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분석을 받다. (1)
상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여 상담에서의 역전이를 줄이고 성장하기 위해 개인상담을 받는 것을 교육분석이라고 한다. 좋은 선생님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2019년 3월부터 시작하여 출산 전인 2020년 6월까지 주 1회, 총 60회 정도의 교육분석을 받았다. 서울에 계신 선생님이어서 지방인 직장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매주 서울을 다녀왔다.
따뜻한 색감의 우드 인테리어와 식물들이 어우러진 상담소는 정갈했다.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하면서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발가락이 꼼질거렸다. 선생님은 50대의 여성분으로 중성적인 느낌의 편안한 인상이셨다. 체형도 왜소하고 예민한 성격의 엄마와는 반대의 인상이라 편했다. 안락한 소파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씩을 사이에 두고 상담은 시작됐다.
내가 처음 한 말은 "요즘 너무 화가 나요."였다.
특히 엄마에게 화가 나서 한동안 엄마를 보지 않고 있던 시기였다. 그전까지의 나는 화가 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와 싸우는 일도 전무했다. 갈등 상황이 생기면 내 잘못인 것 같아 사과했었으니까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잠이 안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와의 최근 일들은 물론이고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들까지 떠올라 가슴이 터질 듯이 화가 났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기대는 늘 높았고 나는 자주 실패했다. 90점을 받아오면 95점을, 95점을 받아오면 100점을 바라던 엄마였다. 엄마에게 들은 가장 아픈 말은 '넌 언제나 내 기대의 턱 밑까지 밖에 못 온다.'였다. 그 말을 듣고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엉엉 울었었다.
" 왜 그토록 엄마의 기대에 부흥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물으셨다.
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다는 마음은 가득했지만 왜 하고 싶었는지는 잘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잠시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의 동기에 대해 처음 생각해보는 것이 생소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제가 잘했을 때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엄마는 5남매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지만 20살이 되기 전에 외조부모님은 돌아가셨다. 그 뒤 외삼촌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선으로 만난 가난한 집의 장남인 아빠와 결혼했다. 너무 다른 집안 환경과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엄마는 결혼생활 동안 서러움을 많이 겪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외출하고 돌아온 엄마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잠그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문을 열어달라고 해도 엄마는 답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영문도 모른 채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새된 목소리로 꺼이꺼이 우는 엄마의 울음소리는 공포스러웠다. 나도 무서워 어쩔 줄 모르겠어 울면서도 동생을 달랬다. 어렸지만 엄마가 우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엄마는 임신 중이었는데 모두가 아들일 거라며 항렬자를 넣은 이름까지 지어둔 상태였다. 몇 번의 유산을 한 후 늦은 나이에 찾아온 아이였고 할머니가 자주 가는 점집에서 이번에는 무조건 아들이라고 했기에 집안은 경사 분위기였다. 그런 엄마가 병원에 다녀와서 우는 것이니 아기가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들을 그렇게까지 바라는 할머니, 할아버지도 원망스러웠고 딸인 우리들은 소용없는 존재인 것 같아서 서러웠다. 엄마가 저렇게 슬픈데 도울 수 없는 내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빨개진 눈으로 나온 엄마는 울고 있던 우리에게 설명도 없이 평소처럼 저녁밥을 차렸고 나는 엄마가 집을 나가지 않은 것에 안도했던 것 같다.
어린 눈에도 엄마가 힘들어 보였고 사춘기쯤 되자 엄마도 나에게 힘든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업주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산 엄마에게 자식은 인생의 전부였다. 엄마는 스스로에게는 인색했지만 우리들에게는 좋은 것만 주려는 희생하는 엄마였다. 엄마가 힘들었어도 끝내 가정을 지킨 것은 자식들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 엄마가 내가 가져온 성적표에 웃을 때면 엄마를 조금은 행복하게 한 것 같아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희생에 보답한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마를 행복하게 하는데 나의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불행한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노력하면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불행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착한 딸이고 싶었다. 그런 어린 마음을 간직한 채로 몸만 자라 어른이 되었다.
"정인 씨가 누구를 구원할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이 말에 순간 머쓱해지면서도 정신이 확 들었다. 누가 누굴 구원한다는 말인가. 내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오만함이란. 어렸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믿은 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노력해서 엄마를 행복하게 하고 불행한 삶에서 구원해주고 싶다는 소망은 눈물 나게 진심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마는 엄마가 선택한 인생을 살고 있었고 그에 대한 후회도 변화도 엄마의 몫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불행을 나의 불행처럼 생각한 나는 엄마와 너무 융합되어 있는 상태였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행복함을 느끼면 동시에 '나만 행복해도 되는 것인가'하는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가 불행해도 나는 행복할 수 있는데 말이다.
최근에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는 어이없어하셨다. 네가 그런 걱정을 왜 하냐고. 엄마는 힘들기도 했지만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그때 느낀 배신감과 충격이란(부들부들). 엄마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이유들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에 매몰되어 나는 엄마의 다른 면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엄마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내지 않은 나는 지금에서야 혹독하게 대가를 치르고 있다. 내 삶의 에너지를 온전히 나에게 쓰지 않고 엄한 곳에 너무 많이 써버린 나는 소진되고 말았다.
중간에 한 번이라도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라면 내가 더 빨리 그만둘 수 있었을까. '엄마는 잘 살고 있으니 정인아, 너는 너의 인생을 살렴.'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내가 그 말을 믿고 내 삶을 살기 위해 엄마를 떠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요즘 나는 듣고 싶었던 그 말을 스스로에게 해주면서 엄마에게서의 독립을 아프게 하고 있는 중이다. 무너진 내 일상을 구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