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딸이 이기적으로 살기 바란다-정연희

진짜 이기적인 것

by Harong


나는 항상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에 관해서는 글쓰기를 피해왔다.


나 외의 누구와도 생각과 가치관이 100%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과, 논란의 불씨를 지필만한 자그마한 그 어떤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은 완전주의적 사고 (Perfectionism, Doctrinaire Approach) 또는 어설픈 알트루이즘(Altruism)적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나한테 이러한 사고와 성향이 있을 수 있겠다는 것도 이 글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었다.


책모임을 하면서 이 작가에게도 완전주의적 사고 (Perfectionism, Doctrinaire Approach)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챕터마다의 결말을 작가가 의도적으로 '균형 있게' 또는 '평화적으로' 맺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대부분의 나의 글들이 이 작가와 비슷한 결말을 맺는 것 같아서 뜨끔했다.

내 삶의 모토가 있다면 늘 균형과 사랑이라고 말해왔다. 내 삶엔 늘 '불균형'으로 인한 갈등과 어려움이 생겼었고 그것을 바로 잡을 때면 기울어져있던 무게추가 균형을 이루며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어떠한 주제와 사상에 관해선 한쪽에 완전히 무게를 싣기보단 조금이라도 중립을 지키려 애써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이 성향이 한쪽을 명확히 하는 쪽에게는 내가 꽤나 자기 보호적이여 보일 수 있겠다 싶다.


나의 성향을 관통해 이 책이 나에게 일러준 것이 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도 '균형'이다.

하지만 이번 균형은 주제에 대한 입장보다는 그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의 균형이다.

첫 번째로 이 책은 단순히 여성을 위한 페미니스트적인 서적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지나온 불평등을 바라보고 여전히 공평하지 않은 부분들에는 좀 더 무게를 실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어머니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이기적으로 살라’고 권고하는 편지와 같은 책이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결혼, 육아, 양육, 직업 등에서 '나를 위한 선택'을 하라고 얘기하고 있다. 나에겐 그것이 이기적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마땅히 나를 지키고 나를 사랑해야 다른 누군가도 돌보며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비단 여성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메시지이다.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고, 행복을 선택하는 용기를 배우게 한다.


너는 너를 최우선으로 두는, 너를 최고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기 바란다. 더 큰 자유와 더 넓은 세상과 더 평등한 세상을 위해 엄마인 나를 할 수 있는 한 힘껏 외면하고 부정하렴. 그리고 너의 새로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가렴.
듣는 부모 말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자식은 부모 사랑도 먹지만 두려움도 함께 먹고 자라니 말이다. 세상은 바뀌고 있었고, 나는 부모의 두려움을 먹기에는 너무 어렸으며, 부모가 너무 바빠 집안의 막내딸과 마주할 일이 많지 않아 내겐 어둠이 곧 친구 같았다.
추운 겨울, 발에 맞지 않는 큰 스케이트를 신고 수없이 넘어지고 온몸이 젖으며 배운 것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것이었다. 발이 휘휘 도는 오빠의 스케이트지만 신고 달리지 않으면 넘어질 일도 없음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없음을. 넘어지지 않고서 어찌 일어나는 법을 배우겠는가? 발에 맞지 않는 스케이트라며 꺼내 들고 빙판에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들과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잣대가 다름을 그리도 명료하게 알았겠는가? 나는 달릴 수 있는 한 늘 달렸고, 내가 달려가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고 넘어설 수 없음을 알았다. 어린 나는 세상의 불평등은 모르되 집안에서의 불평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그걸 넘는 방법은 나 스스로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안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을 겨울바람처럼 명료하게 깨달았다.
부모는 자식이 모르는 선물을 한가득 주고 떠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선물 꾸러미에 무엇이 있는지 그건 나만 알고 있고, 나만 꺼내 볼 수 있는 것이어서 부모는 선물을 줘놓고도 그 선물이 어찌 열릴지 바라보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일들과 소소한 불화들이 우리 인생에 모래알처럼 깔려도 결국 선물 꾸러미를 열어 키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존재는 나 이외에는 없음을 아버지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내게 알려줬다.
무심코 생각하면 사랑의 기술은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니 상대에게 사랑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26년 결혼해 살아보니 그게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다. 그러니 대충 하다 말 기술이 아니라는 데에 고단함이 숨어 있다. 이기적이어도 보통 이기적인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재미나고 요사스러운 것은, 사랑은 대상을 만나면 끝은 내가 좋아야 하되, 과정은 상대의 만족, 기쁨, 해소, 평안과 직결된다는 사실이다. 정말 해괴하기 그지없는 사랑의 기술은 한껏 기술을 사용하되, 그게 기술로만 보여서도 안 되고, 사랑의 기술 대가의 반열에 오르려면 지치지 않는 ‘실천’과 ‘단련’으로 끝없이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되, 연마하지 않은 듯 보임이 미덕이란 사실이다. 그러니 까놓고 말하면 사랑의 기술은 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이지만, 이게 결국은 ‘상대도 좋아 죽을 지경’이 돼야 하니 ‘참 어려운 문제’다
‘남편을 잘 사랑해 사랑의 기술을 구현해 보리라.’ 왜냐하면 이게 결국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가장 강력한 방편’이니 말이다.
결혼 후 남편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남편의 거울에 비친 내 세계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내게 있어 결혼은 인간을 이해하는 창, 사랑을 실천하는 장, 결국 ‘나를 파악하는 문’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살면서 말에 행동으로 답해야 할 때가 있다. 말의 무게를 행동으로 지는 사람만이 진실하다. 수많은 사랑의 언어가 바람같이 시간에 날리는 이유는 그저 말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참 축복받은 아내고, 며느리다. 말의 무게를 행동으로 갚는 남편을 두어서, 그런 멋진 아들을 둔 시부모님을 두어서 말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수년의 시월드 부등가를 한 번에 등가로 바꾼 게 아닌가? 시월드의 부등가를 단박에 등가로 바꾸는 순간을 난 절대 놓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엄마들은 죄책감을 조금 내려놓길 바란다. 아이들은 부모의 땀을, 고통을, 노고를 모르는 듯해도 모두 보고 있으며, 부모와 떨어져 있는 여백의 시간에 스스로 영글어가는 시간을 가지니 말이다. 나의 어린 시절 엄마가 이런저런 학원 스케줄로 매 순간을 채워 넣었다면 내가 과연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아마 내 인생이 왜 이리 고달플까 하며 인생 쉽지 않구나, 했을 게다. 그러나 그 시절, 사과밭 원두막에 앉아 있던 시절, 내가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사과나무에 매달린 빨간 사과를 보던 때 엄마는 순수한 노동을 하며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내게 주어 사과가 익듯 생각이 영글 시간을 주었다.

그럼에도 여성이 처해왔던 상황과 불평등했던 전통에 대해서는 조명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 작가가 의문을 던졌던 모든 챕터들이 다 공감이 되고 동의하는 부분이다.


딸을 키우며 “왜 밤에 돌아다니냐, 일찍 집에 와라” 소리를 하지 않았다. 늦게 들어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부모가 동행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흔쾌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함께해 주었다.
제아무리 부모가 많은 지원과 자유를 줘도 자식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부모가 아무리 높은 담을 쳐도 자식이 넘어서려 하면 말릴 수 없다. 나는 운이 좋았다. 한국의 전형적인 고집 센 아버지가 내 투쟁력을 높여줄 때, 엄마는 마음 졸이며 선 밖으로 나를 밀어주고 응원해 줬으니 말이다.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엄마는 고래같이 크고 단단했다. 못 배운 엄마가, 순한 외할머니와 뜨개질하고, 봄이면 산나물 캐기를 좋아해 이 산 저 산 나물바구니를 들고 다니던 소녀가 고래처럼 깊은숨을 쉬며 우리들은 편안히 선을 밟고 넘고 살게 해 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저는 남편에게 허락받는 존재가 아니에요. 내 인생을 누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어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거죠. 이제 제가 존중받을 때라 생각할 뿐이에요.”
혹 너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너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건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란 걸 분명히 알아두렴. 네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육아와 집의 화목을 이유로, 남편의 일과 딸같이 여긴다는 시부모의 권유로 너의 선택이 침해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란다.
대한민국 수많은 여성이 명절이면 소화가 안 되고, 화병이 도지고, 이혼을 하니 많이 하는 문제는 늘 우선권이 여자에게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제는 내 자식을 위해서라도 나의 선택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을 하다 대학에서 강의할 좋은 기회가 들어왔을 때도 축하보다는 다 때가 있는데 그러다 둘째는 언제 낳을 거냐는 타령을 하는 양가 부모님들. 남자들은 당연히 축하받을 일을 같은 일이라도 여자는 가족을 위해 이런저런 희생을 강요당하며 포기하거나 죄의식을 갖고 해야 하는 문화.
무수한 딸들의 하루가 모여, 딸들의 양보와 선의가 모여 조상들은 남성 중심 문화를 형성했다. 여성들이 하루의 양보를 허락하지 않고 살았다면, 지금의 문화는 달랐을 게다. 하루하루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사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별거 아닌데. 이것 하나는 그냥 내가 하지" 하는 수많은 양보들이 쌓여 남성에게 기득권을 안겨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할머니는 문화에 충실했을 뿐이에요.'

할머니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들이 그것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작가인 엄마가 아들에게 뭐라고 잔소리를 하는 대목에서 아들이 엄마에게 한 말이다.


그 시절에 전통이었을 뿐이고 어쩌면 문화의 희생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라며 과거를 왜 끌고 오느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 아직도 남아있는 남녀 갈등과 성차별이 잔존하는 한 그것을 그저 과거일 뿐이라며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변화는 언제나 과거를 인지하고 그것을 바꾸고자 '노력'할 때 조금씩 완전을 향해 가는 것이니까.


작가가 남편과 대화할 때 남편이 말했다.

'아이들에겐 우리의 말이 정답일 수 없어'.


자식은 태어나며 부모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개체이며 독립적이어야 하고, 사실은 남이다.


그러나 내 아이라는 이유로,

내 부모라는 이유로,

나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내 친구라는 이유로 너무 당연하게 나의 것을 요구하거나 내 생각과 말대로 해주었으면 하는 '진짜 이기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닌지.


결국 전통적인, 문화적인, 종교적인, 정치적인, 인종적인 차별은 기득권이라 여기는 '내가' 마땅히 원하는 대로, 내게 필요한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채우고자 하는 '진짜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


나의 결핍을 왜 다른 무언가로부터 채우며,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 생각하는지. 거기서부터 출발해봐야 하지 않을까.

사람은 너무 많으나, 영혼은 너무 적다.


끊임없는 전쟁과 환경오염, 사상과 가치관의 생명까지 거는 충돌, 자본주의에 가려져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고 무엇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지경.

다른 것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

진짜 이기적인 게 뭔지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사람은 많으나 영혼은 너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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