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 성장? 백수주도 성장! 1

백수의 사회학 #5

by 낭만박사 채희태

촛불시민이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경제 공약(公約)으로 “소득주도 성장”을 들고 나왔다.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삘이 딱 왔는데, 말이 함축적이고 어려워서인지 별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행 중 불행인지, 불행 중 다행인지,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록다운에 걸리자 그동안 눈치를 보고 있던 기본소득 논의가 급물살에 올라탔다. 기본소득은 사회주의 정책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며 반대하던 보수당도 총선을 앞두고 재난지원금 100% 지급을 공약(空約)으로 내걸었다. 필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공약인 소득주도 성장을 백수와 연결시켜 한번 설명해 보겠다. 경제 이론이라는 게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 분야라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얼마 전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의사로 나왔던 김사부의 제자 유연석의 가르침대로 한번 최선을 다해 보겠다.


1. 소득주도 성장의 반대말은 소비주도 성장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악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상대적으로 선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소득주도 성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소득주도 성장’을 이해하려면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소비주도 성장’을 이해하면 된다. 소비주도 성장? 사실 따로 설명할 것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이라고 보면 된다.


소비주도 성장은 말 그대로 소비가 주도하는 성장이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소비주도 성장이 절대 소비자가 주도하는 성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소비주도 성장은 과잉생산을 해야 더 많은 이윤을 챙기며 생존할 수 있는 생산자(자본)가 주도하는 성장이다. 과잉 생산한 제품을 소비자는 필요가 있든 없든 소비를 해 주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곤란에 빠진다. 즉, 과잉 생산한 제품을 소비자가 과잉 소비해 줘야 경제가 유지된다. 그래서 학창 시절과 고성장 시기가 겹쳤던 필자는 절약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물론 소비주도 성장에 동참할 정도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필자는 그냥 그런 말을 듣고만 자랐지만...


과잉소비를 하려면 빌려서 쓸 수 있는 물건도 반드시 사서 써야 하고, 이미 있는 물건도 유행이 지나면 버리고 사야 한다. 중복 소비를 부추기는 대표적인 소비문화가 바로 유행이다. 유행에 따라 우리는 멀쩡한 옷과 신발을 두고 새로운 옷과 신발을 소비한다. 자본이 의도한 바인지 알 수는 없으나 과잉 소비의 최대 적은 바로 공동체다. 과잉 소비를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유지되면 곤란하다. 한 번을 쓰고 버리더라도 이웃에게 빌리지 않고 내가 사서, 내가 쓰고 버려야 한다. 이러한 것이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이끈 소위 소비주도 성장이다.


소비주도 성장이 만들어 낸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는 일자리 경쟁과 부의 양극화다. 사회가 요구하는 소비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는 많은 소득이 필요하다. 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기 위해선 지속 가능하면서도 많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하지만 일자리의 파이는 이미 정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을 타고 갈수록 ‘유연하게’ 줄어들고 있다. 이쯤 되면 경제의 성장이 나의 행복과 과연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의심해 볼만도 하다. 하정우가 주연한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서 마포대교를 폭파하는 테러범은 경제 성장이 공정한 분배로 이어지지 않고 양극화를 심화시킨 결과를 테러의 명분으로 이야기한다. 20년 전에 마포대교 건설 노동자였다고 밝힌 테러범은 G20 정상회의를 준비하기 위해 여전히 마포대교 보수 공사에 투입되었다며 누구를 위한 경제 성장인지 묻는다.

하정우가 열연한 영화 "더 테러 라이브"

우리나라와 소위 선진국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중산층은 부채 없이 아파트 30평 이상을 소유하고, 월급 500만 원 이상을 받으며, 2,000cc급 중형 자동차와 1억 원 이상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여행을 연 1회 이상 나갈 수 있는 계층을 말한다. 필자는... 그동안 필자는 중산층 백수라고 생각을 해 왔는데, 단단히 착각을 하고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반면 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은 1969년 공약집에 담았던 ‘삶의 질’에서 외국어 하나 이상 가능하고, 스포츠를 하나 이상 즐기며 악기를 다룰 줄 알고 남들과 다른 맛의 요리를 만들 줄 알고 ‘공분’에 의연히 동참할 줄 알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을 중산층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도 중산층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우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정기적으로 받아 보는 비평지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한국의 중산층 개념이 주로 물질적인 하부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면, 선진국의 중산층 개념은 비물질적인 상부구조를 지향한다.


좋은 일자리의 개념도 중산층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소비가 주도하는 경제 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고착된 좋은 일자리는 지속 가능하면서도 남들보다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이다. 이러한 일자리는 사실 좋은 일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일자리가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나쁜 일자리이다. 우리는 길이 잘 들어 익숙하다는 이유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소비주도 성장이라는 신발을 신고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신발이 익숙하지 않다고, 잠시 발이 아플지도 모른다고 계속 우리를 벼랑으로 이끌고 있는 소비주도 성장을 신고 달려야 할까? 이제 소비주도 성장의 사회가 죄 없는(?) 백수들을 왜 그렇게 비릿한 눈으로 응시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미친 듯이 달려야 어디로 가는지 생각을 안 할텐데, 자의에 의해서든,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든 백수는 그 죽음의 레이스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레이스를 계속하기 위해선 주자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어이, 백수들! 언제까지 쉬고 있을 생각이지? 빨리 경주를 시작해야지~


필자는 개인적으로 좋은 일자리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를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일자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산층의 개념과 더불어 소득이 주도하는 경제성장으로 나아가려면 좋은 일자리에 대한 인식도 변화가 필요하다. 사실 지속 가능한 일자리는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불행을 강요하는 일자리이다. 소비주도 성장이 필요한 자본은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현재의 불행은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한다고 지금도 우리 귀에 속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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