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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시인, 매창

향기로운 노래를 불렀던 순수한 휴머니스트 부안의 매창

한 사람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평생을 같이 할만한 사람의 이야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부안을 상징하는 인물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만고의 역적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허균이다. 음식에도 조예가 깊었던 아버지 허엽은 강릉의 대표적인 음식인 초당 순두부를 만들었다. 그 시대에 늦은 나이인 53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허균이었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허균은 매창과의 인연을 맺으면서 다양한 생각을 교류하였다. 허균은 성수시화를 지으면서 매창의 시를 처음 소개하였는데 1611년 11월 유배지에서 풀려나 부안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 해전인 1610년에 매창은 이처럼 뜨거운 여름날에 새장에 갇힌 학을 짓고 죽었는데 유언에 의해서 매창의 거문고와 함께 부안 봉덕리에 묻혔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이매창의 묘이다. 기생으로 알려졌던 사람의 묘가 이렇게 도심에 잘 보존된 사례를 많지가 않다. 그녀는 부안현의 아전이었던 이탕종과 관비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계유년에 태어나 계생이라고 불렸으며 아버지에게 한문과 거문고를 배웠다고 한다.

부안 이매창의 묘가 있는 곳곳에는 그녀의 시가 쓰여 있다. 허균과 매창과 처음 만나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받은 것은 허균의 나이가 서른셋, 매창의 나이가 스물아홉이던 1601년 7월이었다고 한다. 허균이 전라도 지역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전운판관으로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매창의 묘가 있는 곳에서 몇 백 미터를 내려오면 매창테마관이 나온다. 다른 이름으로는 부안문화원이라고 한자로도 적혀 있다. 매창의 이야기는 익숙하게 많이 들어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는 술을 파는 여성과 당대의 기생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서민의 삶보다는 풍류를 알고 지식인과 교류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 당대 기생의 삶이었다.

한 순수한 휴머니스트 매창의 연대기가 이곳에 기록이 되어 있다. 허균은 시대를 앞서갔지만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신분에 대한 차별이 없었기에 불행한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덕분에 매창은 그런 허균을 친구이자 연인으로 좋아하였다고 한다. 허균과 매창은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다고 한다.

거문고를 켜기를 좋아했던 매창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운명과 신분에 대해 한탄하거나 세상 사람들의 조소에 가슴 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결한 지조와 기품 있는 삶의 자세를 지켰다고 한다.


봄날의 그리움


삼월이라 동녘바람이 불어

곳곳마다 꽃이 져 흩날리네

상사곡 뜯으며 임 그리워 노래해도

강남으로 가신 임은 돌아오시질 않아라.

허균과 매창은 끊임없는 교류를 하였다. 1610년 먼저 매창이 세상을 떠나고 1611년 허균은 죽은 매창에 가슴 아파했었다. 그리고 7년 뒤인 1618년에 역모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은 후 사형을 당하게 된다.

여자는 벼슬을 할 수 없어서 글을 배우거나 쓰려고 하지 않았지만 여류시인들은 자신만의 시를 지었다.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이나 황진이, 매창은 조선을 대표하는 여류시인이기도 했었다.

매창집의 목판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 않지만 누군가 필사를 한 것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는 그녀의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은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며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로 살았던 그녀는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이사군


볼애산 높은 봉에 흰 눈이 쌓여

매화꽃 피기가 이리 더딘가

오는 봄 오는 봄엔 일직 피어서

임의 뜰에도 찾아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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