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1
여섯 시 십분. 평소면 지하철을 탔을 시간이다. 집에선 네시에 나왔다. 세 시간 정도 잤는데 썩 괜찮은 컨디션이다. 칭다오 두 캔을 먹고 잔 게 도움이 됐다. 맥주는 짧은 잠에 좋다. 긴 잠엔 좋지 않고. 촉박하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비행기가 연착됐다. 한 시간 반을 더 기다려야 한다. 블루투스 키보드를 가져오길 잘했다.
대신 비행기 환승을 못하게 생겼다. 하노이에서 발리 가는 항공을 11시 반에 타야 하는데 하노이에 11시에 도착한단다. 카운터 직원은 발권해주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 이거 못 탈 수도 있거든요. 근무한 지 얼마 안돼 보였다. 어쩔 줄 몰라하다 물어보고 알려준다고 했다. 금세 다른 직원이 오더니 비행기 맨 앞 좌석으로 바꿔줬다. 2열 c석이예요. 열한 시 앞뒤로 도착할 텐데 저희 비행기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도 있고 뒷 비행기가 연착할 수도 있고요. 내려서 최대한 빨리 찾아가 보세요. 다른 직원이 지켜보다가 한마디 더 보탰다. 게이트가 바뀌진 않았는지 꼭 확인하세요!
직원은 비행기를 놓치면 환불해주거나 다음날 비행기로 바꿔 준다고 했다. 호텔이나 부대비용은 항공사에서 부담한단다. 호찌민에 가서 비행기를 환불하면 나는 어디로 가면 되는 걸까?라고 생각했지만 따로 묻지 않았다. 뭐 어디로든 가게 될 것이다. 대신 비행기를 놓치면 어디를 찾아가면 되나요?라고 물었다. 직원은 거기서 가까운 직원을 찾으라고 했다. 가까운 직원이 비행기를 놓쳤으면 환불해줄 수 없다고 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차피 사람들은 내 생각만큼 내 사정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출국장 창밖으로 해가 뜬다. 평야가 넓으니 서쪽에서도 일출을 본다. 사람들이 창에 붙어 사진을 찍는다. 목베개를 낀 남자, 키가 큰 젊은 커플이 사진을 찍는다. 마스크를 거의 눈까지 쓴 배 나온 아저씨는 가방을 베고 잔다. 사람들이 하나둘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린다. 어디선가 먹을거리를 팔기 시작한 것 같다. 배고프다.
비행기가 거세게 흔들린다. 시골길을 달리는 마을버스 같다. 아기가 운다. 기장은 벨트를 매라 방송을 하고 승무원은 가던 길을 멈추고 제 자리에 앉는다. 앞자리 인도인 커플은 사이가 좋다. 머리카락이 자꾸 뒤로 넘어와 내 무릎에 닿을 것 같다.
항공사에서 맨 앞자리를 내준 덕에 아주 넓게 왔다. 유료석으로 보이는 좌석이다. 대부분 비어있어 한 사람 당 세 자리씩 차지했다. 대충 여섯 명 정도가 그랬다. 호찌민까지는 다섯 시간이나 가야 했는데, 출발하자마자 허리가 아팠다. 비행기를 아무리 타도 허리가 아픈 적은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다른 여섯 명의 사람들은 옆좌석까지 차지해 침대처럼 누워있었다. 나도 몸을 베베 꼬다가 내키진 않지만 그들처럼 팔걸이를 올리고 새우처럼 누웠다. 이래도 되는 걸까?생각하다 편히 잠들었다.
기장이 방송을 했다. 우리 비행기는 현지시각 11시 7분에 공항에 착륙합니다. 다음 항공이 11시 30분 탑승 마감이니 23분 안에 환승을 마쳐야 한다는 소리다. 서울역에서 4호선을 환승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착륙을 7분에 하더라도, 유도로를 달리고, 통로를 연결하고, 짐을 빼고 여러 가지 따분한 일들을 마치면 다음 비행기는 날아가고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비행기는 실제로 착륙했고 시계를 보니 이미 11시 30분이었다.
옆에 누워있던 다른 여섯 명의 여행객들은 서로 친구였고 미국 영어를 썼다. 엿듣자니 그들도 발리에 가는데 환승시간이 모자라 항공사에서 뛰라고 앞자리를 내준 것 같았다. 키 큰 남자애가 비행기가 착륙한 동안 승무원을 부르더니 자기 티켓을 보여주고 게이트랑 탑승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했다. 나는 거기서 약간 안도했다. 승무원은 지금은 확인이 안 된다고 연락이 취해지면 알려준다고 하더니 잠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유 슈드 런. 빨리 뛰어보세요. 그들은 서로 우리가 탈 수 있을 것 같거나 없을 것 같다고 토론했다.
비행가 세게 흔들리고 아기는 또 운다.
난기류로 추락한 사례가 있을까?
검색해보고 싶지만 인터넷이 안된다.
굉장히 배고프다. 아침 네시에 집에서 나왔는데 지금 한국 시간으로 오후 다섯 시다. 집에서 사과를 챙기려다 만 걸 후회하고 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무언갈 먹어야겠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우붓’까지 어떻게 가는지 알아둔 바가 없다. 한 시간 걸리는지 네 시간 걸리는지도 모른다. 우붓은 왜 가고 싶은 거지? 요가하러?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호찌민 환승구간에서 달리는 동안 칼로리를 많이 썼을 것이다. 뛰는 동안엔 전투 뜀걸음이 생각났다. 여섯 명의 미국인들과 가방을 메고 24번 게이트로 달렸다. 달릴 때는 이미 탑승 마감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우리는 탈 수 없으리라 마음을 정리하고도 전력을 다해 뛰었다. 뛰지 않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다. 오 분 정도를 달려 24번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비행기는 태연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