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김애란

지나친 일상

by Harong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은 제목 그대로 서로 다른 계절의 시간대에 서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응시한다. 작가는 "안에서는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라고 밝히며 이 단편집의 정서를 설명한다.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고독이며, 그 고독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선한 의지다. 《바깥은 여름》은 결국 비극과 행복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보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침투하고 변형시키는 과정에 더 큰 관심을 둔다. 인물들은 눈에 띄는 성장을 이루거나 극적인 구원을 경험하지 않는다. 대신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감각-멈추지 않고 나아가려는 의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획득한다. 이 단편집이 남기는 여운은 지나친 위로가 아니라, 삶의 결을 현실적인 범위 안에서 다시 바라보게 하는 차분한 통찰이다.

[한국소설] 바깥은 여름 / 김애란 단편모음 / : 네이버 블로그



작가는 서로 다른 계절의 시간대에 서 있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하며 지은 제목. <바깥은 여름>을 만났다.



7가지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상실과, 아픔, 고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이어지는 것, 그 지나친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미혼모라는 사회적 시선 속에서 살아가는 두 사람. '엄마는 아빠와 왜 헤어졌냐'는 물음에 아들에게 저렇게 구체적인 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화자의 마음속 대답이 마음에 많이 남는다.


서로 포개어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면서도 이별을 선택하지 않는 건 한쪽의 희생과 사랑이 좀 더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지만 만나게 된다면 어느 한쪽 누군가의 존재 방식의 변화가, 엄청난 힘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힘을 견뎌내었을 거란 이해가 되는 요즘이다. 기꺼이 그래줄 수 있는 타인을 만난다는 건 축복이다. 나는 기꺼이 누군가를 위해 그래줄 수 있는 사람일까.


결국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이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침묵 속에서 자신이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 애썼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스스로를 다독이고 설득하는 데 다 썼다. 누구든 세상에 홀로 남겨질 수 있고 마지막 화자가 될 수 있지만 그게 하필 '나'라는 걸,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테며, 그 사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거란 걸 납득해야 했으니까.

인류에 마지막 남은 소수언어 민족들의 마지막 화자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 누군가와 내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 둘이서 셋 이상이면 더 좋고. 농담하고 위로하고 유혹하고 즐거울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이 없는 삶은 어떤 삶일까. 내가 인류에서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인류라면. 그 삶은 고독하다 못해 매일매일 알 수 없는 물음에 나 자신을 다독이며 꾸역꾸역 살아내야 할 것이라는 게 너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모르겠다. 나는 같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축복에 감사하면서도 그것이 완벽한 축복일까 생각하게 된다. 같은 언어를 구사할 뿐 소통이 되지 않고 도리어 오해를 일으키고, 솔직하지 못하고 속이고 상처 주는 말들을 하는 게. 어쩌면 '완벽한 축복'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와 100퍼센트 통하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완벽히 이해하고 솔직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대화가 가능할까. 삶은 그렇게 99.0... 소수점 이상을 높이려 노력하며 애써야 하는 걸 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에는 '나를 버려야만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곳에서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남학생 제자를 구하려다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자. 영국에 한 지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추슬러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어려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한 달 안 되는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그 제자의 누나가 보낸 편지가 와있었다. 그 편지를 읽으며 여자는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이지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날 남편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결국 할 수 있었던 건 삶이 삶에게 뛰어든 것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을 낸 것이다. 죽기 위해 뛰어든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 생명을 보고 자신의 몸을 내던진 걸 거다.


사람이 사람에게 뛰어드는 일. 배반당하고 상처가 나고 허물어지고 죽음까지 간다 하더라도 그리고 이 모든 게 반복된다 해도 인간은 결국 인간에게 뛰어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든 걸 다 고려하고 계산해서 안 뛰고 대충 뛰어들 수 없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도 들새 없이 그냥 뛰어드는 거다.


상대적으로 튤립은 다른 꽃보다 짧은 수명을 가지고 있다.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빨리 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튤립은 인기 있는 꽃이다. 무엇보다 아름답다. 영화 <위키드>에서 900만 송이의 튤립이 무지개처럼 펼쳐져 있는 장면이 아직 생생하다.

희망적인 건 튤립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물과 온도, 환경, 무엇보다 구근(알뿌리)이 튼튼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튤립이 오래갈 뿐만 아니라 완전히 다 지고도 있던 자리에 다시 꽃 피울 수 있다.


오래 꽃 피울 수 없다는 이유로 멀리하지 않기로 했다.

그 꽃은 어쩌면 어떤 이유에서든 오래 지속할 수 없는 성질이 되어버린 이유가 있을 거라고. 좋은 원예가를 만나면 그 꽃이 활짝 , 더 오래 꽃 필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구근을 더 튼튼하고 강해지도록 도울 수 있다는 걸. 그런 일은 사람이 사람에게 뛰어드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다칠 수도 있고 아파서 죽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일.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돌보는 일. 도리어 살리는 일. 미리 판단하고 재단할 새도 없이 삶이 삶에게 뛰어드는 일. 오래 지속할 수 없고, 결말을 알 수 없고, 결국 다 져버리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일. 그런 사랑을 자주, 아니 꼭 한 번쯤은 모두가 해봤으면.




나는 이 글의 소제목을 '지나친 일상'이라고 정해봤다.


아프고 상처 나고 쓰러지고 상실이 나를 짓눌러도 우리는 다시, 또 반드시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난 이러한 사실이 너무 '지나칠 만큼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인 아픔을 겪고도 현실을 바라봐야 하는 아픔이 너무나 지나치고 어떨 때는 삶이 참 무례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냥 그 사실을 '그래도 희망이 있다'라고 위로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잘 겪어내어 보자고 말하고 싶다.


죽을 만큼 아파하고 때로는 이따금씩 떠오르는 상실에 무너지기도 하며.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마음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렇게 아픔이 상기되는 텀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다 보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희미해져 가기도 하니. 그 지나친 일상을 잘 살아내 보자.


서로가 99퍼센트까지라도 이해하고 위로해 보며. 마지막 1퍼센트는 내 인생의 몫이니 그 고독은 오롯이 내 것임을 또한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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