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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덩구 Oct 17. 2022

반투명한 욕실문과 두꺼비

발리3

세 시간 뒤에 일어나야 한다. 차라리 비가 쏟아졌으면 좋겠다. 약속을 취소할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안나는 비가 와서 트래킹이 취소되면 아침에 자기랑 요가를 가자고 했다. 내일은 어째 요가가 더 가고 싶다. 안나랑 이야기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어쨌든 내일 화산 트래킹을 가기로 이샤와 약속했다. 이샤는 좋은 트래킹 코스를 알아왔다며 구구절절 소개했다. 나도 한국에서 알아본 투어였다. 그래 거기 어메이징 하더라, 나도 가고 싶었는데 잘됐네 같이 가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영어가 잘 안 돼서 나도 갈래라고만 말했다. 우린 새벽 두 시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금이 열한 시다.




결국 못 잤다. 눈을 감을수록 잠이 달아난다. 적당한 커피와 맥주, 잉글랜드 여자애들 때문이다.


같은 방에 잉글랜드 여자애들 넷이 들어왔다. 대학 친구끼리 여행 중이라고 했다. 파티에 지쳐 이 숙소로 넘어왔단다. 그들은 옷을 여러 번 갈아입고 서로 어떠냐고 묻고 화장을 고치고 서로를 디스 하며 깔깔 웃는 식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네 명 모두 텐션이 높아 가만히 누워있던 나에게도 사이사이 말을 걸었다. 이름을 묻길래 알려주니 뭐 그런 이름이 있냐는 표정을 짓곤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보통은 발음을 시도하는데 그녀들은 나눠야 할 다른 대화 주제가 많다. 나는 그냥 '배'라고 알려주는 게 여러모로 낫겠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근데 너희는 틴에이저야? 누군가 기뻐하더니 답했다. 쟤만 열아홉이고 우리 셋은 스무 살이야. 말이 제일 많던 애였다. 틴에이저로 보인 게 좋은 걸까 사실은 스무 살인 게 더 좋은 걸까? 그들은 전날 술을 많이 마셨다며 수영장 옆에 콜라를 마시러 나갔다. 한시쯤 무척 시끄럽게 돌아왔는데 콜라에 취한 듯싶었다.


아마 네 명 모두 ENFP일 것이다. 난 정말 자야 한다. 이런 생각에 잠이 더 달아났다. 약속을 무시해버리고 푹 잔 뒤 안나와 요가를 가버리는 게 어떨까라고 생각했을 때는 잠이 완전히 깨버렸고 나는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나가서 수영장 옆에 앉아있는 게 낫겠거니 싶었다.


칫솔을 들고 욕실로 갔더니 누군가 섹스를 하고 있었다. 샤워부스 안에서 물을 틀어놓고 남자가 여자를 들고 있었다. 누가 보나 싶겠지만 반투명한 욕실 문이란 그런 것이다. 조금 놀랐지만 덕분에 남은 잠을 완전히 떨칠 수 있었다. 직원은 대수롭지 않게 욕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는 저 섹스가 아무렇지 않을까. 그리고 왜 이 시간에 청소를 하고 있을까. 나는 직원에게 저 장면을 봤냐고 샤워부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직원은 그제야 휘둥그레지더니 짧게 감탄하곤 하던 청소를 계속했다. 그 정도면 아무렇지 않은 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내가 양치질을 하는 동안 샤워부스 안의 커플은 자세를 바꿨다.





비가 오지 않는다. 

모기가 많다.

새벽에 투어버스를 기다리는 건 불안한 일이다.

이샤가 나타났다. 그녀 역시 잠을 못 잤다. 

인도 영어를 못 알아듣겠다.

수영장에 두꺼비가 수영을 한다.

내가 토-드라고 하자 그녀는 프로그라고한다.


투어 버스에서 줄리를 만났다. 전날 바에서 만난 독일 여자애다. 그제야 이샤가 줄리도 트래킹을 같이 간다고 말해준 게 생각났다. 내가 그녀에 대해 기억하는 건 쾰른에서 왔다는 것, 코에 피어싱이 있다는 것, 덩치가 나보다 크다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반갑게 인사했다. 와우 우리 또 만났네. 그렇다고 그 반가움이 어떤 행세는 아니었다. 굳이 새벽의 피로를 건넜다는 동질감, 얼굴만 아는 이에게 반가운 척 인사해도 나쁘지 않은 묘한 실감 따위가 실제로 우리를 반갑게 만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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