대더니 눈이 벌게졌다. 이러려면 차라리 미용실에서 말렸어야지. 아이가 속으로 삼킨 말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처신을 제대로 못했으니, 이제라도 어른답게 수습해야겠다.


“우리 모두 취향이나 의견이 다를 수 있어. 내 맘에는 안 들어도, 네 맘에 들면 된 거야. 울 필요까지는 없어. 다른 사람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는 것, 그건 아빠의 강점인데.... 아빠한테 배워야겠구나.”

마침 집에 들어와 아들의 머리를 보고 눈이 동그래진 남편을 불러 세웠다.

"원아, 아빠의 반응 잘 봐"

남편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원이 아빠, 자기 머리 스타일 정말 별로네요.”

남편이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자기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힘차게 외쳤다.


"닥쳐!"


무대 위 주연 배우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곧이어 칭찬받기를 원하는 강아지처럼, 투명하고 맑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의 불꽃을 발견했는지 소방관이 방수포를 펼치듯 뜨거운 공기 위로 꺽 하고 트림을 내뱉고는 쓱 퇴장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남편이 내게 슬쩍 말을 건네왔다.

“사실, 나도 머리숱 많을 때 머리에 멋 많이 부렸어.”


다음날, 머리를 매만지는 아이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고 보니, 아들의 헤어스타일이 어릴 적 외화에서 본 자유분방하고 씩씩한 주인공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작은 일에 이렇게까지 마음 쓰지는 말자.

흔들리는 건 살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아들이 사춘기에 들어서며 흔들리는 건 나다. 닥쳐올 상황 속에서 분별력을 갖고 아이에게 올바른 기준점과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소소한 것들은 내려놓으며. 예를 들면, 머리에 회오리감자를 잔뜩 매단 헤어스타일 같은 것들 말이다.




이미지 출처: Freepi

작가: catalyststu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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