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석을 보는 눈
군대를 갓 전역한 2006년
난 대학을 칼 복학하고, 노원역 근처에 위치한 치킨 숯불 바비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곳에서 꽤 오랜 기간 일을 했었는데, 그때 나와 같이 오래 일했던 아르바이트 생 두 명과 난 아직도 모임을 갖는다. 개인적인 수필이니 그들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영희와 철수쯤으로 해두자.
가게에 손님은 항상 많았지만, 일하면서 서로에게 짜증 한번 부린 기억 없을 정도로 우리는 즐겁게 일했다. 난 사람의 인연을 소중히 하는 편이기도 하고, 둘 다 너무도 싹싹하고, 똑똑하고, 착한 동생들이었기에 우리들의 관계가 10년 넘게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바쁘면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만나서 맥주 한잔씩 하며 근황을 이야기하곤 한다.
영희는 연극배우 지망생이자 21살 대학생이었고, 철수는 영희와 동갑으로 그 당시에는 별다른 꿈은 없는 그저 순박한 더벅머리 총각이었다. 당시에 나도 내 이름으로 된 음반을 하나 갖는 게 꿈이었기에 영희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그녀의 꿈을 멀리서나마 지지했다. 그녀는 작지만, 젊고 아름다웠으며, 힘차고 늘 밝은 아이였다.
어느덧 세월은 흘렀고, 우리는 셋이 모이면 100살 가까이 될 만큼 어른에 가까워졌다. 영희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연극을 그만두었고 회사를 다닌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평범한 삶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당시에 나는 연극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과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바닥의 현실과 그녀의 개인사가 어떤지 알기에 아쉬웠지만 그녀가 어떤 길을 가던 응원 했다.
철수는 힘들고 오랜 조교 생활을 견디고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연구원이 되었다. 또래에 비해서 느리게 가고 있다 느끼는 철수의 맘고생을 알고 있었기에 연구원이 된 것이 내 일처럼 너무도 기뻤다. (더벅머리 청년이 박사님이 되다니.. 대박) 어찌 됐건 동생들의 좋은 소식에 기분 좋게 모임을 하던 어느 날 영희는 내게 한 가지 일화를 이야기해줬다.
아르바이트하던 당시 난 가게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다 거의 막차시간이 다가올 때쯤 간당간당하게 지하철을 타곤 했는데, 역으로 가려면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야 했다. 우연히 영희와 내가 퇴근시간이 겹쳤고, 같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건너편에서 예쁘게 치장한 영희의 친구가 걸어오고 있었다. 횡단보도 중간에서 영희는 그녀와 어색한 인사를 나눴고, 친구가 멀어지자 내게 말했다.
"저 아이는 한껏 꾸몄는데 나는 이제 막 서빙을 마치고 나오느라고 거지꼴이어서 나 자신이 초라하고 창피해"
-내가 말했다.
" 저 아이는 인생의 정점이 오늘 일 수도 있고, 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니까 부러워하지 않아도 돼"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놀랐었다. 애석하게도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놀란 이유는 그날 이후 내가 누구에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석이니 뭐니 하는 뜬구름 잡는 말보다 누가 재능이 있고, 누가 능력이 없는지 판단하고 나름의 현실적인 잣대를 들이대 왔는지도 모른다. 난 세월의 거친 모래먼지에 원석을 보는 눈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영희는 얼마 전 돌연 퇴사를 하고 지금 유럽을 여행하고 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몇 주 정도 그저 여행을 하고 오고 싶다고 말했다. 서른이 넘은 적지 않은 나이. 그녀가 돌아와도 삶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을 다듬고 있는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세상은 험하고, 각자 지켜야 할 것들이 있기에
순진할 수는 없지만, 순수함은 간직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