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지 않은 특별함
난 서른 중반이 다 돼서야 해외를 처음 나가봤다.
나름대로 또래에 비해서 많은 경험을 하고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난 엉뚱하게도 기본적인 부분에서 뒤처진 삶을 살아왔다. 자동차를 운전한지는 불과 몇 달이 되지 않았고, 맛집을 탐방한다던지 호텔 뷔페는 가본 적이 없다. 국내여행도 가본건 한 손으로 셀 수 있고, 부산도 가본 적이 없으며 해외는 작년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그야말로 서울촌놈이 아닐 수 없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은 탓이었는지 음악 작업과 관련된 일이 아니면 항상 TODO 리스트에서 빠지거나 맨 아래로 밀려났다. 일 중독자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좋아하는 일에 중독됐다는 것쯤일까? 사실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해봤어야 좋아하지..) 여행을 즐기기에는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러던 중 작년에 뮤직비디오 촬영을 빌미로 일본 여행을 계획했다. 사실 뮤직비디오는 핑계였고, 촬영이 잘되면 좋고 만족할 만한 촬영을 못하더라도 새로운 환경에서 뭔가 느끼고 오기를 기대했다. 함께 가게 된 일행은 나의 23년 지기 친구와, 같이 작업을 하고 있는 영상팀 쿠조형제(Kujobros), 나. 이렇게 남자 4명이었다. 일본 여행. 그것이 서른이 넘은 나의 첫 외국 여행이었다.
인천공항에서의 들뜬 기분도 잠시.. 막상 현지에 가니 그다지 큰 흥이나,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직접 눈으로 처음 보는 것들이 즐비했고, 음식들도 너무 맛있었지만 도무지 내 기분은 올라가지 않았다. 영감을 받을만한 더 신기한 장소와 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녔지만 귀국 때까지 큰 영감을 얻지는 못했다. 작은 부분에서도 큰 것을 느끼는 것이 나의 장점이라 항상 생각해왔는데 좀 이상했었다.
주변에서는 여행지가 같은 동양계라 그런 것이라고 말했고, 서양으로 여행을 가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것에 반응해 왔기에 이제는 웬만한 자극이 아니면 크게 동요되지 않게 심장이 망가졌나 싶었다.
며칠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시간이 좀 지났을 때, 쿠조팀이 일본에서 촬영한 영상으로 하나의 동영상을 제작해서 나에게 줬다. 영상 속 우리들은 해맑게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일본 여행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여행 당시에는 시시했었는데, 기억을 더듬으면 즐거운 기억이 가득했다.
한국은 열렬한 교육열 때문인지 경험에서 무언가를 꼭 얻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를 봐도 미술을 봐도 여행을 가도 가슴속에 뭔가를 느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는 거 같다. 나도 그런 주입식 교육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대 히트 영화이다. 매출은 중국이 1위, 한국이 2위였지만 우리나라와의 인구수를 비교해보면 흥행률 면에서는 우리나라가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인터스텔라는 한국에서 심오한 과학 영화의 이미지가 깊이 박혀있다. 사람들은 영화에 나온 과학 이론을 들춰내면서 희열을 느낀다. 심오한 양자역학의 내용을 담았기 때문에 유달리 한국에서 빅 히트를 한건 아닐까 싶다.
한편 감독은 상하이 개봉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가족애, 아버지의 가족사랑에 초점을 두고 보기를 바란다는 뉘앙스를 남겼다.
결국 난 내 여행의 문제점을 찾아냈다. 난 그냥 일본 여행을 즐기지 못하고, 여행이 나에게 대단한 영감을 주기를 바랐던 게 문제였던 것이다. 여행 당시에는 충분히 즐거웠다. 우리가 남긴 사진과 영상에 나온 나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내 안에서 더 큰 영감을 원하며 뭔가를 얻어가려고 급급했기에 당시의 즐거움을 온전히 맛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 후로 난 몇 번의 해외여행을 다녀왔고, 이제는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기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상황 그 자체를 즐기는 기분. 주어진 환경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시선 같은 것 말이다. 그게 여행과 같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생활이라도 충분히 찾을 수가 있다. 모든 건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나이가 들어서 마음이 병드는 게 아니라,
마음이 병들어서 나이가 드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