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회학 Prologue, "슬기로운 백수생활"을 위하여...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대략 5개월째 반백수로 지내고 있는 나는 하루하루가 바쁘다. 하는 일이 없어도 바쁘고, 하는 일이 있으면 더 바쁘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땐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웃으며 흘려들었는데, 막상 내가 그 처지가 되니 진지하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단 브런치 생산량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가끔 속도 모르는 지인들은 백수가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묻는다. 그래서 "슬기로운 백수생활"을 위해 왜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지 진단해 보기로 했다. 고기도 먹어봐야 맛을 안다고, 반(半?, 反?)자발적으로 백수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시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진단이기 때문이다.
1.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백수가 늘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직장이라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만 하면 많은 것들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정해진 회의, 루틴한 업무, 심지어 극심한 정신노동을 동반하는 점심 메뉴의 선택도 그저 대세에 따르면 그만이다. 반면 백수는 모든 행동을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언제 일어날지,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자신의 모든 행동에 익숙하지 않은 정신 노동을 해야 하니 직장을 다닐 때보다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
2. 게으름이 과로로 이어진다.
아무리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도 10중 8, 9는 출근이라는 통제에서 벗어나는 순간 게으름에 빠지게 된다. 예전에는 새벽에 눈이 떠지면 다시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자칫 출근해야 할 시간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긴장의 불면 속에서 예전의 난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지금은 아침에 눈이 떠지면, 먼저 고민을 한다. 일어날까? 일어나도 할 일이 없다. 백수 남편이, 아빠가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을 떠는 모습을 기꺼이 감수해 줄 수 있는 배려심 충만한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더 누워 있을까? 그 고민을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들고 만다.
마침 해야 할 일이 생겼는데, 시간이 없다. 게으름에 빠진 자신의 상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게을러지니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으니 바쁘고, 바쁘니까 피로감을 느끼고, 피로감을 느끼니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 백수의 오지랖은 과로의 근원
일단 백수가 되고 나면 주변의 다양한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실질적 과로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것 자체가 미안하고, 주변의 부탁을 반복적으로 거절할 경우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도 양심에 미안함이 누적된다. 나처럼 '착한 아이뼝'에 걸린 캐릭터는 더더군다나 문제가 된다. 얼마전 선배의 부탁으로 일을 하나 했는데,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백수인 나의 처지를 어느 정도 어필한 터라 그래도 최소한의 금전적 보상은 있겠지... 생각했다가 크게 내상을 입었다.
4. 잡념이 많아진다.
직장에 다닐 땐 생각이 아무리 많아도 중심 생각과 잡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일의 우선 순위를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백수로 살고 있는 나는 지금 일에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백수가 하는 생각은 그저 상상으로 시작해 공상으로 끝나는 잡념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그 생각을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과 만나지 못하면 헛된 공상으로 끝이 난다. 내 공상이 누군가를 만나 그것이 정책이 되든, 문화콘텐츠가 되든 구체화되기 이전까지 나는 그저 계속 과로에 시달리는 백수일 뿐...
아, 피곤해~
5. 뻐뜨, 그러나...
백수가 과역 백해무익하기만 할까? 풀꽃도 꽃이고, 개똥도 약으로 쓰일 기회가 있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백수라고 쓰일 데가 없겠는가? 농경에 기반한 대가족 문화의 기준으로 보면 산업사회의 핵가족은 말세의 징조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토드 로즈는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했다. 우리는 하루 사이에도 천지가 개벽하고, 그 천지가 어떤 모양으로 개벽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불확실성의 시대에 생산력 확대에만 몰입해 온 인류가 미래 인류일지도 모를 백수를 비난할 수 있을까?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면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본의 채찍질에 저항하고 있는 백수가 마을을 구하고 나아가 세계를 구할지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쓰게 되었다. 당당하게 말하자, 인류가 당면한 노동의 새로운 목표를 개척해 가고 있는, 나는 백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