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하락과 은이 사라진다.

산업의 피가 바뀌고 있는 신호들 속에서 실물 자산의 재평가

최근 원화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유가는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직관적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원화가 약세를 보이면 수입 물가는 상승하고, 지정학적인 위기가 더해지고 있을 때 특히 석유 같은 전략 자원의 가격은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솟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이 이상한 균형은 전 세계 산업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유가 하락은 수요 감소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 과잉이 가격을 눌러 내리고 있다. 셰일 혁명 이후 미국은 더 이상 석유를 지키는 국가가 아니라, 석유를 조절하는 국가가 되었다. 원화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한국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이 현상은 단순한 경제 논리로만 설명되지는 않는다.


최근 미국이 베네수엘라 인근 해역에 항모전단을 전개하며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는 이유 역시 표면적인 명분과는 다르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인권 문제나 마약 단속이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미국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정교하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대 수준의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국가다. 오늘날의 미국은 정의나 도덕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자국의 이익, 그리고 에너지 패권을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더 중요한 변화는 석유 그 자체가 아니다. 2026년을 향해 가는 지금, 산업의 중심에서 서서히 밀려나는 자원이 있다면 석유이고, 반대로 조용히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자원은 은이다.


한때 석유가 ‘산업의 피’였다면, 앞으로의 산업에서 피 역할을 하는 것은 은이다. 반도체, AI,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군수 산업까지 은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 산업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기전도율과 내구성에서 은을 대체할 수 있는 금속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의 가격은 오랫동안 억눌려 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실물 은이 아닌 종이 은, 즉 파생상품과 공매도 구조 때문이다. 실물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거래되는 계약들이 시장 가격을 왜곡해 왔다.


JP모건은 이 구조의 상징적인 사례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조직적으로 ‘스포핑’ 기법을 사용해 은 가격을 조작했고, 2020년 약 9억 2천만 달러라는 사상 최대 수준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하지만 처벌이 시장 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국제 금융기관에 선의는 없다. 규칙은 필요할 때만 존재하고, 이익이 된다면 언제든 무력화된다. 엔비디아와 테슬라가 주목받는 동안, 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금속인 은은 의도적으로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삼성전자도 은이 필수적이다. 그 덕분에 플랫폼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실물 은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실물이 없는 은 거래로 수요를 억누르던 방식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채굴은 쉽지 않고, 새로운 공급이 가능하다고 해도 빨라야 2035년 이후다. 반면 수요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다.


석유 산업은 이미 치킨게임에 들어섰다.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압박하며 공급을 조절하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실물 자원의 시대로의 전환이 진행 중이다. 한 돈에 백만 원을 넘나드는 금 가격, 온스당 80달러를 넘어 100달러를 향하는 은 가격은 단순한 투기 현상이 아니다.


2026년은 변동성의 해가 될 것이다.

환율의 붕괴, 원화 가치 하락,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실물 자산의 재평가.

석유에서 은으로, 구시대 산업의 피가 미래 산업의 피로 교체되는 과정이 뉴스의 중심을 차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은이 없으면 더 이상 제품을 만들 수 없는 시대.

그 문턱에 우리는 이미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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