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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Nov 19. 2019

"평론"의 종말, 그 서막이 올랐다!

공정성 논란에 휘말린 “미슐랭 가이드”

'미식'의 성서라고 불리는 119년 전통의 "미슐랭 가이드"가 한국에 와서 공정성 논란에 휘말리며 시련을 겪고 있다. '백종원'과 쌍벽을 이루는 한국의 음식 평론가 '황교익'은 지난 11월 15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미슐랭 가이드의 신뢰, 명성에 기대 한국판을 발간해 달라고 지난 2016년 한국관광공사와 한식재단이 20억을 줬다"며 "미슐랭 가이드에 대한 권위, 신뢰, 명성이 다 무너졌으니 계약 위반으로 돈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적인 레스토랑 가이드로 잘 알려져 있는 ‘미슐랭 가이드’는 레스토랑의 음식을 별로 평가하는데, 그 평가 방식이 매우 공정하고, 절대적이어서 별을 받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에선 생활의 지혜인 '꼼수'가 안 통한다는 말이다. 그런 '미슐랭 가이드'가 대한민국의 꼼수에 말린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문제가 있었는지, 공정성 논란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다음은 나무위키에서 가지고 온 '미슐랭 가이드'의 평가 방식이다.

가이드의 평가원(Inspector)은 요식, 호텔, 케이터링 업계 경력이 있는 미쉐린사의 정직원으로, 일단 해당 지역에 대해 타당성 조사가 몇 차례 진행된 뒤에 투입된다. 평가원은 절대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으며, 당연히 모든 요리 대금을 지불하는 것이 원칙이다.
가이드 발간을 위해 편집자들과 평가원들이 동석한 자리에서 별점 수여 여부를 결정하는 스타 세션이 진행된다. 이 과정은 만장일치가 원칙이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며,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적어도 세 차례 이상 다른 평가원들이 식당을 방문해 심사를 하게 된다.
여기서 한번 받았다고 끝이 아니며, 정기적으로 재심사를 걸쳐 재고의 여지가 있으면 별을 박탈하므로 무작정 별을 받았다고 안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편 평가원들의 평가 기준은 다음의 다섯 가지다.
•요리 재료의 수준
•요리법과 풍미에 대한 완벽성
•요리의 개성과 창의성
•가격에 합당한 가치
•전체 메뉴의 통일성과 언제 방문해도 변함없는 일관성 (from 나무위키)

난 개인적으로 '미슐랭 가이드'의 공정성 유무엔 별 관심이 없다. 사람마다 다른 입맛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논란을 사회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면 꽤 구미가 당긴다. 대략 세 가지를 짚어보자.


첫 번째. 보편을 넘어선 주관

앞에서도 언급했듯 입맛은 주관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주관의 영역이 지금까지는 보편의 영역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 보편의 폭력에 용기 내어 맞설 수 있는 주관이 조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바야흐로 직접 민주주의의 바람을 타고 그 폭력적 보편에 반기를 들만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주관의 힘이 강해졌다. 미슐랭이고 나발이고 음식의 맛은 내가 먹어보고 평가하면 된다. 맛이 없다고? 그럼 그 식당에 다시 안 가면 된다. 살기 바빠 죽갔는데, 밥(음식의 대유) 먹을 때도 평론가의 눈치를 봐야 하겠는가? 뭐 밥을 두 시간 넘게 먹는 프랑스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대충 끼니 때우고 딴짓을 해야 하는 나라다. 애초에 한국관광공사와 한식재단이 뻘짓을 했다는 말이다.


두 번째, 자본과 결탁한 평론

수렵과 채집을 하던 원시시대 노동의 목표가 '생존'이었다면, 농경시대 노동의 목표는 '생산'이었다.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부가가치, 즉 이윤을 만들어 내지 않는 노동은 한국관광공사나 한식재단이 한 일처럼 뻘짓이 된다. 먹고살 길을 따로 마련한 상태에서 자발적 취미로 하는 평론이 아니라면 평론이 관련 분야의 자본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란 쉽지 않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접근성이 용이해지면서 많은 소비자들은 생산자가 아닌 같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제품에 대해 평가를 하는 소위 파워 블로거의 후기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파워 블로거가 후기로 돈을 벌어먹기 위해 후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특정 분야에 자발적 관심이 있고, 그 관심을 글로 쓰며 영향력이 커졌고, 그 과정에서 자본의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파워 블로거의 후기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소비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세 번째, 전문성의 종말

소품종 대량 생산의 시대, 모든 생산은 자본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 제작자는 투자자를 모집해야 했고, 노래를 음반으로 내기 위해 가수와 작곡가는 시계와 믹싱 콘솔을 번갈아 쳐다보며 스튜디오에서 녹음과 믹싱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많은 저자들은 나처럼 책을 내기 위해 출판사 사장이나 에디터의 간택을 기다린다.

자본의 의도와 무관하게 과학기술의 발달로 자본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뒷말이 있기는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아이폰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대부분의 음악은 홈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처럼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매일 글을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워가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꿈에 그치겠지만... 지금은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가 아니라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다. 그래서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이 롱테일 전략을 내세운 "아마존"이다. 개인을 집단이 압도했던 소품종 대량생산의 시대, 백화점 매출의 80%는 상위 20% 제품이 담당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간파한 아마존은 매출이 낮은 80%의 긴 꼬리에 주목해 성공했다.


'미슐랭 가이드' 논란은 굳이 전문적일 필요가 없는 음식 평론 영역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 평론가인 백종원과 황교익은 그 포지션이 미묘하게 차이가 난다. 백종원은 잘 모르지만 자신의 전문성을 영세 식당과 융합시키고 있고, 황교익은 음식과 인문학을 결합해 주가를 올리고 있다. 음식이라는 분야는 전문성이라는 벽돌로 세워진 근대라는 아성의 가장 약한 고리 중 하나이다. 누구나 라면을 비롯해 내세울 수 있는 음식이 한두 개쯤은 있다. 내가 자신 있는 음식은 누룽지다. 난 밥이 타 들어가는 냄새만으로 누룽지의 눌은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사실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에 균열이 가고 있다. 정치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문성의 균열이 바로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정치를 더 이상 소수 전문가에게 위임하지 않겠다는 정치 전문성에 대한 불신의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교육 분야에선 학교가 마을에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는 혁신교육지구를 전국 226개 중 150개 기초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하고 있다. 최근 평론과 가장 가까운 언론을 보면 그 몰락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짜뉴스를 남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부르짖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늙으면 죽어야지...


어렸을 적 할머니로부터 매일 들었던 말이다. 그 말은 늙었지만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존재감의 표시이다. 전문성은 자신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더 거세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용기 있는 개는 사람을 향해 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크게 자신의 존재감을 짖어대는 전문성이 그 몰락의 위기를 가장 크게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문성이 가장 먼저 몰락할 것이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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